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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독기
작가 : Lulla
작품등록일 : 2019.11.10

신을 배척하고 인간만의 삶을 추구하는 안개와 강철의 나라 스팀 헤이즈.

눈부신 발전 뒤에 가려진 빈민굴에서 태어난 로렌스는 언제나 자신이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그의 꿈 속에 검은 뱀이 나타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거머쥘 기회를 주겠노라고 속삭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로렌스는 검은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6화. 네가 두려우면 나를 의지하라
작성일 : 19-11-10 19:13     조회 : 219     추천 : 6     분량 : 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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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동생아~ 아직 안 왔니~...”

 

  이미 제시카는 여자 샤워실 쪽에서 로렌스를 찾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로렌스는 대충 벽을 두들겨 신호를 보내고 몸에 물을 문대며 씻기 시작했다.

 

  “제시, 너 메이지라고 들어본 적 있어?”

 

  “...너비아니 먹어본 적 있냐고?...”

 

  “메-이-지! 사람 이름인데 들어본 적 있냐고!”

 

  소리를 지르다 하마터면 뜨거운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에다 쏟아버릴 뻔했다. 벽을 두들기는 제시카의 멋쩍은 웃음소리는 덤이었다.

 

  “...개인실에 그런 어린애가 있으면 보통 부잣집이 아닌가 본데...”

 

  “내 생각도 그래. 보기 드문 금발이기도 하고, 약간 귀하게 자랐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말은 한 번도 안 섞어봤지만.”

 

  “예뻐?”

 

  “...엄청나게...”

 

  제시카가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들어가니, 전신의 피로가 빠져나가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제시카는 욕조에 지독한 구린내가 퍼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의 몰골로 제시카와 로렌스가 밖에서 돌아다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 머리칼만이라도 바깥으로 내놓는데, 마침 로렌스의 틀에 박힌 잔소리가 들려왔다.

 

  “...안 씻고 욕조에 들어간 거 아니지?...”

 

  “머리 감았거든?!”

 

  제시카가 격하게 소리쳤다. 벽 너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린 듯했다.

 

  욕조에 몸을 맡긴 채로 수십 분이 흘렀다. 뜨거운 물과 조용한 밤공기가 어우러진 분위기 덕에 로렌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워있었다. 이따금 제시카가 말에 한두 마디 반응해주기만 했더니 슬슬 정신이 몽롱해졌다.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수면제로 느껴지면서, 로렌스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제시, 우리가 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난 이미 백 킬로는 넘었을걸...”

 

  “지금처럼 행복했을까? 난 아직도 내 일상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해.”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겠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는 거잖아...”

 

  “아, 그건 좀.”

 

  로렌스가 질색하자, 제시카가 메아리가 칠 정도로 세게 벽을 두들겼다. 눈을 감은 채로 키득거리는데, 문득 로렌스의 마음에 불안감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하수구로 버려지면? 더는 쓸모가 없다면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럴 작정이면 진작에 양자 같은 거 안 들였겠지...”

 

  “바라는 게 있으니까 양자로 삼았겠지. 그럼 언젠가 그런 생활은 끝난다는 거잖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 줄 아니..."

 

  "진지하게 말한 거야."

 

  "그아~"

 

  술에 취한 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시카가 욕조 밖으로 머리를 내놓았다. 로렌스가 바로 앞에 있었으면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었다.

 

  "제발, 로렌스. 행복한 생각만 하면서 살자. 오는 지도 모르는 미래를 왜 걱정하는 거야. 나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 하겠는데."

 

  "...하지만..."

 

  "그만, 이 이야기 그만. 어딜 가든 내가 따라갈 텐데, 네가 늙은이냐 걱정만 많게."

 

  제시카가 욕조에서 일어났다. 거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이 망토처럼 전신을 휘감고 달라붙었다.

 

  "...먼저 나간다, 잘 자..."

 

  "...잘 자."

 

  제시카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로렌스는 힘이 빠져 부력에 몸을 맡겼다.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수십 다발의 걱정거리가 수증기를 타고 떠올랐다.

 

  로렌스는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외곽 구역에 살 적에, 먹을 게 없어 제시카를 도와 음식을 훔칠 때 빼고는 딱히 어떤 것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세 살때 부모님에게 버림받았으니 언어만 제시카에게 간신히 배운 정도였다.

 

  내부로 들어오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재의 뜻도 알지 못했다. 의미를 알고 나선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환호는 거세졌고, 로렌스는 그게 견딜 수가 없었다.

 

  로렌스가 외곽 구역에서 배웠던 세상의 원칙이 하나 있었다.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과 접촉한다는 것이다. 상인은 돈을 얻기 위해, 손님은 질 좋은 자재를 얻기 위해 서로와 접촉하고, 질이 나쁜 사람들은 신뢰와 우정을 미끼로 꿰어낸 사람의 모든 것을 털어먹는다. 지금 유일하게 친하다고 할 만한 제시카 역시 처음엔 단지 가족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항상 로렌스는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누군가 자신에게 접촉해서 주머니를 까뒤집어봤자 먼지만 나오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콩깍지를 벗기고 알맹이를 들여다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대답은 상상하기 싫었다.

 

  "나는 왜 하수구에서 태어났을까?"

 

  로렌스가 중얼거렸다. 따스한 수증기를 타고 걱정거리가 천장에 방울방울 맽히고, 로렌스는 따스함에 휘감겨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나는 누구인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로렌스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은 빛 한 줄기 없이 아주 어두웠지만, 의자와 거기에 앉은 남자의 모습만은 똑똑하게 보였다. 어떠한 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보일 뿐이었다.

 

  "네?"

 

  마치 동굴 한가운데에 있는 듯이 메아리가 퍼졌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랄 겨를도 없이 검은 옷의 남자는 로렌스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나는 누구인가?"

 

  로렌스에게 질문을 반복하는 남자는 차갑고, 엄숙하며 기계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로렌스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어째서 이 공간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집어 보려고 해도, 자꾸 머리에 안개라고 낀 것처럼 사고 판단이 되지 않았다. 눈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기억이 다시 반송되어 눈 앞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여긴 어디에요?"

 

  "너는 질문을 할 수 없다."

 

  남자는 아랫사람 대하듯 거만하게 말했다. 남자는 로렌스에게서 꽤나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았는데, 목소리만은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 가깝게 들렸다. 로렌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해선 안 된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로써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디 조금이나마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렌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휠러 회장의 말투를 흉내내어 정중히 말했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이 없으니 괜스레 잘못 대답한 것 같다고 후회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로렌스는 주어진 정보를 머릿속에서 굴려보려고 애를 썻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이 차단되니 최대한 닮은 상황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의자에 앉은 사람과 그 앞에 서 있는 자신, 질문을 강요받으며 빠르게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자리, 로렌스는 확실히 과거에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본 기억이 있었다.

 

  외곽 구역에서 내부로 들어올 때 위험성을 판단하기 위해 본사 직원과 일 대 일 면접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은 로렌스를 완전히 범죄자 취급하며 강하게 매도했다. 로렌스는 제시카와 같이 외곽 구역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면접관을 설득했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로렌스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나라는 사람을 평가하려고 한다. 로렌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교육이 필요하겠군."

 

  남자 역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중에서 유영하는 듯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로렌스의 면전까지 다가왔다. 깜짝 놀란 로렌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방어했다. 거친 사포로 벽을 쓸어내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너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키가 아주 커서, 로렌스는 목을 뒤로 젖혀 한참 위를 올려다 봐야만 했다. 덕분에 목이 죄인 듯 숨이 차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남자는 로렌스를 전혀 배려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렌스 워커인데요...?"

 

  "아니지, 멍청이가."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로렌스는 순간 방독면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릿한 냄새가 기도를 타고 혈관으로 넘어와 전신의 근육이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갔다.

 

  "나는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한 번만 더 틀리면 네 얼굴 가죽을 찢어주마."

 

  불합리하기 짝이 없었다. 몸속에 퍼진 독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나빠진 판단력이 남자의 말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흐려졌다.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렌스는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잘못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용서해주세요!"

 

  "틀렸다고 말하지 않느냐!"

 

  가려진 얼굴에서 순간 붉은색 안광이 번득였고, 갑자기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로렌스가 팔을 뒤로 빼자, 뜨거운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 로렌스는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멍청이로구나. 그 여자에게 벌을 내려야겠다. 너는 여기서 결코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뼈를 적출하고 살을 발라내 용암에 던져버릴 것이다. 너는 평생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지도 못하고..."

 

  말을 씹어 뱉으며 으르렁거리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반동에 튕겨지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뒤로 젖혀진 머리와 팔이 힘없이 축 늘어져 마치 멱살을 잡아 올린 듯한 모양새였다.

 

  잠시 뒤에, 남자가 들이쉰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머리와 팔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로렌스가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지... 이렇게 하면 안 돼."

 

  로렌스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가공할 만한 힘으로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만간 너에게 사람을 보내겠다. 너는 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조금 전까지 광기 어린 포효를 들어서인지, 목소리가 한층 상냥해 보였다. 어느새 남자는 제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있었다.

 

  "기억해라. 이것은 꿈이 아니다. 네놈의 내일은 나의 것이고, 과거 역시 나의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 나에게 바쳐라.“

 

  "나는 너의 부모요, 믿음이자 이상이다. 나 이외의 믿음은 존재할 수 없으니, 너는 나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남자의 머리 위에 뜨지 않을 것 같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이 세상을 뒤덮고 밤은 갈가리 찢겨 흔들리는 잔해를 남기고 빠르게 사라져갔다. 어둠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지독하도록 차가운 붉은빛 앞에 만물은 어둠이었고, 로렌스 역시 어둠이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붉은 태양이 빛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것은 어둠을 잡아먹는 어둠일 뿐이다.

 

  붉은빛 아래에 앉은 남자는 어둠에 서서히 삼켜졌다. 남자는 태양의 꼬리였다. 밤이 남긴 흔들리는 잔재는 태양의 몸통이었다. 태양은 엄숙하고 잔인한 이빨을 가진 머리였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발이 달린 생물이라면 강대한 힘을 가진 생물 앞에서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강요받는다. 도망치거나, 먹이가 되거나. 정답을 고르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로렌스는 가능성을 저울질했고, 자신에게 선택권을 가질 자유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로렌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소름 끼치는 붉은빛이 잠시나마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로렌스의 의식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으아아아!"

 

  현실로 돌아온 기쁨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로렌스는 비명을 지르고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듯 폐가 끊임없이 산소를 갈구했다.

 

  "흐윽...! 컥! 쿨럭 쿨럭!"

 

  누은 채로 급하게 숨을 쉬다가 사레가 들려, 로렌스는 목이 아프도록 기침을 해댔다. 콜록거릴 때마다 울컥하고 넘어오는 타액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낫다.

 

  침을 질질 흘리며 로렌스는 숨을 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가슴 속이 들끓어 쓰라리고 괴로웠다. 기침이 멎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로렌스는 한참 동안 고생해야만 했다.

 

  어느새 들어와 몸을 씻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로렌스를 돌아봤다. 몇몇 어른들은 머리까지 흠뻑 젖은 로렌스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해야지, 이놈아! 접싯물에 코 박아 죽는다는 게 그런 거야.”

 

  "..."

 

  로렌스는 욕조에 걸터앉아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피가 역류할 기세로 마구 뛰고 있었다.

 

  "역시...꿈이었잖아."

 

  로렌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 어두운 공간이 다시금 떠올라 기분이 불쾌했다.

 

  "아얏!"

 

  갑자기 느껴지는 격한 고통에 로렌스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손목을 번쩍 들어 고통이 느껴진 자리를 바라보자마자 로렌스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이제까지 없었던 두 개의 동그란 흉터가 왼쪽 손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꽤 지난 것처럼 환부가 매끄러웠지만, 로렌스는 이 흉터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헉...헉..."

 

  로렌스는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도무지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어디든 좋으니까 달아나고 싶었다.

 

  수건인지 옷가지인지를 집어 들고 휘두르듯 얼굴에 물기를 닦아냈다. 닦아도 닦아도 물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참 동안 닦고 나서야 로렌스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 행동을 멈추니, 이번엔 손목에 남은 두 개의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로렌스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것을 집어 던졌다. 하얀 수건 곳곳에 붉은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너무 거칠게 닦은 탓에 찢어진 볼의 피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망치듯 락커룸으로 이동한 로렌스는 락커란 락커는 전부 열어 자신의 옷을 찾아냈다. 손이 떨려서 단추를 채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해야해..."

 

  입버릇처럼 되뇌이며 로렌스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호실의 출입문에 달린 전등에 전부 불이 꺼져 모든 사람이 안에 들어가 휴식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로렌스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샤워실 출입문 틀을 잡고 굳어있는데,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스럭-

 

  깜짝 놀란 로렌스가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물체가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탓에 실루엣이 마치 후드를 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로렌스의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데 충분했다. 목이 죄인 듯 비명을 지르려는 로렌스의 눈앞에 어디선가 밝은 빛 한 덩어리가 날아왔다.

 

  "로렌스!"

 

  왜인지 제시카가 기름 램프를 들고 로렌스 앞에 서 있었다. 깨 있었던 듯 피곤한 기색이 없었고, 어깨에는 가디건을 걸쳤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로렌스를 감쌌다.

 

  "다쳤어? 넘어진 거야?"

 

  "..."

 

  "얘가 왜 이래? 지금 폭스 선생님 불러올게, 잠깐만 기대고 앉아있어."

 

  제시카뿐만이 아니었다. 비명을 들은 행복의 집 거주민들이 문밖으로 불안한 얼굴을 내보였다. 개중에는 손수건을 들고 피투성이인 로렌스의 얼굴을 직접 닦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같이 로렌스를 걱정하고 아버지뻘 되는 남자들은 욕실을 드나들며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엔 로렌스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누군가 몸을 건드릴 때마다 몸을 떨며 기겁을 하고, 자꾸만 제시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로렌스? 나 금방 다녀올게. 잠깐만 놓아 줄래?”

 

  “...응.”

 

  “손 계속 잡고 있을 거야? 여기에서 아침까지 앉아있을까?”

 

  “...응.”

 

  “...로렌스?”

 

  제시카를 잡은 로렌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제시카는 얼굴을 닦아주던 여자에게 폭스 선생을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곁에 앉아 어깨를 두드려주니, 떨리던 로렌스의 몸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할 거야?”

 

  “...미안.”

 

  “얘가 왜 이럴까, 진짜.”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제시카가 한탄했다. 꼭 안아주는 제시카의 품은 따듯하고 온화해서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로렌스는 온기가 전해질수록 더욱 눈을 부릅떴다. 어둠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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