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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천마검엽전
작가 : 임준후
작품등록일 : 2016.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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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에 지옥이 구현되고 마의 군주가 현신하면 그누구도 그를 막지 못하리라!
이는 태초 이전에 맺어진 혼돈의 맹약, 육신에 머문 자나 육신을 벗은 자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구속의 약속일지니……
주검과 피, 그리고 살기가 강물처럼 흐르는 전장에서 본연의 힘을 되찾게 되는 신마기!
신마기의 주인은 전장을 거칠 때마다 마기와 마성이 점점 더 강해져 종국에는
그 자체를 마(魔)가 된다…….
제어되지 않는 신마기…
이는 곧 혼돈의 저주, 겁화의 재앙이다!

 
제 3 화
작성일 : 16-07-12 13:56     조회 : 628     추천 : 0     분량 : 8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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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면사 위로 드러난 여은향의 안색은 창백했다.

 묘령의 나이를 지난 후 오늘처럼 그녀의 마음이 뒤흔들린 적이 또 있었을까.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른 그녀의 무공과 수양을 생각할 때,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쉬이 생각하고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받고 있는 심중의 격동이 얼마나 큰지 웅변하는 것이었으니까.

 ‘…열기 속에 기운이 느껴진다.'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맥에 비전되어 내려오는 초연신공(超然神功)을 떠올렸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기가 움직였고, 그 기를 따라 초연신공의 막대한 기운이 일수유간 전신을 휘돌아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난 초연신공의 맑고 따스한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개가 되어 계곡의 안쪽으로 십여 장 밀려들어 갔을 때, 그녀는 초연신공의 기운과 부딪치는 기이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기이하되 익숙한 기운.

 ‘이것은… 강 오라버니의 파멸천강지기(破滅天剛至氣)?'

 그녀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설마… 여력(餘力)? 여력이 이 정도라는 건……?'

 그리고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여은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바뀌었다.

 그녀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른 두 여인, 호위선자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이었다.

 여은향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린 것이다.

 두 호위선자는 흠칫하며 계곡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들이었다.

 비록 계곡 안이 초열지옥이라 할지라도 여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은향은 입구에 펼쳐진 천극미로진세(天極迷路陣勢)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생문을 알지 못하는 자라면 삼 보를 내딛기 전에 목이 떨어질 진세도,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통과하는 길을 모른다면 있을 수 없는 운신이었다.

 그녀가 진을 통과하는 데는 열을 헤아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진세를 벗어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거대한 폐허였다.

 계곡은 호리병과 같은 형상으로, 입구를 제외한 사방이 위가 좁혀드는 절벽에 에워싸여 있었다.

 절벽의 높이는 이백여 장이 넘었고, 표면은 대패로 밀은 듯 매끈했다. 경공이 조화경에 이른 자라 해도 넘나들기 어려운 구조였다.

 평지의 너비는 대략 삼만 평 정도. 첩첩산중인 계곡 내부의 너비로는 실로 거대하다 할 수 있었다.

 그 평지를 가득 메운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돌로 만든 건물들이었는데, 지금 그 건물들의 모습은 무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건물은 대부분 붕괴되어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없었고, 본래 검푸른 빛을 띠었던 돌들은 숯불처럼 달아오른 채 무서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평지와 닿아 있는 절벽면마저도 십여 장 높이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무나 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있었을 테지만, 직경이 다섯 자가 넘는 거대한 돌조차 숯불처럼 달아오르는 열기에 수풀은 남아나지 않은 것이다.

 인세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지금 여은향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제아무리 큰불이 나더라도 삼만 평 대지의 모든 건물은 물론이고, 건물 주변 바닥과 길에 깔린 돌, 그리고 단단하기가 쇠에 비견된다는 황철석이 주된 성분인 삼면의 절벽마저 저처럼 달아오르게 하지는 못하니까.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지옥과도 같은 눈앞의 정경 때문이 아니었다.

 숯불처럼 달아오른 돌에 남아 있는 기운.

 ‘어찌 이런 일이……. 파멸천강지기가 계곡 전체를 단숨에 초열지옥으로 만들었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봉문 기간 동안 강 오라버니가 지존천강력을 극에 달하도록 연마하였다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야. 남은 여력만으로 곡 내의 건물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파멸천강지기라니…….'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경악이 그녀의 전신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산중에서 검은 연기를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경악의 연속이었다.

 가벼운 심호흡으로 놀람을 가라앉힌 그녀의 시선이 계곡을 살처럼 훑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함몰해 있는 계곡의 중앙부가 들어왔다.

 그녀의 신형이 한 가닥 회오리바람처럼 날아올랐다.

 단숨에 삼십여 장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날아오른 순간 이미 삼십 장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신법.

 무공을 익힌 자가 그녀를 보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 여겼으리라.

 천하에 경공으로 성명한 자들 중 한 걸음에 십 장을 건너는 자를 꼽으라 해도 손가락이 남는 게 현실이 아니던가.

 함몰된 중앙부의 외곽에 도착한 여은향은 무너진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파리해진 입술을 깨물며 재차 신형을 날렸다.

 함몰된 곳은 원형이었는데, 직경 십여 장에 깊이 또한 십여 장 정도였고, 바닥은 평평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함몰된 곳에서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바닥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다.

 여은향은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며 구덩이 바닥에 내려섰다.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의 등 뒤였다.

 가녀린 체구의 소년은 한 줌의 회색빛 잿더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잿더미는 사람의 것임이 분명했다.

 잿더미는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검은색 장포 자락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은향의 시선이 소년의 긴 머리로 향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흙을 뒤집어쓴 채 풀어헤쳐져 있어서 추레했다. 그러나 흙이 묻지 않은 부분은 여인의 것처럼 곱고 칠흑처럼 검다.

 소년이 입고 있는 것은 곳곳이 찢어진 허름한 흑의.

 아무런 장식도 없고 수도 놓이지 않은데다가, 형상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만큼 찢어지고 흙에 뒤덮인 초라한 옷이었다.

 하지만 그 옷의 재질이 고려에서 나는 최고급 비단이라는 걸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뒷모습만 보면 소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여은향은 상대가 소년임을 확신했다.

 남자와 여자의 기운이 가지는 차이를, 그녀와 같은 절대 초강고수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물었다.

 "아이야, 너는 누구냐?"

 소년의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나타남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그것을 본 여은향의 눈이 빛났다.

 놀란 듯했던 소년이 단숨에 평정을 되찾았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인세의 지옥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끔찍한 상황 속에 남아 있던 소년이다.

 어른이라도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인데, 체구로 보아 이제 십여 세에 불과해 보이는 소년이 낯선 음성으로 인한 동요를 숨 한 번 들이쉬기도 전에 제어한 것이다.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범상한 아이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낯선 사람을 뒤에 두고 단숨에 평정을 되찾을 수 있음은 쉬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여은향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소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여은향에게 말했다.

 “고검엽이라고 합니다. 아주머니는 누구십니까?"

 어린아이의 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음의 고저가 거의 없는데다가 낮은 음성이어서 왠지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생김새를 볼 수는 없었다.

 소년의 대답을 들은 여은향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가늘게 흔들렸다.

 “…고… 검엽이라고?"

 이 계곡에 사는 사람들의 성은 전부 고(高) 씨다. 그러나 아이의 이름은 여은향에게 어떤 예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은향이라고 한다. 혹 들어본 적이 있느냐?"

 소년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위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님이시란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여은향이 흠칫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흙투성이의 몰골이라 생김새를 알아보기 어려운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고모라니?"

 “선부(先父)께서 고모님에 대해 몇 번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선부?"

 그녀의 눈이 소년의 눈과 부딪쳤다.

 소년의 커다란 두 눈은 맑고 흑백이 뚜렷했다. 별처럼 빛나는 그 눈은 눈이 마주친 그녀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은 기이한 기세마저 실려 있었다.

 보는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 정도로 허무와 고통,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한 기이한 기세.

 세상을 모르는 아이의 눈이다. 그런데도 그 눈은 보는 이의 마음에 화인처럼 선명한 감정의 낙인을 찍었다.

 ‘허무와 슬픔……?'

 상대가 장년이나 노인이라면 저런 눈빛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허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이제 십여 세의 아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여은향은 자신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에 잠시 시간을 할애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에 그런 여유를 즐길 공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소년의 눈을 보며 그녀는 내심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년의 말뿐만 아니라 소년의 눈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년의 눈이 왜 이상하게 보였는지 곧 알 수 있었다. 소년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맹인?'

 그녀는 소년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이 저리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선명한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이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여은향은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소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분명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몸짓에서는 앞을 보지 못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맹인 특유의 망설임이나 경계심이 소년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은향은 지금 그런 의혹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네 아버지의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묻는 그녀의 음성에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소년은 느끼지 못했지만.

 “…천(天) 자, 강(剛) 자를 쓰셨습니다."

 소년의 대답을 들은 여은향의 전신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곡주님!"

 어느새 여은향의 뒤에 날아내린 호위선자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호위선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신형을 바로 세운 여은향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오라버니의 아들이란 말이냐?"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태도는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여은향은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은 폐허로 변한 주변 모습만큼이나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으니까.

 ‘강 오라버니가 이 아이에게 나를 고모라고 말했던 모양이로구나.'

 자신에 대해 아들에게 말했을 고천강을 생각하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소년의 뒤에 있는 땅을 향하고 있었다. 흑의 장포에 덮인 잿더미.

 “네 앞에 있는 시신이……?"

 소년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일다경 정도가 흐른 후 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같았다.

 “아버님… 이십니다."

 “…아아… 오라버니……."

 여은향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년을 스쳐 지나가더니 허물어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순백의 궁장이 흙으로 더럽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고, 호위선자들은 감히 그녀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호위선자들이 여은향을 모신 세월은 반 갑자가 넘었다.

 그녀들은 그 긴 세월 동안 지금처럼 여은향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찌 그녀를 막을 수 있으랴.

 떨리는 손으로 흑포를 쓰다듬던 여은향은 회색빛 재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엽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 아는 것이 있느냐?"

 그녀가 본 대로 고검엽은 맹인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십여 세의 어린아이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의 정황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그녀의 음성에 일말의 기대가 깔려 있음도 사실이었다.

 소년 고검엽은 이곳에서 생존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더구나 고검엽은 다른 곳과 달리, 어떤 힘에 의해 함몰된 것이 분명한 곳의 한복판에서 고천강의 시신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맹인임을 생각할 때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

 고검엽은 일의 전말까지는 아니라 해도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는 그저 기대로 끝났다.

 고검엽이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여은향은, 고검엽이 입을 열 기색이 없자 들릴 듯 말 듯 탄식을 토했다.

 고검엽이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금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고, 그것은 그가 이제 이곳에 존재했던 가문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알든 모르든 그의 신분은 그녀와 동등했다. 모든 면에 있어 고검엽과 비할 바 없이 고귀한 그녀일지라도, 그를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고 약속이었다.

 여은향은 탄식과 함께 손을 뻗어 흑포와 이제는 재로 변한 고천강의 유해를 거두기 시작했다.

 호위선자들이 도우려 했지만 그녀의 단호한 손짓에 멈춰 섰다. 처음 고천강의 유해를 거두는 여은향의 손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떨리던 손은 진정되어 갔고, 유해를 다 거둘 즈음 떨림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유해를 한곳에 모은 여은향은 그것을 흑포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품에서 꺼낸 비단에 유해를 담은 흑포를 겹으로 싼 여은향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검엽을 보는 그녀의 눈은 호수처럼 맑고 고요했다.

 고천강의 죽음과 신화곡의 붕괴로 받은 그녀의 충격은 단순히 크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충격의 여파 속에 정신과 육체를 그대로 놓아두기에는 그녀의 성취가 너무나 높았다.

 “엽아, 네 나이가 몇이더냐?"

 그녀의 목소리는 기품이 어려 있고 엄숙했다. 일문의 종주이자 천하에 적이 드문 절대 초강고수인 그녀였다.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그녀의 음성에서는 일대종사의 기세가 절로 우러나왔다.

 “열하나입니다, 고모님."

 고검엽은 옷에 가려진 주먹을 꼭 움켜쥐며 대답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여은향이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십여 세의 어린아이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 오라버니께서 네게 가문의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느냐?"

 “일부분은 말씀해 주셨지만 자세한 것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며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가문에 전승되어 온 것 중 배운 것은 있느냐?"

 고검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부께서는 제가 가문의 비전을 배우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고검엽의 어조에서는 진실이 느껴졌다.

 설령 그가 고천강에게 무언가를 배웠다 할지라도 이제 그의 나이는 열하나였다.

 그의 가문에 비전되는 것은 그녀의 무맥에 비전되는 것에 비해 못하지 않은 것들.

 그가 혹여 고금제일의 기재라 해도 십여 세의 아이가 그것들을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그는 정상인도 아닌 맹인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탄식이 여은향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아… 누천년을 한결같이 이어져 온 위대한 무맥(武脈), 봉황의 십익(十翼) 중 하나가 이렇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독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서 있던 고검엽은 여은향의 독백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고, 여은향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검엽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망연한 시선으로 고검엽을 내려다보던 여은향이 입술을 뗐다.

 “내가 있는 곳은 남자가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해서 그곳에 너를 데려갈 수는 없다. 하지만 잠시 머물 곳은 있지. 네가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나와 함께 있지 않겠느냐?"

 그녀의 맞은편, 고검엽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호위선자들의 면사가 흔들렸다. 눈빛으로 보건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고검엽을 내려다보는 여은향의 눈빛은 너무나도 절실했다.

 고검엽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고모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곡 밖으로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다.

 그러나 그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던 곡이 붕괴된 이상,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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