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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34화 날다
작성일 : 20-09-29 06:34     조회 : 32     추천 : 0     분량 : 7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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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4화 날다

 

 윤화는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벽 안에서 들리는 소녀들의 흐느낌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보초를 서고 있는 두 군인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한 놈은 아예 모자를 눌러쓰고 잠이 들었다. 막사까지는 꽤 멀었고, 멀리 드문드문 서 있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창고에서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막사 쪽에만 보초를 서고 있었다. 주변은 막힌 곳이 없는 부두였다. 될 것도 같았다. 윤화는 어딘가에서 주운 나무 몽둥이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살수만 쓴다.’

 

 윤화는 조용히 읊조렸다. 석이 아버지에게서 택견을 배울 때는 실제로 쓸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석이 아버지는 윤화네 형제들 중에서도 윤화를 특히 더 예뻐하셨다. 공부도 그럭저럭, 택견도 그럭저럭, 농사일도 그럭저럭, 그다지 별나게 잘하는 것이 없어 세상일에 늘 심드렁했는데도 석이 아버지는 윤화를 특별히 더 아끼셨다.

 

 ‘우리 미순이 좋아해 줄라냐?’

 

 하셨다. ‘좋아하느냐?’가 아니었다. 그 말씀이 주문처럼 머리에 박혀 윤화는 그때부터 미순이가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 미순이는 모르겠지만 미순이가 윤화를 좋아해 주기 훨씬 전부터 미순이는 윤화 마음에 있었다. 윤화는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다지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미순이 신랑이 되어 함께 살고 있을 자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흐뭇했다.

 

 윤화는 소리 없이 다가가 졸고 있는 놈의 뒤통수를 나무 몽둥이로 후려쳤다. 놈은 컥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 서슬에 주춤하고 눈을 막 뜨려는 놈의 총을 획 낚아채며 이번에는 귀 뒷머리를 내리쳤다. 놈도 그대로 쓰러졌다. 문제는 창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여는 것이었다. 소리를 듣고 누구라도 달려오면 끝장이었다. 윤화는 흙을 한 줌 쥐어다 문손잡이에 뿌렸다. 가만히 비트니 소리가 안 났다. 됐구나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윤화는 겨우 열린 문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누군가 안으로 튀어 들어오자 소녀들이 잠을 깼다. 그리고는 들어온 사람이 일본군이 아니라 맑은 얼굴의 조선 남자인 것을 보고는 모두 순간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윤화가 서둘러 입에다 손가락을 갖다 대며 ‘쉬~!’ 하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녀들은 순간 모두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윤화는 낮은 목소리로 미순이를 불렀다.

 

 “미순아!”

 

 그러자 서너 명의 미순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들며 대답을 했다. 미순이가 그만큼 많았다. 그때 안쪽에 있던 미순이와 윤화의 눈이 마주쳤다. 미순이는 주춤주춤 일어나면서도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

 

 미순이를 발견한 윤화는 한달음에 달려가 미순이를 끌어안았다.

 

 “미순아!”

 

 그렇게 드디어 윤화는 미순이를 품에 안았다. 꿈만 같았다.

 

 “오라버니!”

 

 미순이 윤화를 바라보며 울었다. 울어서 맞아서 미순이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괘안나?”

 

 부풀어 있는 미순이 볼을 보자 윤화는 눈이 휙 뒤집어졌다.

 

 “지는 괘안아라. 이쁜 언니가 잡혀가고, 지는 몬생겨가 놈들이 안델꼬 갔어라.”

 

 아마도 아까 그 애기씨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윤화는 부풀어 있는 미순이 볼을 어루만졌다. 기가 막혔다. 다른 소녀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부러워했다. 누군가

 

 “미순이 오라버니인가 보네예.”

 

 했다. 그러자 윤화가 미순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울고 있는 미순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정혼잡니더.”

 

 소녀들이 놀라움과 부러움이 섞인 탄성을 질렀다.

 

 “자, 다들 조용히 하이소. 밖에 놈들은 내 때리눕혔으니 조용히만 하면 나갈 수 있습니더. 사방이 뚫렸으니 모두 흩어져가 어떻게든 집으로 가이소. 알겠습니꺼?”

 

 소녀들은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화는 미순이를 소녀들 사이에 두고는 가만히 밖을 살폈다. 고꾸라진 놈들은 미동이 없었고, 주변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윤화는 손으로 신호를 해서 소녀들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소녀들은 몸을 낮추고는 밖으로 빠져나갔다. 윤화도 이제 미순이 손을 잡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미순이가 주춤하고 섰다. 구석에 그대로 누워있는 아까의 그 애기씨 때문이었다. 윤화는 마음이 급했다. 미순이 다급하게 그 소녀를 불렀다.

 

 “언니, 언능 인나셔라.”

 

 소녀는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못갑니더. 더러버져가. 내 더러버져가...”

 

 소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윤화는 소녀의 어깨를 쥐었다.

 

 “인나시오. 더러븐 것은 저놈들이지 애기씨가 아닙니더!”

 

 소녀는 이글거리는 윤화의 눈을 보았다. 방금 보았던 그 짐승 같은 남자들의 눈과는 다른 남자의 눈이었다. 소녀는 용기를 내었다. 윤화는 미순이와 소녀를 데리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막사 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 들킨 것이다.

 

 “女たちが逃げる!”

 온나타치가 니게루

 (여자들이 도망친다!)

 

 하는 군인들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여기저기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소녀들의 비명 소리, 잡으러 뛰는 군인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비상 싸이렌도 울리기 시작했다. 같이 뛰다가는 다 잡힐 수도 있었다. 윤화는 소녀에게

 

 “뛰시오!”

 

 하고 건물 그림자 쪽으로 밀어붙였다. 소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곧 눈에 힘을 주더니 짧게 윤화와 미순이에게 눈으로만 고마움을 전하고는 주춤주춤 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윤화는 그 애기씨가 험한 세월을 헤쳐나갈 수 있겠구나 하고 믿어졌다. 강한 사람이었다.

 

 윤화는 미순이 손을 단단히 잡았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잠깐 돌아본 미순이는 우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미순이야말로 꿈만 같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윤화 오라버니가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윤화 오라버니 얼굴을 다시 보게 해주셔라.’

 

 

 

 

 미순이는 동네 우물에서 붙들려 와 트럭에 태워진 채 바로 읍내 주재소 뒷마당에 있는 창고에 갇혀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소녀들도 있었다. 모두 붙잡혀 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갇혀있었을까 미순이는 멀리서 석이 오라버니 목소리를 들었다. 내 동생 내놓으라고, 우리 미순이 내놓으라고 고함치는 석이 오라버니 목소리를 들었다. 오장육부가 다 끊어지는 것 같았다. 나 여기 있다고 고함을 치고 싶었으나 지키고 있던 순사들이 총을 들이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미순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그리고 총소리를 들었다. 순간 미순이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리고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셔라!’ 미순이는 속으로만 ‘어무이, 어무이.’하며 울었다. 오빠가 죽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미순이는 그 창고에 갇혀있다가 트럭에 실려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어딘가로 끌려갔다. 대낮에 소녀들을 잔뜩 태운 트럭이 달리고 있는데 막아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낯익은 읍내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그때 방물 가게 앞에 윤화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손에 든 나비 노리개도 보았다.

 

 “오라버니!!”

 

 미순이 목이 터져라 윤화를 불렀다. 순사들이 미순이를 잡아다 바닥에 찍어눌렀다. 언뜻 윤화가 소리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을 미순이는 마지막으로 보았다.

 

 

 

 윤화는 미순이 손을 틀어쥐고 뛰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때 뒤에서 윤화와 미순이를 발견한 군인이 소리쳤다.

 

 “あいつだ! あいつつかまえ!”

 아이츠다 아이츠 츠카마에

 (저놈이다! 저놈 잡아라!)

 

 군인들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틈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탕!’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미순이 윤화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미순이 가슴에서 붉은 핏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윤화는 쓰러지는 미순이를 안았다.

 

 “미순아!!”

 

 윤화는 믿을 수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오라버니..., 지는 됐어라. 지는 좋아라... 오라버니 얼굴을 봤응께. 내내 오라버니 얼굴을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라.”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물이 얼굴을 덮고 있는데도, 미순이는 웃고 있었다.

 

 “미순아! 안된다! 안된다!!”

 

 윤화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쳤다. 미순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자기 볼로 비볐다. 미순이 눈물이랑 윤화 눈물이 한데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물이 범벅이 된 미순이 볼을, 입술을 자기 입술로 정신없이 비벼댔다.

 

 ‘한 번만 더 울면 다음엔 입술이다.’

 

 그 약속을 이렇게 지키게 될 줄 윤화는 미처 몰랐다.

 

 “오라버니만, 오라버니만 사랑했어라....”

 

 미순이는 결국 축 늘어졌다.

 

 “미순아!! 미순아!!!”

 

 그것은 피를 토하는 비명이었다. 도망치던 소녀들, 붙잡힌 소녀들이 멀리서 그 소리를 들었다. 달려온 일본군들이 미순이를 윤화의 품에서 빼앗아가려 했다. 윤화는 미순이를 품에 안고 미순이 손목에 자기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나비 노리개를 걸어주었다. 나비 노리개에 묶어 두었던 옥가락지는 미순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미순이 손톱에 물든 주홍빛 봉숭아 물 위로 미순이의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일본군들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윤화는 그렇게 미순이 손을 붙잡고 손가락에 옥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고 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미순이의 옷고름 한쪽이 뜯어져 윤화 손에 남았다. 엊그제 아침에 곱게 단단하게 여며주었던 바로 그 옷고름이었다. 엊그제 아침이었다. 흩어진 저고리 사이로 봉긋한 미순이 앞가슴이 보였다.

 

 놈들은 기어이 그렇게 미순이를 윤화의 품에서 빼앗아갔다. 군인들은 킬킬거리며 미순이를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는 바닥에 길게 피가 흘러내렸다. 군인들은 바닥에 윤화를 찍어 누른 채로 윤화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있었다. 윤화는 불이 튀는 눈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놈들은 더 강하게 윤화를 찍어눌렀다. 점점 멀어지는 미순이의 모습을 보며 윤화는 소리쳤다.

 

 “개처럼 끌고 가지 마라! 이 개 쉐끼들아!! 사람이다! 내 사람이다! 내 색시다! 미순아! 미순아~!!”

 

 부두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 고함소리는, 그 처참한 울부짖음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녀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내 나라 임금님도, 내 나라 군대도, 그 소녀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오빠도, 정혼자도, 아무도 그녀들을 구하러 오지 못했다. 그런데 한 남자가, 한 소년이 그녀들을 구하러 와주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한 소년은 그녀들을 구하러 와주었다.

 

 그 순간 윤화는 그 소녀들 모두의 오빠였고, 정혼자였다. 소녀들은 윤화가 피를 토하며 지르는 그 비명이, 그 울부짖는 소리가 그 어떤 노래보다, 그 어떤 천상의 소리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이라고 했다. 내 사람이라고 했다. 내 색시라고 했다. 소녀들은 모두 가슴으로 울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그 소년에게 고마웠다. 그중에는 무사히 도망친 소녀도 있었다. 안타깝게 다시 붙잡힌 소녀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 윤화에게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마웠다. 구하러 와주어서. 데리러 와주어서....

 

 윤화의 피를 토하던 소리는 순간 ‘퍽’하고 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소녀들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이 살았을까. 죽었을까 알 수 없었다. 다시 잡혀 온 소녀들 사이로 군인들은 미순이의 몸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소녀들은 얼른 미순이의 몸을 받아 앞섬을 여며주었다. 안타깝게도 그 속에는 아까의 그 양반집 애기씨도 다시 붙들려 와 있었다.

 

 그 애기씨는 미순이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목에 묶여 있는 나비 노리개를, 손가락에 끼워진 고운 빛깔의 옥반지를 보며 한없이 울었다. 소녀들 모두 미순이의 주검을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숨이 떠나버린 미순이의 몸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소녀들의 손톱에도 미순이처럼 주홍빛 봉숭아 꽃물이 들어있었다. 멀리 정신을 잃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윤화가 군인들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애기씨는 일어나 윤화를 향해 큰절을 했다. 다른 소녀들도 따라 일어나 큰절을 했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없었다고, 다들 제 발로 몸을 팔러 간 것이라고 한다. 붙잡혀 왔든, 제 발로 갔든, 그 소녀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것을 이곳에 감히 글로 쓰고 싶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일본군 위안부’라 불렸던 그 소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부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작가는 더욱 아니다. 그저 할머니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있는 손녀일 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그때 그 소녀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조금 공부했다. 여자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도저히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겪은 소녀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 말로 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그저 옛날, 무지했던 시대의 슬픈 역사가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일본을 미워하자고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일본의 소년 소녀들이 있다면 자기 나라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은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문화, 아름다운 자연, 맛있는 음식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하면 안 되는 짓이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아니 바로 우리 동네에서, 옆집에서, 사람을, 여자를 그저 자기의 정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이들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괴롭히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있다. 폭력과 무지는 지금도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끝없이 그녀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 데리러 가야 한다.

 

 아직도 어떤 이들은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하면 없었던 일이 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계속 우기면, 아닌 것은 그런 것이 되고, 그런 것은 아닌 것이 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런 일은 없었다고 치자. 미순이는 그날 우물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치자. 미순이는 우물에서 무사히 집에 돌아와 남은 설거지를 하고 석이가 밭에 나가는 데 잘 다녀오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고 치자. 어머니랑 점심을 맛나게 먹고, 오라버니 새참도 챙겨주고, 저녁에 노미 언니에게 건너가 같이 수도 놓고, 읍내에 다녀온 윤화 오라버니랑 눈도 맞추며 웃고, 그랬으리라 믿자.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날들이 지나고 윤화는 신랑옷을 입고, 미순이는 혼례복에 족두리를 쓰고 온 동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아름다운 혼례식을 치루었으리라, 둘은 노미와 진화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손을 꼭 잡고 첫날 밤을 보냈으리라. 그랬을 것이라고 믿을까.

 

 그렇게 믿으면 죽었던 미순이가 살아 돌아올까? 그렇게 믿으면 그 소녀들이,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 소녀들이 다시 열여섯의 예쁜 소녀가 되어 고운 신랑 만나 사랑받으며 살다가 아들딸 많이 낳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게 될 수 있나?

 

 돌아온 소녀들, 살아남은 소녀들이 겪어야 했을 그 처참한 세월이 없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여러분께 반드시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때 우리에게는 몸은 빼앗겼지만, 마음은 빼앗기지 않은 소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그 삶은 처참하게 잃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잃지 않은 할머니들이 계시다.

 

 할머니는, 노미는 이 이야기를 내게, 손녀에게 들려주시며 울 수조자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미순이를 잃어버리고 그 아름답던 날들도 끝나버린 것 같았다고 하셨다. 한글도 이제 거의 다 배워 책 한 권을 읽어내는 것을 보며 참 자랑스러웠다고 하셨다. 바닥에다 쓰는 한글 글씨체가 어찌나 반듯하고 예쁜지 볼 때마다 글씨 참말 잘 쓴다고 칭찬했었다고 했다. 나물을 어찌나 맛나게 무치는지 시집오면 맛있는 나물 많이 해 먹자고 약속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미순이에게 많이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할머니만 살아서, 할머니만 아들딸 낳고 살아서, 동생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렇게 빼앗겨 버려서, 많이 많이 아주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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