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하아……."
「어이구, 젊은 처자가 이리 힘이 없어서 어째? 운동 좀 해. 비실비실해가지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대꾸도 못하겠다. 아, 아줌마 귀신이 제일 귀찮은 건 바로 이런 점이었다. 세상천지 모든 젊은이들이 다 자기 자식이지.
은혜는 정작 친부모에게도 못 들어 본 잔소리를 귀신들에게 듣곤 했다. 하긴 오지랖 넓은 아줌마들에게 있어 그녀만큼 좋은 먹잇감도 없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운동은커녕 밥 먹는 것도 귀찮아했다. 괴팍하게 들어버린 습관은 나이를 먹어서도 영 고쳐지지가 않았다. 고치려는 의지조차도 없었지만.
"하아, 헉……."
숨이 아주 턱턱 막혔다. 자, 잠깐만. 은혜는 무거운 다리를 멈춰 세웠다.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완주한 마라톤 선수마냥 숨을 헐떡였다. 마라톤 선수와 그녀의 다른 점이라면, 은혜는 이제 겨우 200m 오르막길을 올랐다는 것이었다.
「심각하구만…….」
쯧쯧, 아줌마가 혀를 찼다. 반박하고픈 말은 많지만 일단 참는 걸로.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킨 은혜가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오, 진짜 죽겠네. 은혜는 오늘 평생 치 운동을 다 몰아서 한 느낌이었다. 이른 아침 기상으로 모자라 장장 4시간에 걸친 운전과 등산까지.
"휴우……."
「어여 가자고. 해 지면 아가씨만 고생해.」
"……."
어제는 년년 거리기 바쁘더니, 이제 꼬박 꼬박 아가씨란다. 은혜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흥, 이게 바로 어른들의 더러운 수…….
「아가씨, 지금 내 욕하고 있는 건 아니지?」
"……."
눈치가 귀신같다는 옛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모양이다.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눈총이 느껴져. 은혜는 단언컨대 아줌마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녀의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은혜는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아마 눈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귀신의 형상과 마주했다면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을 거다.
은혜는 말을 돌리는 척, 아까부터 따지고 싶었던 말을 꺼내었다.
"요즘 시대에 차가 안 들어가는 데가 어딨어요."
「어딨긴. 여기 있지.」
역시 아줌마는 뻔뻔했다. 은혜의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은혜는 확 매꽃 선녀에게 달려가 버릴까하다 그만두었다. 가봤자 재수 없으니 제발 오지 말라는 소리만 들을 테다.
은혜가 부득불 찾아 갈 때마다 정색을 하고 내쫓는 그녀였다. 무당 밥 그릇 뺏지 말라나 뭐라나. 뺏을 생각은 추호도 없거늘.
예전에는 빌고 빌어서 그 용하다는 부적 몇 장을 받아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큰 효력은 없었다.
외려 화가 난 귀들이 모이고 모여 부적이 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기 십상이었다. 고 종이 쪼가리에 왕창 들이부은 은혜의 돈도 함께 찢어진 셈이었다. 물론 은혜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다.
'네 년이 귀에 꿀을 발랐으니, 어찌 벌 떼가 안 달려들꼬.'
'그럼 어떡해요.'
은혜의 투정에 매꽃 선녀는 태평하게 대꾸했다.
'팔자려니 하고 살아. 아니면 그냥 자리나 차리던지. 야, 차릴 거면 저 멀리 멀리 차려. 이쪽에도 상도덕이 있지. 선무당들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녀.'
참다 참다 달려가면 항상 영양가 없는 소리만 듣고 끝날 뿐이었다. 그래도 가끔 찾아가 넋두리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팥이나 소금 범벅으로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얼굴 안 본지 꽤 됐다. 한동안 서점 개업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
조만간 얼굴이나 볼 겸 찾아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은혜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잠시 조용하던 아줌마가 슬쩍 서두를 들이밀었다.
「근데 아가씨는 언제부터 그랬어?」
"뭐가요."
은혜는 귓가에 달랑거리던 이어폰을 뽑아 버렸다. 밖을 돌아다닐 때에는 항상 귀마개나 이어폰을 꼭 꽂는 편이었지만, 이놈의 시골구석에는 도통 사람도 귀신도 지나다니지 않을 것 같으니 오랜만에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하였다.
어휴. 답답해서 돌아가실 뻔했네. 은혜는 하루 종일 꽉꽉 막혀있던 귓구멍에 산뜻한 시골 공기를 쐬어 주었다.
「아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랑 말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은혜는 대충 얼버무렸다. 딱히 은혜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아줌마의 수다는 그칠 줄 몰랐다.
「글쎄,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말을 걸어도 듣는 척도 않는 거야. 서울 사람들 야박하기도 하지, 하면서 한참을 걷다가 아들내미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싶어 내 몸을 내려다 봤는데…….」
"……."
「그 때까지 진짜 몰랐다니까, 내가 죽은 줄.」
은혜가 만난 이들이 거의 그렇다. 예정된 죽음에도 너무 강한 염원을 가져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갑작스레 사고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저 가야 할 길을 몰랐던 거다. 죽음을 받아들일 틈도 가지지 못한 이들은 하염없이 이승을 떠돌아야 했다.
「뭘 어찌할 줄을 몰라 정처 없이 떠돌았지. 그러다 아가씨가 내 목소리를 들어 주니까……. 귀신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아줌마가 홀로 떠들던 와중 드디어 험난한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우리 집이여. 아줌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먼저 집으로 뛰어 들어간 것 같았다.
은혜는 이대로 도망 가버릴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어여 와!」
"네, 네."
굳게 닫힌 대문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혜는 아줌마의 조언으로 녹이 슨 대문을 발로 걷어 차 억지로 열어 젖혔다. 그러자 칠이 다 벗겨진 문과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않은 낡은 집이 눈에 박혀왔다.
"……아줌마, 아들이 의사라면서요?"
「아, 그럼! 우리 아들내미가 서울에서도 제일 큰 종합병원 내과에 그 뭐시냐, 레, 레지…….」
"레지던트?"
「그래, 그거! 레지, 뭐시기로 있다는 거 아녀.」
아, 레지던트. 은혜는 아줌마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라도 몸은 몸대로 힘들고 박봉일 때가 있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내과 레지던트라니. 지금쯤 장례도 길게 못 치르고 다시 병원의 좀비가 되어 있을 게 뻔했다.
「이런 촌구석에서 공부는 어찌나 잘 했던지. 남편 앞세우고 아들내미만 보고 산 보람이 있었지, 서울에서 의사도 되고.」
"흐음."
「근데 원체 바빠야지. 몇 년째 집에도 못 내려오고. 그래서 우리 아들내미 좋아하는 김치 좀 가져다 줄 겸 얼굴 보러 올라 간 건데…….」
"……."
「내가 그걸 못해서 이리 한이 남았는가 보다.」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소원은 의외로 특별할 게 없었다. 언뜻 형편없을 정도의 미련이 수많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거다.
죽음, 그 찰나의 순간에 차마 놓지 못한 아주 소소한 일상이 바로 그들의 마지막 끈이었다.
은혜는 괜히 귀를 문질렀다. 뭐 닿는 것도 없는데 화끈한 느낌이었다. 껄끄럽고 불편했다. 보이지 않는 이물질을 제거하듯 귓바퀴를 벅벅 긁었다.
그래, 소원이라 해봤자 거창하지도 않잖아. 게다가 이제 서점 문을 열기 전까지 남는 게 시간이었다. 알바생만 구하면 끝이야. 돌아가면 한동안 푹 잘 수 있어.
은혜는 알바생 모집 글을 떠올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아줌마 귀신 손님의 의뢰를 기다렸다. 오늘의 나는 관대하다. 그러니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세요, 형편없는 소원.
「자, 그럼.」
"네."
은혜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냉장고에 남은 김치, 우리 아들내미 좀 가져다 줘.」
"……네?"
하지만 은혜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꼭 아가씨가 직접!」
때때로 아줌마들은 엉뚱한 고집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
"……요즘 택배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데."
「거 참, 젊은 처자가 궁시렁 궁시렁.」
은혜는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오늘날 택배의 우월함을 브리핑하였다. 그러나 평생을 시골 토박이로 살아 온 아줌마는 반찬이란 자고로 보자기에 싸들고 직접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굳건한 집념을 내세웠다.
"아니, 꼴이 이상하잖아요. 대뜸 처음 보는 여자가 김치를 준다는 게."
완전히 해가 진 저녁 하늘보다 은혜의 미래가 더 깜깜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신호에 걸린 은혜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아, 정말 못 살아. 이놈의 애매한 마음 약함. 중도는 무슨. 그냥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척, 무시하는 척이라도 하면 편할 것을.
"하아……."
「땅 꺼지겠네. 그러다 복 다 달아나!」
이미 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인 걸요.
은혜가 헛웃음을 즈려 물었다. 무시라니. 평생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이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환청인가. 시뻘건 아이 라인을 관자놀이까지 그은 매꽃 선녀의 혀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제 팔자 제가 꼬는 법이지.'
옳으신 말씀이여요. 그러나 단단히 꼬인 팔자, 풀진 못하더라도 위로 정도는 필요한 법이었다.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당장 매꽃 선녀에게 달려가리라 마음먹었다. 소금에 절여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만 징징대다 와야지.
“으으.”
핸들을 돌리는 은혜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결국 아줌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병원은, 싫은데……."
온 몸을 바쳐 제 팔자 꼬기 바쁜 은혜의 눈앞에 '지안 종합 병원'의 네온사인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