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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84화
작성일 : 19-11-04 22:55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7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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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아까 그 소녀가 쟁반을 든 채 돌아왔다. 그러자 어둠에 파묻혔던 여왕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제 됐다. 할 이야기는 대충 끝났어. 이제는 밖으로 나가서 저 아이를 비롯한 다른 자매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보도록 해. 앞으로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해야 하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날 불러도 되지만 나는 자리에 없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근처에 있는 자매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다들 친절하게 도와줄 거야.”

 

  여왕이 그렇게 말하고는 쟁반을 들고 있던 소녀를 불렀다.

 

  “아가야, 방금 전에 막 우리와 같은 까마귀가 된 언니란다. 쟁반은 여기 내려놓고 주변 안내를 좀 부탁해도 되겠니?”

 

  “네, 여왕님.”

 

  아직 물어볼 게 많았던 봄이가 여왕을 붙잡았지만 여왕은 그 아이에게 물어보라며 무책임하게 가버렸다.

 

  “안녕, 오늘 방금 막 들어왔다면서? 반가워.”

 

  척 봐도 봄이보다 두세살 정도 어려보이는 소녀는 거리낌없이 봄이에게 반말을 썼다. 봄이는 약간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런대로 넘겼다.

 

  “어디 보자....... 나도 이제 드디어 후배가 생기는구나. 처음 여기 오고 난 직후엔 같은 또래 아이가 없어서 외로웠어. 그래서 자주 내 곁에 있어주신 여왕님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 그래도 여왕님과 이야기하는 게 싫었다는 뜻은 아니야. 여러 방면에서 올곧고 확고한 신념으로 우릴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지.”

 

  “저기 미안한데, 너 몇 살이야?”

 

  봄이는 안 그래도 착잡한데 처음 보는 꼬맹이까지 자기를 후배라고 칭하며 우쭐해하자 슬슬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는 역시나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오늘 까마귀가 된 신입이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기초적인 규율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도록 해. 나이든,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여기에선 전부 다 필요 없어. 오직 규율 안에서 정해주는 직급이나 지위만이 취급되고 인정될 뿐이야. 나도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방금 막 들어온 너보단 지위가 높겠지. 그래서 이런 명백한 상하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거야. 법이나 규율이 없으면 세계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려.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법과 질서가 폭삭 무너져버리고 만 세계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소녀는 봄이와 같은 영락없이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거친 생머리에 가려진 지저분한 얼굴엔 어두운 생기가 돌았고, 바닥을 질질 끌 정도로 긴 가죽 망토를 걸쳤고, 허리춤에는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방독면을 매달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봄이는 그런 소녀의 모습을 보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지금껏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또 이 소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

 

  서둘러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런데 네 이름은 뭐야?”

 

  “이름? 우리한테는 그런 관습은 없어. 호칭만 있을 뿐이지.”

 

  소녀는 봄이의 질문에 대답은 했지만 미련이 남았는지 중얼거렸다.

 

  “사실 좋은 호칭을 생각해둔 게 있던 참이야. 앞으로는 ‘베티’ 라고 불러. 전부터 항상 이 이름을 써보고 싶었지.”

 

  “베티라고? 그거 본명이야?”

 

  “아니, 우리한테는 더 이상 예전 세계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아. 예컨대 이름이란 뭐랄까, 자기중심적 정체성 같은 거야. 모든 것이 무너지고 뒤바뀐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아있는 흔적이자, 지워지다 만 과거지. 한마디로 지금 세상에서 본명을 사용하는 건 인류가 씻지 못할 크나큰 과오를 저지른 예전 세상에 미련을 남긴다는 뜻이야. 이미 사라져버린 예전 세상을 되돌아볼 필요는 없어. 그저 실패한 세계일 뿐이야. 몇 세기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야. 지금 이 순간은 낡은 과거의 세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기점일 뿐이지. 이제 곧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거야. 그런 영광스러운 발전을 이룩하는 순간에도 예전 세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신세계에 대한 모욕이자 어리석은 짓이야.”

 

  봄이는 떠들어대는 베티를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어두운 방 안에 여왕과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와 걷다 보니 까마귀 본부는 제법 관리되는 것 같은 저택이었다. 전체적으로 홀에는 백열등이 켜져 있었지만 불을 밝히기 어려운 곳에는 마치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불 붙은 양초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실내에서도 창을 통해 바깥이 훤히 보였고,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방독면이나 짙은 가면을 쓴 자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진 봄이가 물었다.

 

  “왜 다들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거야?”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외부로 신변이 노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맞서는 악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정당한 권리로 악인들을 벌하는 심판자야. 우리와 뜻이 다른 악인들에게 굳이 우리의 얼굴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봄이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설교가 더 길어질까 봐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봄이는 베티의 안내를 받으며 홀을 한 바퀴 돌았다. 베티는 하나같이 시커먼 것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을 자매들이라고 불렀다. 봄이가 자매들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했을 때에야 자매들도 따뜻한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아무 미동도 없이 묵묵부답이었던 자들도 많았다. 따뜻하게 맞아준 자들은 그나마 덜했지만, 이들은 가끔 정말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홀을 전부 다 돌았으니, 이제 지하로 내려가서 주방을 보여줄게. 거기서 일하고 있는 요리사 자매한테 아직 인사를 못 드렸으니까. 네가 아까 전에 먹었던 음식도 그 요리사 자매가 한 거야. 아마 지하실에 가보면 깜짝 놀랄걸.”

 

  “저기, 잠깐만. 묻고 싶은 게 있어.”

 

  휘파람을 부르며 지하실로 향하려는 베티를 봄이가 멈춰세웠다.

 

  “너 혹시...... 네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아?”

 

  봄이의 말에 베티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야 물론이지. 내 가족은 바로 여기 있어. 새로운 세계를 위해 몇 년간이나 함께 싸웠고, 또 지금은 모두 함께 동일한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자매들이 바로 내 가족이야.”

 

  봄이는 베티의 막연한 설명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대답을 원한 게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네 ‘진짜 가족’ 에 대한 걸 물었어. 혹시, 내가 말 못할 사정을 캐묻는 거라면 대답 안 해줘도.......”

 

  “난 그런 사람들 몰라.”

 

  활기차던 베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봄이도 눈치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소녀는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몇 분동안의 침묵 끝에 베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아빠, 경제 공황이 심해질 때 날 버렸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바닥에 혼자서 버려졌지. 그 때가 몇 년 전이었더라...... 5년 정도 된 이야기네. 그 때 당시에는 왜 날 버렸는지 몰랐지. 그저 길바닥에 버려진 채로 울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어. 하지만 결국 엄마는 오지 않았지.”

 

  베티는 봄이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생판 외지에서 살면서 자라다 보니까, 대충 날 버린 이유를 알겠더라고. 실종 신고에 의한 보험금을 노렸던 거겠지. 결국 난 네가 말한 그 ‘진짜 가족’ 들에게 쓸모없는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는 거야. 그런 게 ‘진짜 가족’ 인 거야? 네가 말한?”

 

  베티의 목소리는 떨리고 울분에 찬 것처럼 들렸다. 주먹이 부들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왜, 그렇다고 내가 우리 엄마 아빠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해? 천만에. 난 절대 우리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아. 아니면 날 버린 가족들에게 복수하려는 것 같아? 전부 다 유치하고 의미없는 애들 장난일 뿐이야. 버려진 녀석은 버려질 만 하니까 버려진 거야. 쓸모가 없었으니까. 정말로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부모님은 날 버리지 않았을 거야. 그런 세상이니까.”

 

  봄이는 이제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지금껏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살아왔을까? 또 이 소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을 듣고 나자 봄이는 마치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듯한 동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베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베티는 봄이의 손을 뿌리쳤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 난 혼자서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누가 진짜 가족이고, 우리 자매들이 진짜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저 버려졌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고 보란 듯이 꿋꿋이 살아있는 게 내가 내 ‘진짜 가족’ 에게 할 수 있는 최고로 통쾌한 복수니까.”

 

  속에 끼어있던 독을 잔뜩 발산하고 나자 베티는 이제 후련해졌다는 듯 봄이를 돌아보았다.

 

  “까마귀에 있으면서 배운 것들이야. 이제 과거 이야기는 그만 하자. 중요한 건 이제부터 우리들이 세워 나갈 새로운 세계야.”

 

  봄이는 벽에 기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전에 여왕한테 들었는데, 여기 샤워도 할 수 있다면서?”

 

  “그렇긴 한데,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안 돼. 그건 왜 물어?”

 

  “물구경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

 

  “안내해 줄게. 하고 나와. 자유야.”

 

  “같이 할까? 할 이야기도 아직 남았는데.”

 

  베티는 잠시 고민하더니, 오늘 새로 알게 된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 *

 

  지하실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한참 계단을 내려가자 머리가 닿을 듯 말 듯한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반쯤 나가 찌직대는 백색등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찝찝한 긴 통로를 지나자 철제 간이 로커(Locker)가 양쪽 복도를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봄이는 이곳에서 옷을 벗었다. 지금까지 칼바람 부는 추위를 막아준 재킷과 셔츠가 이 순간만큼은 몸에 착 들러붙은 진흙과도 같이 느껴졌다. 땀이 가득 차고 더러운 찌든때가 낀 셔츠와 여기저기 찢어지고 얼룩진 후드 재킷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그나마 좀 나았다.

 

  속옷을 벗으려는 순간 봄이는 자신의 복부에 칭칭 감긴 피 묻은 붕대를 눈치챘다. 베티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상처가 아직 덜 나은 것 같은데, 괜찮겠어?”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물이 있는데 이제 와서 망설일 순 없지.”

 

  하며 봄이는 주저없이 감긴 붕대를 풀어헤쳤다.

 

  샤워실은 예전 세상의 진짜 ‘샤워실’ 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말로 따뜻한 물이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씻지 못해 안달난 소녀를 만족시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천국이란 곳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봄이는 파이프에 무성의하게 감긴 낡은 호스를 이리저리 조작해 물을 뿜어내는 베티를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로 따뜻한 물이 나오고 있었다.

 

  사실 따뜻하다기보단 미지근한 것에 가까웠지만 이미 그런 건 봄이에게는 상관없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악취가 나던 몸도 물을 뿌리자마자 거짓말처럼 모든 피로와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봄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아직도 따뜻한 물이 나올 수가 있지?”

 

  “이곳 지하수는 철저하게 까마귀에서 관리하고 있어. 우린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절대자 대신 세우는 대행자야. 따뜻한 물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봄이는 베티가 묘하게 우쭐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게 자신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평소였더라면 봄이는 이 시덥잖은 궤변에 관심도 주지 않았겠지만, 물맛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자 봄이는 왠지 베티의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졌다.

 

  “절대자? 절대자란 게 누군데?”

 

  “그게 누군지는 몰라. 다만 확실한 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은 우리들이야.”

 

  봄이는 어디선가 너덜너덜한 책에서 주워들은 적 있는 단어들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뭐라고 하더라, 신 같은 거야?”

 

  “아니, 신은 죽었어. 예전 세계가 붕괴될 때 그 책임을 떠안고 예전 세계와 함께 사라졌어. 땅으로 추락한 거야. 절대자로서 실격이지. 신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라지기 전에 새롭게 시작될 세계의 주도권을 모두 인간에게 넘겨주었어.”

 

  베티는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 주도권을 쥔 게 바로 우리들이지.”

 

  봄이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자 베티가 강조했다.

 

  “다시 말하지만 신 같은 건 없어. 이제 모두 우리의 손에 달렸을 뿐이야. 신은 평화롭던 예전 세상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자취를 감춘 추악한 위선자에 불과해.”

 

  봄이는 물 속에 몸을 담근 채로 베티가 왜 저렇게 별 것 아닌 일에도 흥분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봄이에게는 신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새로운 세계가 어떻고 하는 거창한 목적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과 다시 재회하는 것만이 봄이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가족만 찾을 수 있다면 이런 궤변이나 늘어놓는 꽉 막힌 집단에서 도망쳐나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사실 따뜻한 물 덕분에 조금은 아쉬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져서 베티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해서 이곳......아니, 까마귀에 들어오게 됐어?”

 

  봄이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베티의 신경을 건드릴까 봐 말을 고쳤다. 베티가 대답했다.

 

  “난 거친 빈민가에서 자랐어. 오늘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내일 뒷골목에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 게 일상인 곳이었지. 꿈도 희망도 없는 황무지에서 늘 살기 위해 싸우는 것만이 전부인 세상이었어.”

 

  “나랑 비슷하네.”

 

  “너도 엄마 아빠한테 버려졌어?”

 

  베티가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봄이는 베티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아니, 뭐 그런 셈인가.”

 

  베티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봄이가 딱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버려지기 전에 엄마 아빠라고 불렀을....... 그 개새끼들한테 버려지고 난 이후로 어딘지도 모르는 빈민가에서 살면서, 세상에 남겨진 악인들의 추악함을 봤어. 차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잔인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놈들이야. 요즘은 ‘사냥꾼’들이라고 부른다지? 결국엔 악인이지만 말이야.”

 

  베티는 잠깐 동안 옛 기억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 인간 쓰레기들을 보고 반감이 생겼던 나는 자연스럽게 정의를 동경하게 됐어. 그래서 몇 년 뒤에 지역 자경단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지. 내가 있었던 그 소규모 지역 자경단은 얼마 안 되어서 까마귀와 합쳐졌어. 그래서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된 거야.”

 

  지역 자경단...... 봄이는 그런 단어를 듣자 영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봄이의 삼촌이 속해 있는 집단, 또 눈앞에서 봄이의 예전 일행이었던 종민을 쏴죽였던 자들도 자신들을 자경단이라고 했었다.

 

  베티가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봄이는 분명히 이렇게 알아들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악인들은 반드시 죽어야 해. 모두.”

 

  꿈만 같던 목욕이 끝나고 봄이는 더러운 옷을 다시 입었다. 봄이의 처참한 옷 상태를 보다 못한 베티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이제 그 옷은 못 입겠다. 이걸로 갈아입어.”

 

  새 옷을 내미는 베티에게 봄이는 손을 내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갈아입을 속옷만 좀 빌려줄래?”

 

  “왜 그런 다 찢어진 외투를 입고 다니는 거야?”

 

  베티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봄이를 쳐다보았다.

 

  “촌스러운 분홍색에, 완전 싸보이는 싸구려 옷 같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베티는 봄이를 골려주려고 트집을 잡았지만 의외로 봄이가 수긍해버리자 말문이 막혔다.

 

  “그럼 대체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거야? 다른 예쁘고 따뜻한 옷도 많은데......”

 

  봄이는 말없이 어깨 부분이 거의 다 찢긴 후드 재킷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글쎄,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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