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기타
흘러내림(제4권) - 열매
작가 : 말레이
작품등록일 : 2020.8.20

이 소설 "흘러내림"은 언어의 시작 점인 창세 때부터 2040 여 년 대의 미래까지를 언어와 문자를 소재로 이어가는 소설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언어 등의 모든 것이 오늘 우리모두에게까지 흘러 내려왔으며 이 흘러내려옴은 막힐 수 있는 강과 내처럼 수평적 흐럼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수직적인 흘러내림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귀한 우리의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그 배에 복된 소식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제로서 제1권 - 뿌리, 제2권 - 나무, 제3권 - 가지, 제4권 - 광합성 중의 제4권이다.

 
음악이라는 언어
작성일 : 20-08-30 19:07     조회 : 26     추천 : 0     분량 : 7206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음악이라는 언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아마도 당시에 내게 신앙생활이 없었다면 나의 삶과 인생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 와서 출석을 하던 성도교회의 목사님께서 여러 해를 지켜보시다가 내가 고 3때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였던 사실을 들으시고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던 내게 신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첫 학비를 주시면서 학교를 안내해 주셨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 주시다가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는 나를 믿음의 아들로까지 삼아주셨다.

  그렇게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반대로 연세가 드신 어르신께 그 사랑을 보답으로 효도를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할 무렵 나는 생각지 않게 선교사로 ‘몰리샤(Molliyshya)’라는 나라로 떠나오는 바람에 두 분은 마지막 정년퇴임을 하시는 그 날까지도 나의 선교사역의 현장에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다가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시고 조용한 지방에 내려가 사시면서 주변의 장애인 교회와 양로원 등을 도우시며 헌신으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이시다. 나는 덕분에 신학교에 다니며 감사함으로 열심히 공부를 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인생과 삶에 대한 정체성을 갖는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던 무렵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4년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은 지양하고

 학부에서는 목회에 도움이 되는 일반 학문을 공부하고 난 이후

 다시 대학원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좋겠다.“

 

 고 강의중의 말씀을 나 역시 좋게 여기고 그 학기를 끝으로 그 학교를 휴학하였다. 그리고 목회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무엇인가 생각하니 세 가지가 생각이 났다. 첫째는 철학이요, 두 번째는 어학(영어)이요, 세 번째는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철학은 시골 촌놈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어학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음악에는 상당히 관심이 있었고 또한 좋아 하였기에 교회음악을 공부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내가 이렇게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작은 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하여도 시골 촌놈이 문화생활을 누려보지 못한 탓인지 음악에(그 중에서도 특히 노래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그렇기에 노래는 항상 어렵게만 느껴지곤 하였었다. 아니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적할 표현일 것 같다. 더구나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지병이 있으셔서 풍금반주를 녹음하셔서 그것을 틀어주시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도록 하시다가 결국은 2학기가 되면서 건강상 이유로 학교를 그만 두시게 되었고 그 뒤로는 음악선생님이 안 계셔서 우리는 한 학기 내내 음악시간에 자습을 해야만 하였다. 음악이라는 고통 속에서 헤어나 자율학습을 하게 되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가고 2학년이 되어 새 학기를 맞았다. 2학년 첫날 조회를 하는 중에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이 인사를 하시는데 조그만 키에 예쁘장하게 생기신 분으로 이제 음악대학을 막 마치고 첫 교사 발령을 받고 오신 것이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가고 수요일 오전 세 번째 시간이 음악과목 시간이었다. 수업을 준비하려고 가방을 열고 책을 꺼내려고 보니 음악 책을 안 가져온 것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음악이 자습시간이다 보니 버릇이 들어 까맣게 잊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스스로 그러한 사실에 위안을 삼으면서 더불어 가냘프신 여자 음악 선생님이신 분이 또 이제 막 초임해 오신 분이신 데 이번 첫 번 시간이야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한 상황은 나 말고도 여러 명이나 더 있었다. 당시 나는 시골의 천진난만하고 착하디착하기만 한 소년이었다. 가끔 이렇게 책을 안 가져가는 것처럼 실수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실수였지 악의가 있거나 꾀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고 나 스스로 그렇게 나를 인정하며 한 번의 작은 실수에 별일이야 있으려니 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나의 그런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막 부임을 해 오신 문이고 그렇게 연약하게만 보이던 그 여선생님은 첫 시간부터 책을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가지셨던 교사로서의 역사적 사명감과 학생들에게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책을 안 가져온 학생은

 전부 밖으로 나가! “

 

 그 한 마디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뭐, 큰일이야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던 아니, 그렇게 믿고 싶던 우리의 기대는 일찌감치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연약하신 그 음악 선생님께서 정말 음악을 하신 분?(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음악을 많이 공부하면 신경이 예민해 진다. 그래야만 음을 잡아내고 결국 음악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그런데 나처럼 신경이 둔하고 늦은 나이에 음악을 공부하면 당연히 아주 고생을 하게 된다.)답계 대단히 깐깐하신 분이었다. 그 날 그 선생님이 아주 날카롭고 다부진 음성으로 내리신 명령에 의하여 평생 처음으로 우리는 귀를 잡고 한 시간 내내 오리걸음과 토끼뜀뛰기를 하면서 화단을 빙빙 돌아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오리걸음과 토기뜀뛰기가 그렇게 힘든 것 인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 왔을 때 다리가 퉁퉁 붓고 알이 배겨서 무진장 아픈 것은 물론이고 걸음을 걷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그때 나는 그 작고 깐깐하시던 여선생님에게 대한 하나의 오기가 생겼는데 이런 것이었다.

 

 “두고 봐라!(혼잣말로)

 내가 음악 성적을 보기 좋게 올려

 결코 음악 책을 가져오지 않은 것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던 것을

 증명해 보이리라!”

 

 뭐 그런 생각 이었던 것 같았다. 당시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이론과 노래를 포함한 음악이었는데 그런 오기가 생긴 것이다.(그러나 이런 오기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 오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하여 감각도 없고 전혀 모르던 음악을 익히고 감각을 갖느라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였던가?) 그래서 노래에 소질이 없던 나는 음악 이론으로라도 선생님과 겨루어보겠다? 는 오기로 음악 공부에 별 관심도 없던 내가 어느 날 인가부터 음악이론을 열심히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였는가? 놀랍게도 그 해 첫 음악 시험에서 생전처음 음악에서 90점을 넘게 맞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비슷한 평균 성적으로 우등생을 해보고 나서는 자만심으로 바로 놀기에 돌입하여 몰입하면서 초등학교 내내 자유로운? 성적의 생활을 하던 내게 이런 성적은 처음 이었다. 그에 자신감을 갖은 나는 그 이후로 음악이론 공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 기운에 힘입어 공부하는 법이 터득되었는지 그렇게 중학교 2,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갈 때에는 중학교 졸업고사 성적과 고등학교 입학성적이 좋아 고등학교 내에 특수반을 운영하던 예산 고등학교에, 자랑스럽게도 합격을 한 것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특수반에 편성이 되어(비록 턱걸이 이었겠지만) 보통 반과는 다른 건물에 배치된 특수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었다.(나는 사실 그때 스스로 큰 인재가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가정 형평 상 봇짐장수를 하시면서 옷 봇짐을 머리에 이시고 멀리 시골로 다니며 고생을 하시는 어머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성적으로 장학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다행히 이웃집에 사는 선배가 관악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관학부원이 되면 근로 장학금을 준다기에 중학교 때의 일로 음악도 좋아하던 나는 그저 단순한 생각으로 그 관악부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여도 분수를 넘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물론 한 때 관악 부를 지도하는 음악 선생님은 관악부 사상 특수반에서 관악부를 지원한 역사상 아마 첫 번째요 마지막이었을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면서 관악부 사상 경사가 난 것처럼 좋아하시고 또 나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해 주시었고 또 선배들도 약하디 약하게 생긴 후배여서인지 우락부락한 선배들도 이런 후배를 거칠게 막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야 그렇다 한들 어디 단체 활동에서 열외가 있을 수 있던가? 당시 관악부의 자체 규율은 그 특성상 매우 철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어긋나면 항상 야구 방망이! 와 곡괭이 자루!, 걸레자루!(과장이 아닌 사실이다.)가 엉덩이를 두드리며 춤을 추던 당시에는 자주 엉덩이에 찜질을 당하는 것은 일반적인 생활이었다. 그런데 만약 한 주간에 주말을 다가오도록 이러한 사실이 없이 한 주간을 다 보내고 토요일이 다가오게 되면 무언가 찜찜하여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하고는 하였다. 차라리 주간에 한두 번 매를 맞았으면 선배들도 양심? 은 있었던지 더 이상 무리? 는 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우리들의 마음도 편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중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무엇인가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처럼 개운치 않고 불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맞을 때도 미리 앞에 나가 맞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한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때리는 사람의 힘이 더 강할 것임으로 사실은 더 아플 수 있겠지만 30~40명이 모두 매 맞는 동안에 모두의 가슴속에 그 만큼의 매를 맞는 것이니 그것을 다 보고 난 다음 나가게 되면 이미 40번이나 매 맞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속으로 고통에 신음하다가 정작 현실적인 고통을 더 겪어야 하였기 때문이다.(이런 생활이 일부러 하기는 어렵겠지만 다가오는 일이었기에 그 일들을 통하여 참고 인내하는 강인함의 기초가 된 것 같기는 하다.)

  또 그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도 선배들로부터 그렇게 구타를 당하며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 것인가? 그런데 다시 그것을 후배들에게 전하면서 이어가는 전통을 보면 기가 막혔다. 그래서 우리가 3학년이 되어서는 정말 그러한 전통? 을 대폭 줄였다.(하긴 다들 자신들은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을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지만....) 이렇듯 몽둥이에 찜질을 당한 대가로 근로 장학생이라는 명목으로 학비를 감면 받을 수 있었고 더불어 음악 실력? 도 자연스럽게 갈고 닦였던 것이다.

  그렇게 음악을 접하였지만 그렇다고 성악을 잘 할 만큼 그렇게 다듬어 진 것은 아니기에 어느 음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아마 낙방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찾던 중에 대한신학의 안양 주간학부에서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거기에 교회음악과가 있었다. 이제 3회 신입생을 모집하니 나 같이 성악에 문외한도 이곳에 들어가서 배울 기회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응시를 하였고 생각대로 좋은 실력을 가진 학생들이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학교에 많이 몰려 올 리가 없었기에 나는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학교에 늦게 입학을 하였지만 나보다도 훨씬 나이 많은 분들이 동급생으로 함께 공부하면서 그분들이 젊은 학생들 보다 더 열심히 한다는 생각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이가 드신 분들은 공부하고 연습하는 일에 정말 열심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나는 도시락 하나 싸들고 한 달 간 전철을 서울의 화양동에서 안양까지의 구간 안에서 마음대로 탈 수 있는 자유승차권인 패스를 들고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길게 기른 상태가 되어야 다시 짧게 자르고 다시 길게 될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다보니 사람들의 선입견에는 아마도 이상한 사람, 혹은 예술적인 사람? 아니면 지저분한 사람으로 각자의 생각대로 보이는 그대로 생각을 하였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친구도 많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깡마른 체구에 긴 생머리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에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사촌형으로부터 물려받은 바바리를 걸치고 다니는 모습은 가히 가관이었으리라.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곳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1학년 1학기 때에는 친구도 없다가 2학기 때에 방학을 하면서 청계천에 가서 중고서적을 사려고 하는데 필요한 사람은 사다 주겠다고 했더니 그 부탁을 해온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와 둘도 없이 친해진 것이다. 그리고 왜 친구가 없었는지 훗날 그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삐쩍 마른 장작개비 같은 몸에 바바리를 걸치고 다녔으니 겉으로 보면 영락없이 깡다구로 이루어진 조폭 두목 같이 생긴 저놈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가 알고 보니 완전히‘물’이라면서 힘도 센 그 친구는 나의 몸을 완전히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몸무게가 가벼운 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친구가 없던 시절에 밤 10시에 도서관 문을 닫을 때 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하였고 2학년 때에는‘안 울타리’라는 연극부에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연습실에서 연습에 열을 올리고는 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학도호국단이라는 학생조직이 막을 내리고 내년부터는 학생회라는 조직으로 운영이 된다는 소식에 친구들과 함께 작당을 하여 이제는 학생회장에 출마를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가장 신임도가 있는 친한 그 친구를 학생회장 후보로 등록을 해 놓고 함께 선거판에 뛰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복무를 하고 온 일명 군필자들이 학도호국단장을 하였었는데 아무래도 인생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군필자들이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인지도가 높았었는데 이제는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면서 아이디어를 내기를 우리는 반대로 젊은이의 바람을 일으켜 보자면서 청풍(靑風:젊은이의 바람)을 일으키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래서 선거 구호를 청풍으로 잡고 낮에는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을 만나면서 설득을 하였고 밤에는 자취하는 친구의 집에서 선거 전략을 짜면서 임한 결과 드디어 선거에서 대승을 하여 학생들의 대표로 학교 최초로 군 미필자가 당선이 되었었다.

  그 후 당연히 임원회가 구성이 될 때에 나는 음악과로서 문화부장에 임명이 되어서 그때부터 전공과 써클! 학생회 임원 등을 통하여 문화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기본기를 쌓아올 수 있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좋은 배우자를 얻으려면 많은 연애 경험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대학에 시절에 친구들과 나아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을 만 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기에 그저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연극부의 연습실에서 젊은 열정을 불태웠고 그 후에 비록 학생회 임원과 졸업위원을 거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를 통하여 약간의 경험을 갖는 정도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하여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5 또 하나의 훈련과 연단 2020 / 8 / 30 46 0 5836   
4 음악목회를 꿈꾸며.. 2020 / 8 / 30 35 0 4411   
3 음악이라는 언어 2020 / 8 / 30 27 0 7206   
2 인연의 언어 2020 / 8 / 30 42 0 6346   
1 꿈을 향한 여정 2020 / 8 / 30 287 0 5283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흘러내림(제1권)
말레이
흘러내림(제2권)
말레이
흘러내림(제3권)
말레이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