검은 용의 세계는 온갖 소리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가 이 세계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경쾌한 바람 소리, 태양이 모래를 내리쬐는 소리, 지하수가 샘 솟는 소리, 추수하는 사람들의 노래, 베어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도망가는 노비의 절규, 발끝으로 사람을 부리는 역겨운 인간의 웃음소리, 삼일 밤낮을 끊임없이 돌아가는 물레의 소리, 갑옷에 살점이 튀는 소리, 효시 당한 죄수에게 돌을 던지는 소리, 소리, 소리……
끔찍하고 추잡하고 더럽다.
파사딜이 얘기한다. '저들의 바람을 들어주고 너의 힘을 빌려주렴.' 하지만 하우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이 세계는 인간을 위해 돌아간단 말인가. 이 땅에 살고자 하는 목숨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그 중 인간이란 말인가? 인간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지.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들처럼 역겨운 존재는 없다!
파사딜이 얘기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이성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스스로 인간에 종속되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지혜를 구한다며 찾아오는 인간의 마음 속은 탐욕으로 진득이면서도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자신을 숭배한다며 힘을 빌려달라는 인간의 내심은 용을 깔보는 경박한 소리로 가득찼다. 이런 자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용의 생이라면 이 살갗 아래 흐르는 피를 저주하리라.
하우드는 인간으로부터 도망쳤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샤사막에서 아주 오랫동안 은거했다.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것이 깊은 외로움이요, 날카로운 고독이라는 것을 그 때에는 알지 못했다.
그 날, 그녀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시간이 찢어지는 소리는 고막이 얼얼해질 정도로 컸다. 하지만 그녀의 발자국 소리, 신이 나는지 조금 들뜬 심장소리, 향기가 배어나올 것만 같은 목소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경이였다.
아름다운 샤를롯테. 네가 내게 와주는 날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매일 아침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도, 매일 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것도 모두 네가 알려주었지.
검은 하늘을 수 놓은 작은 별들이 빛나는 소리를 아는가. 노오란 백년초의 꽃잎 하나 하나 펴지는 소리를 아는가. 새벽 이슬이 사르르 내려와 햇살에 쫓기듯 달아나는 소리, 메마른 딱총나무 가지마다 바람이 매달리는 소리, 벌레들이 찌르르 울며 구애하는 소리, 황혼의 붉은 베일이 지상을 덮는 소리…
네가 사랑하게 된 것들을 내가 사랑하게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너의 손이 더듬더듬 하늘을 어루만지면 그 끝에 다른 세상이 보이는 듯 했다.
너와 함께한 장소마다 새겨지는 추억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졌다.
나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느꼈다. 처음 와닿는 감정들에 혹여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뒤뚱거리면 너는 상냥하게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었지.
아무 조건도 필요 없이, 어떤 욕심도 없이.
역겨운 세계는 무너졌고 그 안을 너의 노래가 채웠다.
네가 나에게 새 삶을 주었어. 네가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외로움까지도.
네가 인간들과 어울려 지내는 날이면 가슴이 먹먹했고 네가 나없이도 웃는 날이면 두려움이 치밀었다. 엘드리치를 향한 너의 호의가 싫었다. 너의 빈자리가 견딜 수 없다. 질투가 나를 좀먹는다.
나는 이제 네가 아닌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끔찍한 세계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아, 고독에 잠겨 죽을 것만 같다.
"하우드님! 정신 차리세요!"
까마귀가 거칠게 흔들며 하우드를 깨웠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하우드는 고단한 몸을 일으켰다. 샤를롯테를 찾아야 한다. 오직 그 숙명같은 사명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하우드는 좀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눈물은 소리도 없이 흐른다.
"하우드님!"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하우드를 붙잡으며 까마귀가 다시 일갈했다. 답지않게 평소보다 까부는 모양새였지만 하우드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멍하니, 초점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시만요, 이것 좀 보세요! 샤를롯테님이 가꾸셨던 정원이…!"
까마귀는 자신의 발끝을 채우며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며 대경실색했다. 서둘러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곳 뿐만이 아니었다.
황폐하기만 했던 저쪽 지평선부터 푸른 물결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우중충한 먹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이 찬찬히 걷히며 환한 빛이 차올랐다. 망가져 있던 성이 시간을 거스르듯 다시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고 하우드의 앞에 작게 올라온 묘목이 순식간에 성장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하우드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므두셀라?"
오셀롯은 정신없이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룩스로 보낸 정찰병이 되돌아왔다. 손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소식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룩스의 군사들이 괴물을 사로잡았다거나, 아니면 전멸했거나.
"전하!"
정찰병이 반쯤 옆으로 흘러내린 투구를 바로할 정신도 없이 오셀롯의 앞에 부복하였다. 주변의 신하들과 기사들이 침음을 삼켰다. 팽팽한 긴장이 진지를 감쌌다.
"괴, 괴물이 사라졌다는 전갈이옵니다! 룩스, 바이에른, 미드라펜 전부! 무사하답니다!"
"뭐? 사라져?"
"잘못된 보고는 아니겠지?"
술렁이는 신하들의 사이에서 오셀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가봐야겠다."
무심코 올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시선이 마주친다. 마치 처음 너를 본 날, 그 딱총나무 아래에서처럼.
"하우드."
이번엔 내가 웃어본다. 두 손을 벌려 너를 끌어 안는다. 허물어지듯 그대로 안기는 너에게 속삭인다. 잘게 떨리는 어깨에 괜히 눈물이 맺힌다.
샤샤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울음을 쏟아낸다.
왜 나는 늘 네 앞에서 울보같은지.
조금은 부끄럽지만, 너의 앞에 서서 말한다.
"안녕.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