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정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트릭이라도 썼을까 봐서요?”
“말이 안 되잖아. 휴도 내 공 그렇겐 못 막아요. 100% 다 막은 적은 없다고!”
휴는 시온이 소속된 토트넘의 골키퍼 이름이었다. 정원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전력분석가잖아요, 나. 여기 오기 전에 연구를 좀 했거든요. 정시온 선수의 인프런트 킥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다. 정원은 시온을 납득을 시키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연구한다고 그게 돼? 누굴 바보로 아나.”
“바보 맞잖아요.”
‘왜 날 못 알아봐.’ 정원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나머지 공부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요, 잠도 많은 사람이. 밤에 공놀이 하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시온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정원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때 투둑, 하고 비꽃이 피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에서 투명한 빗방울이 떨어졌다. 갖고 있던 빨간색 우산을 편 정원이 시온의 머리 위로 손의 위치를 옮겼다.
“로비까지 데려다 줄까요?”
“대답은 끝까지 안 해주기예요?”
“데려다 줄게요, 가요 얼른.”
시온은 우산을 들고 있는 정원의 손목을 잡았다. “뭐 이렇게 숨기는 게 많아요? 안필드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속 답답해 죽겠다고요!”
“가서 뜨거운 물로 꼭 씻고 자요, 감기 걸려.”
“잠이 오게 생겼어요?”
잠깐. 시온은 순간 데자뷔를 느꼈다. 손목이 잡혀 그런가, 시온의 멈칫거림이 피부에 와닿았다.
“내가 진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러는데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시온이 말을 이었다. “자꾸 어디서 본 거 같은 느낌이…… 이거 나만 이러는 겁니까?”
“또 안필드 얘기예요?”
정원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시온에게 잡힌 손을 뺐다. 이제 우산을 들고 있는 건 시온의 몫이 되었다.
“아니, 그 전에! 그 전에 우리 만나지 않았어요?” 정원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잠시 생각을 더듬어보는 시온을 정원은 기다려주었다. 16년만이었다. 등 번호 23번, 정재신 동생.
시온은 정원이 어릴 때 봤던 ‘김서연’과 동일 인물이란 걸 몰랐다. 정원이 자기 정체를 숨겼기 때문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 혼자만 반가워하는 게 어쩐지 서운했다. 그래서 시온을 여러모로 자극했다. 둘만의 추억을 그가 떠올릴 만한 얘기들을 일부러 꺼냈다. 그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기억났다!”
기대에 찬 얼굴로 정원은 시온의 뒷말을 기다렸다.
“3년 전에 나한테 우산 빌려줬었죠?”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다. 이 멍청이.
“그거 나 아니에요.”
“또 아니래. 뭘 묻기만 하면 ‘아니에요’부터 나와.”
“그건 진짜 나 아니에요.” 답답한 듯 정원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모르는 여자와의 에피소드가 많은가 봐요. 이렇듯 자주 헷갈리시는 걸 보니?”
“헷갈린 적 없어요. 내가 만난 모르는 여자가 다 그쪽일 뿐이에요.”
시온은 정원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3년 전에 만난 여자가 정원이라고 확신하는 투였다.
“3년 새에 무슨 일 있었어요?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잖아.”
정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스무 살 때 이후로 줄곧 이 머리였거든요?”
거짓말 같지 않았다.
“진짜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정원이 우산을 홱 뺏어 들었다.
“앗, 차가워!” 빗방울이 시온의 정수리에 톡 떨어졌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정원의 우산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완전 닮았는데…… 하긴, 캐릭터가 좀 다르긴 하다. 그때 그 여잔 엄청 상냥했거든요.”
정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려먹었다. 월드컵이 끝나도록 시온이 저를 알아보는 일 따윈 없을 듯하다.
“어, 오빠.” 정원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빠’ 소리에 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통화하는 소리를 들으며 시온은 정원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 시간에 쫙 빼 입고 만나려는 오빠와는 무슨 사이일까, 궁금해졌다.
“……못 오겠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니야, 괜찮아.”
덤덤하게 괜찮다고 하는 정원을 보며 시온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못 온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그 사실로 상심하는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 시선을 떨어뜨린 시온이 정원의 발치에서 흰색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주머니에 넣는다고 반으로 접어둔 모양이었다. 아마도 핸드폰을 꺼내면서 떨어져 나온 듯하다. 시온은 허리를 굽혀 봉투를 주웠다.
“혼자 가도 돼, 걱정 마.” 그렇게 정원이 전화를 끊었다.
“어딜 가요, 이 밤에?”
“남의 일에 신경 꺼요.”
“겁이 없는 거예요, 무식한 거예요?”
“뭐예요?” 정원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무식해서 용감한 쪽이냐고요. 여자 혼자, 그것도 타지에서, 어? 이거 완전 상습범이고만?”
“말 좀 가려서 하죠?”
“내 말은, 위험하게 혼자 다니지 말란 거예요. 여기 치안이 한국보다 좋을 거란 보장 있어요?”
“놔요, 이거.” 정원은 잡힌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시온은 “자요”라고 하면서 정원에게 편지 봉투를 돌려주었다. 화들짝 놀란 정원이 편지 봉투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안 봤어요.” 경찰 앞에 선 용의자처럼 두 손을 정원에게 들어 보였다. 결백하단 뜻이었다.
“내 걱정 그만하고, 가서 잠이나 자요.”
“잠은 그쪽도 자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잠 같은 거 안 자도 돼요!”
참다 못한 정원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시온의 귀에 그 말이 턱 걸렸다. 잠 같은 거?
쌀가루처럼 부서지는 빗속에 시온을 남겨두고 정원은 갈 길을 재촉했다. 정시온 따위, 다시 만나지 말걸. 이젠 일러바칠 사람도 없는데.
“축구는 언제부터 좋아진 거야?”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정원이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봤다.
시온의 이마를 덮은 앞머리에 빗방울들이 살포시 앉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다며, 축구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좋아진 적 없어.”
이제야 알아봐준 게 뭐 그리 고맙다고, 머리론 시온을 깎아 내리기 바빴지만 마음은 기뻤다.
정원의 대답에 시온은 핏, 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위험하게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여전하고.”
그는 정원에게서 우산을 다시 가져와 들었다. 잘 지냈느냐고, 왜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아는 척하지 않았냐고, 다시 만나 나만큼이나 반갑냐고, 마음속 질문들을 녹여낸 눈빛이 끈적하다.
“뭐 급한 일인가? 날 밝으면 가지, 진짜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급해.”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내뱉는 숨의 온기가 우산 안의 공간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럼 나랑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