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글뽀글.
공윤은 눈을 깜박이며 입에서 솟아오르는 공기거품을 봤다.
눈꺼풀에 소금기가 끼어 약간 따가웠지만, 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금빛 물결처럼 해류를 따라 이지러졌다.
흠, 공윤은 조금 뒤에 눈치 챘다. 이곳은 바다였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바다, 심해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맨몸으로도 짜부라지지 않고 멀쩡히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꿈이라서 그런가?
너무나 깊어서 거의 시커멓게 보이는 바다......
그녀의 옆을 초롱아귀가 재빨리 지나갔다. 초롱아귀의 유인돌기로 튀어나온 희미한 불빛이 시야 가장자리를 밝혔다.
그 틈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회색 물체가 보였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알?
그때, 바다의 깊숙한 곳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주 거대한 뭔가였다. 그게 움직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분노에 찬 울림, 저주에 가까운 몸부림에 근방의 바다가 모조리 진동했다.
[나를 풀어라, 여자...... 어서......]
몇 천 년은 말하지 않은 듯 성대에 녹이 슬어 낮게 끽끽대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어디서 명령질이야?
[얼마나 오래 갇혀있었는지...... 나를 풀어라, 네게 성대한 보물을 약속하마...... 어서!]
“너 그거 들어본 적 있어? 세헤라자데 언니가 해주는 이야긴데, 램프에 갇혔던 지니가 엄청난 부를 주겠다고 해서 풀어줬더니 죽이려고 하는 거.”
말을 하자 입 밖으로 빠끔빠끔 거품이 피었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까고 있네, 새끼가.”
내가 미쳤다고 널 풀어주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오래 갇혀 있어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이봐요, 미스터 티폰. 충고 하나 하자면, 부탁을 할 때는 좀 더 공손하게 해봐. 응?”
고대의 괴물은 분노의 고함을 내질렀다. 바닷물이 부르르 떨리고 일그러진 해저의 지면으로 얼핏 용암의 붉은 선이 비췄다.
[후회하게 될 거다, 여자. 너 역시 짓눌러 죽여주마!]
“알았어, 일단 거기서 나오고 말해.”
그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까 그 알이 신경 쓰였다. 이런 심각한 환경에서 저런 게 굴러다닌다고?
아까 초롱아귀조차도 겁에 질려 재빨리 지나가지 않았는가.
“티폰 씨, 저거 뭐야?”
[...... 내가 말해줄 것 같으냐?]
“그래? 그럼 그냥 가져가지 뭐.”
그녀는 미련 없이 아래로 헤엄쳐 내려갔다. 뭉툭한 윤곽의 알이 바닥에 반쯤 묻혀있었다.
그녀가 그걸 집어 들려던 때였다.
[에키드나가 던져두고 간 것이다. 망할 마누라. 나보고 알아서 하라더군. 하도 오래돼서 내 자식인지도 모르겠다만.]
“어머, 그럼 아드님?”
[몰라, 본 적도 없다. 데려가면 후회할 걸.]
“글쎄......”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 안에서 가볍게 알을 굴렸다.
축구공 정도의 크기에 무척 단단했고, 물속이었기 때문에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알은 아버지의 용암으로부터 나오는 열기에 잘 데워져 있었다.
조금 있으면 부화할 것이다.
그는 티폰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알을 잘 싸맨 뒤 품에 집어넣었다.
“알았어요, 괴물들의 아버지여. 아드님은 제가 잘 키워보죠.”
[기다려라, 날......]
“당신이 좀 더 공손해지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는 발랄한 미소를 남기고, 위로 헤엄쳐갔다. 바다 위로.
***
공윤은 눈을 떴다.
키론이 옆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졸고 있었다.
아래로 드리운 속눈썹이 그의 뺨 위로 창백한 음영을 얹었다. 숨을 쉬는 기척조차 옅어서 차라리 조각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면 더 어울릴 듯한 남자를 응시하면서, 공윤은 그 어느 때보다 거리감을 느꼈고 그 이상으로 욕망 혹은 분노 같은 것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공윤은 그의 새까만 정수리를 콱 움켜잡아볼까 생각하면서 힘겹게 일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 움직임에 그는 반짝 눈을 떴다. 헐, 되게 예민하네. 그녀는 어정쩡하게 누운 상태였기 때문에 턱 밑살이 접혔을까봐 신경 쓰였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흘려줬으면 기분이 좀 풀렸을 텐데,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는 것만으로 졸음기를 털어내고 완벽하게 고상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었다.
공윤은 언제나 그 외모를 찬탄해 마지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짜증이 났다.
이 남자한테는 인간미라거나, 뭐 그런 게 없나?
공윤이 고백한 이후 한 번도 흐른 적 없던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손톱을 자꾸 맞부딪히는 키론을 봤다.
그는 미묘하게 엇나간 초점으로 공윤을 보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자마자 공윤은 인내심이 간당간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키론, 나 좀 봐요.”
그는 조금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우리 할 얘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공윤은 제대로 일어나 앉으려다가 포기했다.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나 잔 거야?
공윤은 먼지가 앉은 책상과, 반대급부로 말끔한 물주전자를 알아챘다.
“사람이 얘기할 땐 서로 눈을 봐야죠. 아니면 그러기도 싫을 만큼 내가 별로야?”
그 말이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키론은 눈에 띄게 움찔하더니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여러 겹의 색채로 빛나는 홍채의 테두리가 울렁거리고 있었다. 눈물이라도 고인 것처럼.
울지 마, 이 예쁜 놈아.
“지금만큼은 안 통하니까 얼굴로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공윤은 누운 상태에서도 가능한 위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 금발 여자만큼은 안 되더라도 내 얼굴이 멀쩡한 상태였으면 좋겠다.
“당신 나랑 무슨 관계였으면 좋겠어요?”
키론의 긴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난 지금 우리가 무슨 사인지 모르겠거든요. 뭐 내가 일방적으로 들이대고 당신이 받아주는 구도긴 하죠. 근데 그거, 슬슬 질리려고 그래요. 기다려보려고 했는데 더는 안 되겠어.”
공윤은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단어를 고르려고 애썼다. 잘 생각하고 말해, 설공윤.
“사장과 알바?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줄게요. 힘들겠지만 마음 한 번 접어보죠. 짝사랑 그만두려다가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것도 불편하면 이 집에서 나갈게요.”
잘 생각해......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면, 그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해요.”
이 사람 안 볼 자신 있어? 그리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당신이 누군지.”
내가 잘못 말했다고, 잠깐 화나서 그런 거니까 봐달라는 말 안 할 자신 있어?
“애초에 당신은 정말...... 누구에요? 키론이 진짜 이름이긴 해요?”
그 사이코가 했던 말,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는 거라고는 당신이 엄청 잘생겼고 짜증날 정도로 부자인데다 환장하게 비밀이 많다는 거야.”
아......
나 정말 등신 같다. 공윤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난 대체 누구를 좋아하는 건데?”
“제발.”
키론이 불쑥 말했다.
“울지 마요.”
공윤은 뺨을 훔쳤다. 손에 물기가 묻어났다. 이런 젠장, 여기서 내가 울면 어떡하냐.
공윤은 독하게 그를 쳐다보려고 했지만 계속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끊임없이 고였다. 아.
나 생각보다, 이 사람을 많이 좋아했구나.
포기하려면 많이 힘들겠구나.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 와중에도, 눈물 때문에 저 사람 얼굴이 안 보이는 게 싫다. 공윤은 무너지는 심정으로 자각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을.
내게 다정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비밀로 대하는 사람을 사랑해.
공윤이 눈물을 털어내려고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는 모습을, 키론은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순간 어떤 망설임이나 마음의 가책 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조차 그에겐 죄였다. 공윤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잘못이었다. 혼자 떠도는 구렁텅이로 공윤마저 끌어들이는 짓이었다.
그녀가 우는데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키론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너무 세게 물어서 어딘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는 빠르게 재생되었지만 그는 힘을 빼지 않았다.
공윤이 눈물 파편이 어른거리는 갈색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눈에 떠오른 마음이 보이는 순간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사라질 동아줄을 부여잡듯이 공윤을 끌어안았다.
“나......”
공윤의 냄새가 났다. 공윤에게는 햇볕에 잘 말린 허브향이 났다. 지금은 조금 건조하고 쌉쌀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생했다.
사랑스럽고, 건강하고, 아직은 약한 고통의 냄새였다.
“나는......”
후회해야할까?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제자가 되어달라고 했던 말.
공윤을 그의 나락으로 끌어들인 것.
내가 어떤 생각으로 당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안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텐데.
“사랑해요.”
아니, 그러지 못한다는 것조차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는 후회하지 못했다.
이미 예전부터 그랬다, 그 사실로부터 도망쳤을 뿐.
“그러니까 울지 마......”
떠나지 마.
그는 아래로 쏟아지는 공윤의 머리칼을 손 안으로 쓸어 담으면서 속삭였다.
“말할게요. 당신이 궁금해 하는 거.”
어차피 하려고 했던 일이잖아.
공윤은 그를 빤히 봤다.
“싫으면 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