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무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촬영 중이라고 되뇌고 되뇌어 놓고는 이 놈, 저 놈에게 스리슬쩍 마음이 열린 것이 영 탐탁히 않았다.
모솔 티내는 거야 뭐야?
아주 그냥 교복 바지만 입으면 다 좋은 거야?
마치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위험하게 반짝 거리던 빨간 하트가 다시 조용해지자 재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싫다, 내가 제일 싫어.
정신 차리자, 권재하!
여기 이곳에 진짜는 없어.
남친을 찾을 거면 현실 세계에서 찾자고!
다시 마음을 다 잡은 재하는 문현빈에게 말했다.
“내가 마녀 같아?”
재하는 여유롭게 쓱 웃어 보였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너 스스로 알아내봐.”
이정도면 헷갈리려나?
“그래, 맞아.”
문현빈이 너무 깔끔하게 동의해 버리자 재하는 김이 좀 빠졌다. 나름 혼란을 줘보려 했는데 별효과가 없어 보여서 관두기로 했다.
“재하 너는 첫 번째 라운드에서 바로 빠질 생각이야?”
재하는 눈썹을 치켜떴다.
“여긴 비밀이 없니?”
그러자 문현빈이 큭 하고 웃었다.
“그게 무슨 비밀이야? 너 하는 거 보면 바로 알지!”
재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대놓고 아무것도 안하긴 안했다.
“너는 미션 안 해? 고백 말이야.”
재하는 혹시 문현빈과 첫 탈락자를 두고 경쟁하게 될까봐 슬그머니 물어봤다.
“난 탈락하기 힘들 거야.”
문현빈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좀비나 뱀파이어 알지? 뭐 그 비슷한 존재라고 보면 돼.”
절대 살 찔 것 같지 않은 날카로운 턱 선과 핏기 없는 안색이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화롯불 때문인지 문현빈의 눈동자가 안경 렌즈 너머로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순간 으스스했다. 긴 속눈썹이 만든 그림자 때문인지 눈 밑도 유난히 어두워보였다.
재하는 문현빈이 병약한 미소년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권재하.”
문현빈이 슥 다가왔다. 재하는 체육복 지퍼를 턱에 닿을 정도로 확 올렸다.
“왜?”
재하는 문현빈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흠칫 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훑었다. 카메라가 여기 저기 설치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안심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생각이 바뀌어서 계속 살아남고 싶어지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어.”
재하는 문현빈의 말이 무슨 의미 인지 생각해 보려다 말았다.
연달아 두 번이나 스스로 뒤통수를 치고 나니 재하는 그닥 의욕이 안 생겼다.
“그래. 근데 그럴 일이 있으려나 싶다.”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재하에게 문현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뭐든 도움이 필요하게 될 거야. 그럼 꼭 말해.”
재하는 문현빈의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우서진을 조심해.”
“권재하 나 좀 봐봐. 나 완전 쪽팔려!”
호기롭게 이승호를 불러냈던 이은주가 가장 먼저 돌아와서는 재하에게 입을 삐죽 내밀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재하는 이은주의 말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우서진을 조심하라니?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문현빈은 자리를 떠버렸고 재하는 이은주에게 붙들려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재하는 정말 뜬금없는 문현빈의 말을 흘려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최소한 무슨 설명이라도 들었으면 덜할 텐데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진 말이라 더 한 것 같았다.
아! 찝찝해.
아! 답답해!
“권재하! 너 내말 듣고 있어?”
이은주가 새초롬한 눈으로 재하를 보고 있었다. 재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미션은 했네. 대단하다.”
“뭐야! 그게 아니잖아. 이렇게 떡 져 있는 걸 봤으며 얘기 해줬어야 되는 거 아니니? 이런 꼴로 고백 하는데 먹히겠어? 게다가 방송까지 되면 완전 웃기잖아.”
재하는 그제야 녹아내린 마시멜로가 덕지덕지 묻어 더러워진 이은주의 교복 리본이 보였다.
“아!”
재하가 뒤늦게 알아차리자 이은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은주는 아무 말 없는 재하를 뾰족하게 쳐다봤다.
“일부러 나한테 말 안 해줬지?”
이은주의 말에 재하는 얼른 아니라고 했다.
“아니! 몰랐어. 알았으면 얘기해 줬지!”
재하의 말에 이은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몰랐겠지! 증거도 없으니 내가 이런 말 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 줄 거고, 그치?”
재하는 이은주의 생트집에 머리가 띵했다.
원래 이런 성격인가?
막무가내 자기중심 무논리 성질대마왕?
재하는 애교스럽고 살가운 얼굴의 이은주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자 떨떠름했다.
“최지민, 정은성, 우서진, 김산. 오면서 보니까 방금은 문현빈까지. 그렇게 여기 저기 다리 걸치고 다니면서 미션에는 관심 없는 척 하는 거 너무 뻔해 보이지 않니?”
재하가 자기 말에 난감해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이은주는 좀 더 몰아붙였다.
미치겠네.
이 타이밍에 왜 화장실 가고 싶냐고!
재하는 조금씩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이은주의 되지도 않는 막말에 반박하거나 기분 나빠할 여유가 사라질 정도로 정말 화장실이 급해졌다.
“이은주! 미안한데 조금 있다 다시 얘기하자!”
더 이상 참다가는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 하고 큰일 나겠단 생각에 재하는 급히 뒤돌아섰다.
제일 가까운 화장실은 강당이었다. 5분도 안 걸린다.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이은주는 재하가 자기를 무시하듯 휙 돌아서자 재하의 팔을 잡으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은주! 권재하! 무슨 일 있어?”
이승호가 차해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이은주는 두 사람을 보더니 재하의 팔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아 보여서 불안했지만 재하에게 지금은 화장실이 최우선이었다.
“해인아!”
차해인은 자기를 보고 환해지는 재하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권재하! 화장실 갈래?”
독심술?
“어! 빨리 가자. 나 죽을 거 같아!”
이은주는 재하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화장실 때문에 죽을 거 같다고!
재하는 일일이 날을 세우는 이은주가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다급하게 앞서 나가려는 재하 앞에 나머지 아이들도 우르르 나타났다.
“어디 가?”
강나연이 물었다.
“강당에, 화장실.”
차해인의 대답에 강나연과 김희윤도 가겠다고 나섰다.
“나도 갈래!”
분위기를 살피던 이은주가 갑자기 따라 나서며 이규진에게 물었다.
“규진이 너는?”
이규진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여자애들 모두가 함께 가기로 했고, 가는 김에 간단히 씻고 오기로 했다.
재하는 잰걸음으로 가장 먼저 강당으로 향했다.
편안하다!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갔다 와 봐야 소소한 행복을 알 수 있나 보다.
재하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느긋하게 이완된 몸과 마음을 음미했다.
“그럼 미션은 다들 한 거네?”
차해인의 물음에 양치를 하던 여자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러면 계획대로 내일 아침 재하가 탈락할 확률이 100% 확정이었다. 재하는 너무 좋아서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재하 너도?”
차해인이 물었다.
“뭐 대충.”
재하는 칫솔을 입에 넣으며 얼버무렸다.
“혹시 커플 연결 된 사람 있어?”
이은주가 냉큼 물었다.
“나연이 너 커플 된 거 아냐?”
강나연이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정은성이랑 너 잘 어울리던데.”
재하는 깜짝 놀라 강나연을 봤다.
폼 클렌징 모델처럼 뽀송한 피부와 청순가련한 외모, 털털한 성격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강나연이 왜 하필 정은성에게 고백을 했는지 재하 입장에서는 의문이었다.
미션을 해야 되니까 아무한테나 한 건가?
“차해인 진짜 예쁘다.”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차해인을 보고 강나연이 말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어내는 차해인을 보며 재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강나연 너도 예뻐.”
재하의 말에 강나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장난치지 말라고 재하의 팔을 툭 쳤다.
재하는 배시시 웃으며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정은성 같은 놈 말고 정말 괜찮은 애랑 잘 됐으면 좋겠어.
“규진이 너는? 우서진이 뭐래?”
재하는 쉴 틈 없이 물어대는 이은주가 대단해 보였다.
이은주의 물음에 이규진은 아직 거품이 남은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자기한테 고백하는 건 자유인데, 자기는 고백을 하지도 않을 거고, 받아주지도 않을 거래.”
뭐?
재하는 이규진의 말에 깜짝 놀라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던 치약을 뿜을 뻔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첫 라운드에서 탈락하겠단 말이야?”
정확히 재하가 묻고 싶은 것을 이은주가 대신 물어주자 재하는 아까 짜증나게 굴었던 이은주를 조금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으며 이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규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아무 말 없이 남은 거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재하는 순식간에 평온함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우서진을 조심해.’
문현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이런 의미였단 말이야?
재하는 숨을 깊게 들이쉬어 머리를 가볍게 해보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