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은유림씨 어떻게 생각해요?”
“네? 무슨..?”
“저 여자가 이뻐요, 내가 이뻐요?”
“시인씨요.”
“......”
“1초도 안 걸렸죠? 대답하는데 0.1초도 안 걸렸죠?”
“......마음에 들었어요. 인정!”
“왜, 여배우 보니까 걱정 돼요? 내가 반하기라도 할까봐?”
“뭘 그런 거 걱정해요? 바람나면 보내주면 돼지.”
시인은 짐짓 화 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보내 줘요? 섭섭한데?”
“그냥은 안 보내주죠. 머리털을 다 뽑고 김장김치로 따귀를 때린 다음...”
“알았어요. 알았어. 하하하하. 그 유명한 김치 따귀는 절대로 맞고 싶지 않아요.”
“흥..”
“첨엔 여배우들 처음 보는데 너무 예쁘더라구요. 걱정했어요. 일반인 여자를 보면 예쁘다는 생각이 안 들면 어쩌나..”
“......”
“근데 시인씨 보고 나서 저 여자들이 하나도 안 예뻐 보여요.”
“거짓말은.. 치..”
눈은 흘겼지만 시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오는 걸 동원은 놓치지 않았다.
“근데.. 아까 오빠라고 잘 부르던데.. 다시 해 봐요.”
“내가요? 언제요? 난 모르는 일인데요?”
“하하하하. 시인씨 발뺌할 때 마다 귀여워 죽겠어요.”
시인은 창밖을 보며 표정을 관리했다.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데도 여름의 열기가 하나도 식지 않았다.
“진짜 덥죠? 이제 우리 저녁 먹으로 가야죠?”
“어디로요?”
“서울까지 왔는데 우리 집에는 가 봐야죠?”
“작가님 집에 맛있는 저녁도 있나요?”
“여동생이 있는데, 요리 참 잘 하거든요. 애가 딴 건 못해도 요리는 잘하더라구요. 하하하, 어쨌든 곁눈질로 본 것만 해도 십년은 될 겁니다. 걱정 말아요.”
“뭐 맛있는 거 해 주실 거예요?”
“재벌의 상징?”
“어머, 스테이크?”
“하하하하. 재료는 제법 사 놨어요. 보고 먹고 싶은 거 해 줄게요.”
시인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작가님은 어떤 집에서 살까?
진짜 재벌은 아니겠지?
차는 점점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깨끗한 도로에 으리으리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이 집일까?
사는 세계가 다른 것 같아 조금씩 긴장이 되었다.
곧 빌라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겉모습이 생각보다 낡아 보여서 살짝 안도감이 느껴졌다.
역시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한가 보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시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들이 즐비했다.
외제차들일까? 그 비싸다는?
“시인씨, 왜 그래요? 긴장돼 보여요.”
“아.. 긴장되기보다..”
“......?”
“훗, 작가님 재벌 아니냐면서 계속 놀리듯 말하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집에서 자랐거든요. 용돈 더 달라고 떼쓰고, 아껴 써야 한다고 계속 잔소리 듣는 그런 평범한 집요. 근데 막상 작가님 사는 곳에 오니.. 음.. 나랑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면 어쩌나.. 혹시 ‘별에서 온 그대’ 속 그런 너무 멋진 집에 작가님이 살고 있음 어쩌나.. 그런 걱정이 들어요. 작가님 집 혹시 그래요? 네비에 청담동이라고 적혀 있던데.. 부자들만 산다는 그 청담동이라니..”
시인은 조금은 걱정스런 얼굴로,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동원이 잠시 시인을 바라보더니 대답 하지 않고 내렸다.
자동차 앞으로 걸어와서 시인 쪽 문을 열어서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들어가 봅시다. 그런 멋진 집일지.. 어서요.”
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곧 동원의 손을 잡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동원이 현관문을 열고 시인에게 눈짓했다.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으로 들어선 시인의 앞에 탁 트인 거실이 들어왔다.
역시나 기대처럼 멋졌다.
아이보리색 소파가 거실 한 가운데 놓아져 있었는데 대리석 바닥, 은은한 조명과 잘 어울렸다.
거실 왼쪽으로 부엌이 보였다.
6인용 식탁이 넓게 자리 잡고 화이트 계열의 싱크대, 수납장이 너무도 깔끔하게 서 있었다.
“우와! 진짜 티비에서 보던 그런 집이네요. 엄청 멋져요.”
“마음에 들어요? 청소 열심히 한 거 티나요?”
“지금 청소가 문제예요? 나 다른 곳도 막 열어 봐도 돼요?”
“얼마든지.”
시인은 강아지처럼 쪼르륵 달려가서 구석구석 구경하기 시작했다.
방 일거라고 예상했던 곳은 욕실이었다.
욕조가 얼마나 넓은지 물이 아까워서 혼자는 목욕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응? 그런데 왜 문이 더 이상 없지?
“작가님, 방은 없어요?”
“여기 계단이요.”
동원이 현관 중문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부엌을 보느라고 미처 보지 못한 곳에 계단이 있었다.
시인은 다시 쪼르륵 달려가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2층은 전체가 서재였다.
벽 가득 책장이 있었고, 한 가운데 넓은 책상과 침대가 여유롭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진짜.. 좋아요. 이런 곳에 혼자 살다니.. 완전 연예인이야, 진짜.”
“어때요? 직접 보니까 나 다른 세상 사람 같아요?”
“네.. 완전요.. 완전 다른 세상 사람인걸요.”
“그래서.. 어때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 크크크크.”
“풉, 크하하하하.”
동원은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인이 걱정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나는 진짜 열심히 돈 벌어서 이 집 산거다.
부모님도 나름 잘 사시지만 다 내가 번 돈이다.
재벌까지는 아니지만 인기작가가 되면서 페이도 점점 높아졌고, 재테크도 잘 하고 있다.
나도 이런 집에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등등..
하지만 시인은 또 금방 눈앞의 공간에 반한 모양이다.
딴 세상 사람이면 어쩌나 했던 고민은 또 저 멀리 우주 너머로 도망간 걸까?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동원은 책장 속 책을 살펴보고 있는 시인에게 다가가 뒤에서 살포시 안았다.
“이제야 한 번 안아보네요.”
‘어.. 어떻게 하지? 어떡하지?’
“여기 들어 온 여자 시인씨가 처음이에요. 그 동안 계속 이 집에 있으면서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탁자가 필요한가.. 그림을 하나 사야 할까.. 그런데 시인씨가 내 공간에 있는 모습을 보니.. 그 동안 부족했었던 게 뭐였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나한테 와 줘서..”
동원의 품 보다 그의 말이 더 따뜻했다.
뭘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기분은..
방금까지 들뜨던 기분 대신 돌고 돌아 내 자리에 온 것 같은 서러움,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 행복함이 시인을 가득 채웠다.
시인이 몸을 돌려 동원을 안았다.
“나도 고마워요. 작가님이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요.”
시인이 고개를 들어 동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살짝 놀란 동원이 입을 떼며 수줍게 미소 짓는 시인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만났다.
말은 필요 없었다.
동원이 시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시인의 입술, 숨결까지 모두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인의 깊은 공간까지 빨아들였다.
하아.. 흡..
둘의 숨이 거칠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숨결을 나누었다.
너무도 편안한 공간에서 둘은 또 새로운 만족감을 느꼈다.
“하아.. 시인씨 내려가지 말아요. 계속 여기서 같이 살면 안돼요?”
“알겠어요. 여기서 살 테니까 작가님이 나 밥해주고, 맛있는 거 사줘요.”
“얼마든지 그럴게요.”
사랑에 취한 둘이 현실 감각 없는 대화를 나눌 때 둘을 현실로 불러 오는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내 배 아니예요. 작가님 배 속에서 나는 소리예요.”
“하하하하! 맛있는 거 해줄게요. 책 보고 있을래요?”
“아니요, 작가님 요리하는 거 보고 있을게요.”
동원은 시인의 손을 잡고 1층으로 내려왔다.
욕실 옆의 거울을 밀자 넓은 옷 방이 나타났다.
“우와!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진짜 옷 갈아입고 싶겠다. 막 꾸미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셔츠의 단추를 풀며 동원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가벼운 홈웨어를 가져 나왔다.
어느새 단추가 거의 열려 있었고 셔츠 사이로 동원의 상반신이 거의 다 드러났다.
“시인씨 짐은.. 아, 차에 있군요. 다시 가서 들고 올게요.”
자연스럽게 셔츠를 벗더니 흰색 반팔 면티셔츠를 입었다.
‘아빠 흰색 런닝이랑 똑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느낌이 다르지?’
“흠흠.. 다른 사람 앞에서 막 그렇게 옷 벗으면 어떡해요?”
“시인씨 떨리라고요. 어때요? 몸매 괜찮죠?”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당황한 듯 말을 하는 시인을 향해 동원이 웃었다.
“잠시 쉬고 있어요. 얼른 짐 빼서 가져 올게요.”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동원이 시인의 캐리어를 들고 왔고 시인도 편안한 옷차림으로 변했다.
본의 아니게 흰색 티셔츠에 회색 츄리닝 바지까지 커플룩이 완성되었다.
“나 좀 씻고 와도 돼요? 피부가 좀 간지러워요.”
“서울 공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얼른 씻고 와요. 나는 그거 상상하면서.. 아야!”
시인이 동원의 허리를 꼬집더니 눈을 흘겼다.
“스테이크 어느 정도로 먹어요?”
“미디움이요! 소스는 안 좋아해요! 소금만요.”
시인이 욕실로 사라지자 동원은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