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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흘러내림(제3권) - 꽃잎
작가 : 말레이
작품등록일 : 2020.8.20

이 소설 "흘러내림"은 언어의 시작 점인 창세 때부터 2040 여 년 대의 미래까지를 언어와 문자를 소재로 이어가는 소설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언어 등의 모든 것이 오늘 우리모두에게까지 흘러 내려왔으며 이 흘러내려옴은 막힐 수 있는 강과 내처럼 수평적 흐럼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수직적인 흘러내림이고 그렇게 우리에게 주신 것 중의 귀한 우리의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그 배에 복된 소식도 나누어야 한다는 주제로서 제1권 - 뿌리, 제2권 - 나무, 제3권 - 가지, 제4권 - 광합성 중의 제3권이다.

 
한글의 시작과 흘러내림
작성일 : 20-08-30 19:00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1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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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시작과 흘러내림!

 

 한글은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 만들어 졌을까?!

 

 역사적으로 세종에 대한 기록을 확인해 보면

 

 “세종은 서기 1397년(태조 6) 5월 15일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諱)는 도(?), 자는 원정(元正)으로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 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능통하였다.

 그리고 정사를 펼침에 있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백성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세종시대는 유교정치가 펼쳐졌으며 삼국시대 이후부터 대한민국 이전의 민족역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시대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았는데 훈민정음을 만들고, 농업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의약 기술과 음악, 법제를 정리하고, 공법(貢法)을 제정하였으며 국토를 확장하는 등 수많은 다양한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하게 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많은 일들을 직접 주도하고 진행될 수 있도록 추진하였던 왕이 바로‘세종’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가 이룬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평가하라면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한글’의 체계를 세우고 정리하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한글’이야말로 우리 민족문화가 현대에 와서 신속하게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본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의 각종 기기와 문자가 병합하여 만나게 될 때‘한글’은 더더욱 그 우수성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한글’은 더욱더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종이‘한글’을 만든 것은 그만큼 중요할 뿐만 또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종의 전반기에는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와 제도를 정리하였으며, 수많은 편찬사업이 진행됨으로 유교적 정치기반이 튼튼해 졌다. 그리고 각종 문화 제도를 확립함으로 국가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적 수준을 한층 더 높일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한글’을 만들던 당시의 상황과‘한글’을 만드는 일이 정치와 문화 및 여러 가지 일들이 서로 맞물려 대립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세종’이‘한글’을 만든다는 일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한글’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공개되기보다는 은밀하게 추진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제자 과정과 그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하여 오늘날 이견이 분분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 여 년 전에 만들어진‘한글’은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 만들어 졌을까? 우선‘한글’이 만들어진 동기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유괴사건 때문이었다. 세종 6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아이를 유괴하여 키우다가 사실이 알려지자 이들이 그 아이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을 하였던 것이다.

 둘째, 김화 사건 때문이었다. 세종 10년에는 진주에 사는 김화 라는 사람이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사실이 세종에게 보고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은

 

 “어떻게 자식이 친아버지를 상해하는가?”

 

 세종은 백성의 무지함에 탄식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도

 법률을 알아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의 경중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여

 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세상 풍속이 박악하여 자식이 자식 노릇을 하지 않는 자도 있으니. 효행록(孝行錄)을 지어 이런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쳐 주고자 하니

 집현전이 이를 주관하라.”

 

 고 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우민을 교도하기 위하여 여러 방편으로 중요 법조문을 간결하게 정리를 하였고 한문으로 되어 어려운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삼강행실도에 간단하게 내용을 써넣으므로 백성들이 그림만을 보아도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아무리 이해하기 쉽다고 하나 그 정확성에 있어서 문자로 기록한 글보다야 하겠는가? 이러한 것이 세종이 생각하는 바에 미치지 못하자 세종은 우리말에 적합한 새 글자를 만들어 우민을 깨우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은밀하게 우리 민족의 문자인 한글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글은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듯 세종 시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과 이들을 잘 다스린 세종의 사람됨 때문이었다. 그의 소양과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욕구, 그리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더 나아가 중국문화의 아류로 머물지 않는 주체성과 독특한 독창성, 거기에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을 향한 추진하는 힘과 고집에 노비에게까지 관심을 쏟았던 사람에 대한 인정심 등이 있었던 것이다. 세종 개인의 이러한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와 더불어 대인관계의 모든 여건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어느 한 날 이 모든 것을 다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시급한 일이라도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준비나 전반적인 상황이 성숙되어 있지 못하면 중요한 업적을 이루어 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현대사회에서 조차도 기술이 너무 좋아서 시대를 앞선 기가 막힌 기기를 만든다 할지라도 현 시대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당할 수 없으면 사용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그 만들어진 것이 효과적으로 사용되려면 먼저 그에 대한 제반 환경이나 배경이 갖추어져 있고 그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종도 당시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들 중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하나 이루어 갔는데 앞에서 이룬 일을 통하여 뒤의 일들이 필요하게 되는 자기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업적을 이루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에 제일먼저 필요한 것은 천체과학에 대한 정립과 그를 측정하는 각종 기기의 필요성이었다. 제일먼저 이러한 필요성을 느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유교를 숭상하던 세종은 천체과학의 개기일식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문제는 예정된 시간보다 15분이 늦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도가 15~20도가 달라 그만큼 중국과 차이가 있어서 당시 중국의 역법으로는 조선의 기상 현상을 바르게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중국의 문물을 들여와서 늘 그렇게 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오류들이 나왔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세종은 당장 천문학을 국가의 첫 번째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20여년 만에 칠정산 역본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마치 현재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마찬 가지 일이었는데 당시로서 자체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그리고 조선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천문에 대하여 알게 되자 이러한 기술은 자연스럽게 시계를 만드는 기술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세종의 시도는 과학에만 국한하여 머물지 않았다. 온 백성을 마음으로 감화시켜 도덕을 바로 세우려한 세종이 그 다음으로 주목한 것이 음악분야였다. 그 동안 사용하여 오던 음악의 악보와 악장을 정리하고 조선 음의 기틀을 바로 잡는 등의 일이 세종대왕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것은 음악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소리를 알고 음을 알며 음악을 살피면 정치를 알게 되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이끄는 것이 통치자가 할 일 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건국 이래로 표방해온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 적 의례제도를 확립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하였고, 대명사대관계(對明事大關係)도 어려운 과제였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갔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게 옛 문헌을 정리하고 체계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러한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문풍(文風)의 진작이 필요하게 되자 1420년(세종 2년)에 세종은 이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종 때 설치되었던 집현전이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을 하고도 그 동안 형식상으로만 존재하여 유명무실하던 집현전을 재정비 한 후 궁궐 안에 다시 설치를 하여 옛 문헌들을 정리하고 각종 체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황과 배경을 바탕으로 그 다음은 비로소 문자를 만드는 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세종은 비로소 문자를 만드는 일에 구체적으로 손을 댈 수가 있었는데 천문수리와 우주관행의 원리를 파악하고 조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과학과 음악의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제 남은 과제가 이제까지 정리하여 놓은 음악과 과학! 을 인간과 연결하는 문자로 만듦으로 우주 과학과 소리를 백성과 이어주는 도구로 삼아 우주와 인간이 함께 어울리며 백성과 군주가 하나로 소통하여 만나는 도구가 필요하였다. 이렇듯 문자를 만들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세종은 이 문자를 완성하는 일에 남은 일생을 다 걸었다.

 우리 민족 문화의 기본 뿌리는 음양오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과 글은 물론이요, 음식, 주거, 의복, 의학, 음악 등 어느 하나 음양오행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글 역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 원리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바탕으로 창제되었던 것이다. 한글의 기본 형태는 천(天), 지(地), 인(人)과 원(圓○), 방(方□), 각(角△)의 형태로 나누어지는데, 천은 (·)로 하늘과 태양을, 지는 (―)로 땅을, 인은 ( | )로 사람을 표시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모음을 만드는 데에 하늘은 둥글어서 둥근 점(·)이요. 땅은 평평하여 (一)자이고 천지간에서 서 있는 것이 사람이라 ( | )자로 표시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원(○), 방(□), 각(△)은 자음을 만드는 데에 이용하였다. 원(圓○) . 방(方□) . 각(角△)의 구조는 인간을 말한다. 원은 사람의 머리이고, 방은 사람의 몸통이며, 각은 손발의 움직임을 상징하여 천지인(天地人)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각은 만물이 싹트는 모양이며, 방은 잎이 넓게 자라는 모양이고, 원은 열매 맺는 모양을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존재하는데, 우리말의 소리법칙도 이 원리에 맞추어 창제된 것이다. 따라서 한글이 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모두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언어가 된 것이다.

 이 원리를 가지고 보면 우선 ㄱㄴㅁㅅㅇ 다섯 기본 자음을 오음(五音)이라고 했듯이 오행(五行) 사상의 방향에 적용하여 보면 재미있게도 다음과 같은 사람 형상의 이미지가 된다.

  ㅇ

  ㄴㅁㄱ

  ㅅ

 

 

 천지인(天地人)의 아들소리인 기본자음 ㄱㄴㅁㅅㅇ 다섯 글자는 이렇게 사람이 두 다리로 서서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땅을 향하여 위 아래로 다르게 들고 있는데 오른손은 위로 왼손은 아래로 하여 마치 강함과 약함까지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지인(天地人)의 아들답게 하늘과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오묘하지 않을 수 없다. 또‘ㅇ’은 하늘답게 머리를 나타내고 땅을 의미하는‘ㅅ’은 땅답게 산을 닮은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동서남북을 ㄱㄴㅅㅇ으로 두른 채 그 중앙은 사방의 의미를 지니는 '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오방 사상의 한글 기본자음 다섯 글자가 유기적 합체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더불어 한글의 자음은 오행의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그리고 기본음이 있고 각 기본음에서 파생하여 계열 음이 생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본음 ㄷ에서 ㅡ을 떼면 ㄴ이 된다. 또한 ㄷ에 ㅡ을 보태면 ㅌ이 되고 ㄷ에 ㄱ을 보태면 ㄹ이 된다. 또 ㄷ에 ㄷ을 합치면 ㄸ이 된다.

 이상은 한글을 만든 원리 중 일부이고 전체를 함축하여 표현하면 최소의 원리, 생성의 원리, 천문의 원리, 수학의 원리, 음악의 원리, 소통의 원리로 설명을 할 수 있다. 최소의 문자소로 문자를 만들어 생성시키고 천문의 원리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 그 관계 음양오행을 따르며 수학과 기하학적 원리로 문자를 증가시키며 음악의 원리로 만들어져 글을 읽을 때 리듬과 음정의 높낮이를 붙이면 더욱 즐거움으로 글을 읽게 되고 그렇게 하니 소통이 더욱 잘되도록 한 것이다.

 한글이 만들어진 동기는 한글의 원 이름인‘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 자체에도 그 목적이 나타나 있지만 세종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본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서문을 의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글로 적고자 하나

 한자로 제 뜻을 능히 적지 못할 말이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편하게 사용하게 하고자 함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보면 “첫째, 사용하던 문자인 한문이 한국어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한다. 둘째,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균등하게 한다. 셋째, 선진문화를 우리의 글자로 번역하여 봄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데 있었다.

 충령대군인 세종은 위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이라는 두 형이 있었다. 그러니 충령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였겠지만 그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학문을 하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한자로 기록된 모든 글자들의 발음이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아서 한자를 읽거나 중국인과 대화하는데 혼동이 오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운서가 있어서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한자음을 발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은 우리의 말의 발음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초기에 세종은 왕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시중에 돌아다닐 수 있었고 또 왕자였기 때문에 국가의 서고에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어서 여러 기록들을 통하여 이미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언문(諺文)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알게 된 세종은 궁으로 돌아온 후 은밀하게 자신을 시중드는 내시에게 그에 대한 서적을 알아보도록 부탁을 하였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그 내시가 들고 온 책은 고려조 말엽의 유명한 학자였던 이암이 지은 가림토가 들어 있는‘단군세기’였다.

 세종은 이 책을 통하여 가림토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게 되었으며 더불어 이 가림토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던 언문이 시중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은밀하고도 자연스럽게 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언문은 자음과 모음의 혼동으로 그 체계가 불완전하여 역시 우리의 말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에는 동일하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언문을 잘 연구하여 정리를 하고 체계를 세우면 우리말의 발음을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세종은 후에 생각지도 않게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세종은 우선 당장 그보다 더 급선무인 천체과학을 발전시키는 일과 음악을 정리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세종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도 역시 어려서부터 기초 학문 등을 통하여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기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는 그 어떤 것도 기본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후에 그 어떤 것이 만들어진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우선 문자보다도 당장 국가에 시급한 일들 즉 당시 국가의 권위와 이웃 나라와의 경쟁에서 이 길 수 있는 천체과학과 더불어 음악을 정리하고 그 발달된 문명과 문화가 백성에게 쉽게 익히도록 하는 문자가 그 다음에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그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고 익히기 위하여 쉬운 문자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고 그러한 문자에 대하여 백성이 호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세종의 생각은 주효하였다. 먼저 세운 천체과학을 통하여 이웃나라들과도 뒤지지 않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다시 생활에 활용이 되었으며 그렇게 찾아온 물질적 정치적 풍요와 안정기를 음악을 통하여 더욱 풍성하게 될 수 있도록 음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문자를 통하여 그 과학의 활용과 음악의 누림을 갖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왕권도 마다하지 않고 내어놓으므로 문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 한 후에야 비로소 이전시대에 있던 문자를 재정리하여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세종이 참고했다는 언문이란 것은 무엇인가? 이는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바로 최만리 등이 반대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19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하고 있는데 당시 이미 훈민정음이 반포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언문이라는 단어대신에‘훈민정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언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부족한 대로나마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여러 상소문이나 기록 등에서 확인하여 볼 수가 있다.

 

 “언문은 다 옛 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 바가 없사옵니다.”

 

 “전 조정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를 비롯한 반대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희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했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전 조정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이옵니다.”

 

 “속용 문자(俗用 文字)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 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갖추어 지지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었다.”

 

 라는 기록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기록들에서 지칭하는 언문이 바로 오랜 시간 동안 끈이지 않고 이어 내려온 가림토 문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림토 문자를 통하여 체계를 만들고 새로운 문자로 정리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어 줌으로 새로운 문자가 되게 하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종은 우선 신하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그들을 생각을 확인하기로 하고 몇몇 신하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이 어떤가에 대하여 신하들이 구체적으로 눈치 채지 못하도록 넌지시 알아본 후 결론을 내리기를 공개적으로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자를 만들려고 하는 자신의 시도 자체가 불가하게 되거나 혹은 신하들과의 신경전으로 말미암아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고 낭비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신하들 몰래 은밀하게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의 권한을 미련 없이 대폭 신하들과 왕자에게 이양을 하여 주었다. 신하들은 그러한 세종의 의도를 알지 못함으로 임금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이견이 분분하였다. 반면에 세종은 그 이후 시간적 여유를 통하여 왕자와 공주들과 함께 그리고는 더 나아가 전의까지 동원하여 하나하나의 소리에 대하여 발음과 음가를 직접 확인해 가면서 가림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며 친히 그 체계를 정리하며 확립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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