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하의 고도
대본
미니시리즈 (15회, 회당 A4 용지 기준 35매 내외)
등잔인물
한상오(56): 기관장
정지승(36): 일항사
우현태(29): 이기사
차정수(58): 조기장(별명: ‘발설자’)
이학봉(40): 기고수(별명: ‘역발산’)
조경욱(33): 일조수
외 다수의 인명과 그 직책 및 별명
심일섭: 통신사(차석), 김연철: 일타수(별명: ‘털보’, ‘ 쿼터마스터’), 신해진: 일사원, 노동빈: 견기원, 박수도: 이기원, 임흥길: 삼기원, 최득만: 이조수, 백만복: 조리장, 김대영: 펌프수, 권달수: 일갑원.
등등 전 부원 38명
1회. 폭풍 주의보
S# 1. 운무 덮인 바다(오후 4시 경)
흰 페인트로 도장된 삼도(three island)형 유조선 천지호(天池號), 방카 시(C) 7,700톤을 만재한 채 한반도 남서해(南西海)의 파도를 가르고 나아간다.
S# 2. 천지호 선미루 갑판(poop deck)
아파트 2층 높이의 건물이 선미루 갑판 위로 세워져 있다. 그 좌현 통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현태, 시선을 바다 위 저 멀리 그어낸다. 그 순간 운무 사이로 부시는 햇살 때문에 찌부러뜨린 눈두덩 위로 수마가 부듯이 몰리는 듯한 우현태의 표정.
S# 3. 선미루 갑판 좌현 통로
좌현 통로에 나타나자 잠시 발걸음을 멈춘 우현태. 그의 시야 저편의 바다 위로 웬 투명체 형태의 점 하나가 가뭇가뭇 어리듯 혼미한 기억 속에서 환영처럼 비치는 어렴풋한 형체를 띄운 그것은 망막 언저리로 점점 크게 부각된다.
마치 요지경 속에서 변환하듯 들여다보이는 흐릿한 형체···, 일순 그게 바다 빛에 반사되고 있다.
S# 4. 같은 곳
좌현 통로에서 내다보이는 바다. 굽이치는 너울 위로 얼핏 회색빛 하나의 영상물이 비치는 듯··· 시선을 좀 더 멀리 던지면, 흰 배때기를 드러낸 거대한 괴물이다. 그와 동시, 물결을 헤치고 솟구쳐 오르는 듯 비말을 뿌리면서 회청색 등 쪽을 드러내고 유유히 헤엄치는···, 놈은 막 누군가에게 쏘아붙이는지 모를 핏빛 눈초리를 번뜩인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괴물은 트롤링 낚싯줄에 걸린 채 날카로운 삼각형 톱니빨을 드러내는 한 마리의 백상아리다.
S# 5. 동 선미루 갑판 위의 두 부원
저 너머 바다에서 울렁이며 선체에 부딪치는 너울성 파도의 소음···.
E 철썩···!
귓바퀴에 울리면 동시에 그 위로 들리는 목소리···, 돌아보는 우현태.
조경욱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지켜보세요?
막 환영을 지워버린 그는 선미루 갑판 쪽으로 우현태를 뒤쫓아 올라선 조경욱이다.
우현태 (얼버무리는 말투) 아, 저기··· 식인상어 한 마리가···.
운무 속, 바다 위로 비치다가 사라져 버린 식인상어···.(잔상)
백상아리 한 마리의 묘연한 형체가 거둬진 우현태의 시야, 그의 등 뒤로 붙어서는 조경욱, 상대방의 환영과 그의 잔상을 의식하지 못한 사뭇 밝은 얼굴빛이다.
조경욱 (바다를 건너다보며) ‘운무’가 아주 많이 깔렸군요!
우현태 ‘운무’. 그렇죠. 5월의 남서해안이 이곳이니까요.
조경욱 그래요? ‘아이 워치(Eye Watch; 같은 시간 당직)'님. 그런데··· 여기 바다 빛이 참 아름답게 부서지는군요. 저기 보세요. 모두 짙은 ‘운무’ 속에 뒤엉겨 흩어지는 빛살 같잖아요.
우현태 우와, 합기도(合氣道)··· 무도인(武道人) 답지 않은 뜻밖의 심미 안을 가졌군요.
조경욱 또. ‘무도인'?! 그 소리를···. (음밀히 질책하는 듯하다가 겨우 말끝을 돌리는) 바다 빛이야 기상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게 아닐까요.
바다, 부시는 빛살 때문에 눈두덩을 찌부러뜨리는 우현태.
솜털 운무 사이로 막 바다 빛이 반짝반짝···, 은빛에서 금빛으로 변환된다. 그 빛을 넘겨보는 더욱 찌부러진 우현태의 눈두덩 밑, 금방 눈물이라도 어릴 듯 가늘게 좁혀져 있는 눈시울, 시선은 부셔지는 빛살 저편으로 이어진다.
우현태 이것, 시신경이 약간 손상됐을지 모르겠군. (현란한 빛살에서 눈을 떼며 잠시 생각에 젖다가 말하는) 바다 빛이란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죠.
황톳빛 바다를 건너다보면, 부셔지는 초록빛 그 너머 푸른빛의 바다··· 갖은 빛살은 조금 아까처럼 황금빛으로 부시면서 온갖 무지개 빛살을 띄운다.
조경욱 그렇죠. 바다 빛은 마치 변색수(變色水)를 연상하게 하죠.
바다를 내다보면, 물결 위로 시시각각 조금씩은 변하면서 비치는 변화무쌍한 빛살이다.
우현태 그건 수심 여하에서도 다를 테지만···.
우현태, 말하는 가운데 내다보이듯 느끼는 바다 위의 변화무쌍한 그 모든 빛살···, 푸른 바다 위로 복합적인 무지갯빛 단색들처럼 대개 검은빛, 흰빛에 어우러져 있는 듯하다.
조경욱 그야 어슴푸레한 낮과 밤에 비치는 바다의 형상은 형형색색이라 아니 할 수 없겠죠.
우현태, 언뜻 조경욱이 말하는 대로 소상히 떠올리는 바다의 빛과 그 형상···.
일출 일몰 전후의 바다, 먹구름이 잔뜩 가린 사이로 햇빛이 서광처럼 비칠 때의 바다, 밤에는 달빛과 별빛의 각도와 그것들이 잠깐 구름과 운무에 가렸다가 나타날 때의 바다.
우현태 하긴··· 기상악화의 정도에 따라서 때때로 바다의 형태도 다르지 만 그 색채가 갖가지로 변화하지 않던가요.
조경욱 그랬죠. 그것 또한 밤과 낮에 비춰지는 형상은 가히 천태만상이죠.
저만치 울렁이고 있는 파도, 그 바다를 바라보며 그 온갖 색상을 떠올리다가 낭만적인 정치에 잠겨드는 우현태, 마치 바다의 빛 속으로 숱한 그림자의 흐름을 들여다보듯 잠시 취해 드는 그의 모습.
S# 6. 인서트
선미루 갑판 위에서 내다보이는 한 줄기의 항적.
S# 7. 통로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부원
우현태와 조경욱, 선미루 갑판 좌현 통로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저편으로 길게 이어져 나가는 한 줄기의 항적(航跡)을 내다본다.
우현태 저기, 물결을 지켜보니까 언뜻 ‘역발산’이 떠오릅니다.
조경욱 뭐요? ‘역발산’···, 갑자기 ‘역발산’은 왜죠? 좀 있으면 공 구정리를 끝내고 부리나케 이쪽으로 올라올 거예요.
우현태 ···.
기관실에서 올라서는 분주한 ‘역발산’의 모습을 그려두는 듯한 표정.
S# 8. 선미루 갑판 좌현 통로
바다를 옆에 끼고 나란히 걸어 나서는 조경욱과 우현태, 그들은 선현으로부터 저 먼 운무 서린 바다를 내다보면서 선미루 갑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파도가 잔잔히 일고 있는 바다 저 멀리 펼쳐지는 항적, 그 위로 끌려오고 있는 가늘고 질긴 한 가닥의 나이론 트롤링 낚싯줄, 그 낚싯줄 위로 비상을 즐기는 대여섯 마리의 괭이 갈매기들···.
S# 9. 선미루 갑판 위의 부원들
우현태의 시야,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두 부원인가가 비친다. 그들은 스물 안팎의 앳된 모습의 신해진과 나이 30은 지난 모습의 보통 키로 덩치가 우현태와 엇비슷한 심일섭 통신사다.
그들에게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다가서는 조경욱과 우현태.
신해진 (우현태에게 시선을 던져둔 채) 안녕하십니껴? 이기사님!
우현태 (반기듯) 아, 안녕하세요! 운무가 꽤 넓게 깔렸군요!
신해진 군데군데 깔린 구름덩이 같은 안개인기라요!
우현태 캄차카 반도 아래쪽 알류산 열도에서 이곳, 한반도 남해안까지 뻗쳐 있는 세계 3대 안개지대 가운데 그 하나죠.
신해진 곁의 심일섭 통신사, 힐긋 우현태에게 시선을 던지며 반말 투로 입을 뗀다.
심일섭 어이···, 날씨가 너무 싸늘해! 아직 겨울철 그대로야!
우현태 아, (그런대로 연장자에게 예의를 표하듯) 통신사님. 그렇죠. 여기는 바다잖아요.
심일섭 ···.
상대방의 말을 무심하게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심일섭, 선미루 갑판 뒤로 권양기 드럼에 묶어 장치해둔 트롤링 낚싯줄을 추적하는 듯 시선을 바다 쪽 저 멀리 던져둔 채로다.
우현태 (언뜻 호기심에 끌린) 물고기가 좀 입질을 하는 것 같아요?
심일섭 (정색을 하며) 이거, 무슨 소리야……. 내가 낚시질 하는 걸 봤어? (역시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렸던지 퉁명스런 대꾸로) 사람도 심심하긴!
우현태 (그의 속을 익히 알아차린) 아, 그랬군요! 분명 바다는 5월의 봄날 같은 육지가 아니잖아요!
S# 10. 천지호, 보일러 연돌
그 위로 기웃거리고 지나는 갈매기 한 마리, 연한 검정의 날개를 펼친 채 잿빛 하늘에 낮게 떠 노란 부리를 까닥거린다. 그 뒤로 또 한 마리, 기웃기웃 먹이를 찾는 듯 말똥말똥 굴리는 작은 두 눈···. 써늘한 기류를 타는 그 갈매기 배 밑으로 보송보송 덮여 가늘게 떨리는 하얀 깃털, 신기하게 예쁜 모습이다.
S# 11. 보일러 연돌 주변
우현태, 머리 위로 비상을 즐기는 갈매기의 평화스러운 날개 짓을 지켜보다가 문득 저편으로 그리운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품에 안겨져 재롱을 떨며 방글방글 웃고 있는 간난 사내 아기와 함께 어울린 홀어머니의 애련한 모습을 떠올린다.
(상상) 연이어 지는, 6.25전쟁의 기억···, 그 가운데 무엇보다 비극적인 다부동 전투의 긴박한 상황, 펼쳐지면 그 환영 속에서 산화되는 아버지, 그리고 그 후 피난길과 그 동안 외아들을 뒷바라지 해 온 애처로운 어머니의 주름진 이마.
S# 12. 선미루 갑판 위(현재)
어머니와 아내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던져둔 시선···.
우현태 (심일섭에게 은근히 묻는) 행여 저 갈매기들이 부럽지 않아요?
언뜻 연돌 위로 시선을 던지는 심일섭, 그러나 갈매기 쪽을 지켜보지 않고 차라리 연돌 양현의 구명정 쪽으로 눈길을 주는 듯하다.
심일섭 (냉기서린 바닷바람을 쏘이는 시큰둥한 표정) 또 뭐야 엉뚱하 긴···, (몹시 추위를 타는 목소리로) 갈매기가 부럽다니?
우현태 저 놈들은 높이 그리고 멀리 날 수 있으니까요.
심일섭 아무리 그렇지만 사람이 갈매기보다야 못하다니···, 어디까지나 사람은 ‘믿음’이란 게 있는데···.
우현태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는)
S# 13. 천지호, 선교
4, 5층 높이의 건물, 그곳 선교의 조타실에서 당직교대 후 층계를 밟고 내리는 한 부원, 구레나룻을 보기 좋게 기른 ‘털보’, 30세 중반의 ‘쿼터마스터’김연철이다. 주갑판 위 한가운데로 이어진 10여 미터의 구름다리를 건너온 그가 선미 건물을 돌아 나서자 우현통로에 나타난다.
그에게 일제히 선미루 갑판 위에 머물고 있는 부원들의 시선이 떨어진다.
신해진 (활기를 띄운 목소리) ‘쿼터마스터’님. 오늘은 구마 한 마리도 물 지 않네요!
‘털보’ (나이 어린 일사원에게 다가서면서 은밀한 미소를 주걱턱의 털북숭 이 위로 날리며 반문하는) 뭐, 왜 물지 않지?
신해진 누가 그쿠니까, 지가 구쿠는 거 아닝교.
심일섭 (불쑥 끼어드는) 이봐, 사람이 너무 실없는 거 아니야. 아까 백만복 조리장이 나타나서 낚싯줄을 잡아당기고 갔다니까. 응, 물고기를 잡 아 회를 치려니까 모두 놀라서 도망쳤겠다, 뭘···.
신해진 (털보에게 시선을 던져둔 채 입가에 어리둥절한 웃음을 띤) 뭐라 꼬요? 농담이라 카지만 참 아리송한 말씀이구만요.
우현태 (흥미를 느끼고 감탄하는) 아하, 그것···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 지만 어디 천진한 데가 있어야 물고기도 덥석 덤볐을지 모르겠군 요!
심일섭 (맞장구쳐 웬 사설을 늘어놓는) 맞았어! 그게 인도양에서였지. 그렇 지··· ‘역발산’, 이학봉 기고수! 물론 그의 힘이야 그 누가 따를자 없겠지만 잔인하기로는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사나이야.
S# 14. 인서트(회상)
인도양이다. ‘청상아리’를 한 마리 낚아 주갑판 위로 끌어들여 무쇠 해머로 고기의 정수리를 패대는 ‘역발산’.
S# 15. 환영을 깨뜨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돌아보면 그는 심일섭, 국장 다음 직책의 차석 통신사다.
심일섭 그랬으니, 그 후 다시 한 마리를 잡았느냐 말씀이야. 사람이란 그 저, 마음씨 착하고 고울 때 운이라도 터지는 법이니까.
‘털보’ (바다 저편을 내다보다가 말을 자르는) 그 무슨 궤변이요? 그러니 까 웬만큼 마음씨 착하고 고울 때 운이라도 터졌든가 봐. 오늘도 아리송한 설교이군, 후후.
심일섭 흥, 코 웃긴··· 왜 웃지? 그래, 당신도 한 번씩은 여기서 피라 미라도 낚았으니까, 하는 말 아니야!
신해진 ‘역발산’ 님은 큰 물괘기만을 잡을라니까 그라지요. 그분은 그 ‘운’같은 거 믿지 않고, 단지 백상아리를 잡는다고만 하던데 요?!
심일섭 야단날 소리, 일사원! (좀 거친 억양으로 꾸짖는) 자넨 그래도 괜 찮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이미 악한 물이 들었다는 걸 느낄 수 있겠어.
신해진 또 무신 말 하고 싶은교?
심일섭 또 한 사람, 자신도 모르게··· ‘잔인하게’만 변해 가고 있다 는 거야. 마구 무쇠 해머로 물고기의 머리통을 치려는 그 백정의 근성 말이야. 암튼 섣불리 배우고 있어. 섣불리···.
그때 갑자기 선미건물 우현통로 쪽에서 바다 위로 날리는 휘파람소리.
M 행진곡 장단에 맞춰 흥을 돋우는 듯 들려오는 유행가 가락의 음률.
···
그 휘파람을 유감없이 불어제치며 우현 통로 위로 나타나는 한 부원, 기관실에서 서둘러 오후 5시 과업을 끝낸 채 올라선 그는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닌 가냘픈 몸집의 노동빈 견기원이다.
우현태 (쳐다보다가) (E) 음, 무엇이 그처럼 신바람이 나게 했을까? 처음 타보는 배가, 굽이치는 물결과 갈매기가 어쩌면 그를 낭만적인 흥취에 젖어들게 했던 게 아닌가.
다시 그때, 기관실 입구 쪽에서 갑자기 울리는 웬 ‘발설자’란 별명을 가진 조기장의 고함소리.
‘발설자’ 누구야?! 누가 함부로 흥 바람을 터뜨리는 거야!?
뚝 그쳐 버린 휘파람소리. 잠시 이어지는 침묵, 그와 동시 발걸음을 멈춘 노동빈 앞으로 막 기관실에서 추격하여 올라선 기름이 눌어붙은 청색 작업복 차림의 ‘발설자’. 중키에다 머리카락이 희끗한 늙은이, 약간 좁은 그의 이마가 돋보이는 거뭇하고 실팍한 얼굴의 큰 코, 그러나 그리 크지는 않은 두 눈을 부라린다.
‘발설자’ (성대 굵은 목소리) 이것 봐, 노동빈! 여기는 신성한 바다야! 바닷 가에서 휘파람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어? 소름이 끼쳐, 소름이. 그게 흐르면 재수가 없다는 거야, 응. 알아듣겠어?
노년기답지 않게 떠들어 붙이는 ‘발설자’를 지켜보면서 침묵을 머금는 노동빈과 주변의 몇몇 부원들의 의아한 표정들.
‘발설자’ 미신 같은 것을 믿는 건 아니지만, 바다가 노한다는 말 못 들었어? 집구석에도 ‘분수·분별’이 있는 거야! 상선(商船)엔 이번이 처 음일 테니까 긴말은 하지 않을 테야. 그쯤 알았으면 그만 들어가!
호된 꾸중을 받고 무안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발설자’에게 절을 꾸벅하고 건물 안으로 사라져가는 노동빈.
우현태 (E) 음, 바다와 선내생활에 익숙지도 못한 그다. 겨우 3, 4일전 본 선이 도크에서 수리중일 때 승선했던 터다. 그런데 조기장으로서 겨우 보통 부원들의 저녁식탁을 돌보기 위해 나타난 그에게?!
S# 16. 같은 곳
의아한 눈빛으로 ‘발설자’와 노동빈을 지켜보던 몇몇 부원들, 대개 권양기 쪽에 모여 있는 그들을 쫓아 걸어 나오는 ‘발설자’.
신해진 (외경의 눈빛을 흘깃 심일섭에게 던지며 소곤거리는) 왜 그카능 교?
심일섭 그걸 몰라서 물어? 훌륭한 말씀이었잖아! 그러니까 자네가 함부로 굴면 말씀이야, 바다의 신도 노한다고 하지 않았어!
신해진 (나직이 그러나 미심쩍은) 정말로 바다의 신이란 기 어드메 있능교?
심일섭 (정색을 하고 창백한 얼굴빛으로 크게 눈을 부릅뜨는) 이 무례한 친 구 좀 봐! 감히 어디서 신을 의심하다니? 천벌을 받을 일이 바로 그런 소리야. 아직도 모르겠어?
한 순간, 부르르 몸을 떨어 붙이는 심일섭. 선미루 갑판 위로 스치는 차가운 기류가 그의 속옷까지 침투한 피부에 부딪혔던 것 같다.
S# 17. 같은 곳
어리둥절한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고 의아한 침묵을 자아내는 신해진에게 다가서는 ‘털보’, 새카만 그의 눈썹 밑으로 암시의 눈웃음을 찡긋 띄워 보내며 잠시 얼어붙은 주변의 분위기를 깨뜨린다.
‘털보’ 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발설자’, 조기장님은 몇 번 인가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분이었지, 뭐··· 아마 보통 사람이 아닌, ‘비범인(非凡人)’이라고나 할까.
신해진 예?!
‘털보’ 그건 조용한 호수에 돌을 집어던지지 말라는 식인지도 모르지. 생각 하면 앞으로 누구든 물고기를 잡겠다는 취미는 성가셔 버려야 될 것 같단 말이야.
신해진 그라먼 누군가는 디게 심심하겠네요.
‘털보’ 두고 봐야지. 문제는 ···아직도 그분이 강조하고 있는 어떤 최선 과 질서, 그것일 테니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신해진, 계속 그에게 늘어놓는 ‘털보’의 말소리.
‘털보’ 지난 번 ‘태풍의 눈 속’에서 헤치고 나온 다음이었지만, 하여간 내 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역발산’에게 배우고 싶었던 건 사실 이었어. 이곳에 나와 있기만 하여도 무엇을 내다볼 수가 있었으니까. 신해진 (의아한 눈빛을 띄운) 그게 뭐신데요?
‘털보’ 모두들 방향이 같거나 조금씩 다르거나 또는 정반대의 길을 각각 걷 고 있을 테니까 그것 때문일 거야. 생각하는 게 알쏭달쏭한 그거지 뭘.
슬쩍 이야기를 중단하는 ‘털보’ 김연철···. 막 그와 함께 어울려 있는 부원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발설자’.
하지만 눈웃음을 가볍게 머금은 채 바다 쪽 멀리 시선을 띄워 보내는 ‘털보’의 눈빛, 어디론가 던지는 시선에 무엇인가를 깊게 투시하고 있는 새까만 눈썹 밑, 정적이 고인다.
S# 18. 선미루 갑판 우현 통로
기름에 얼룩져 흠씬 땀에 저린 각자의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는 몇몇 기관부원들, 기관실에서 과업을 끝내고 냉랭한 해풍을 쏘이듯 우현 통로에 올라서자 선미루 갑판 쪽으로 걸어 나온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큰 소리로 호소하듯 뱉어낸다.
박수도 제발 배야, 오늘밤에는 좀 조용히 달려다오!
지친 모습의 박수도, 그 뒤를 따르는 임흥길, 팔자(八字) 눈썹 위로 웃음꽃을 피우듯 뭐라고 말을 건넨다.
우현태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
임흥길 또 무엇 땜시 걱정이다요?
박수도 어쩌다가··· 오늘은 일이 징그럽게 느껴진단 말이야!
임흥길 후, 늘 그기 낙이 아닌가벼.
박수도 어휴. ‘밀수꾼’ 이형직 씨 말대로 ‘가혹한 운명’이 맞아! 벌써 출거 후 몇날 며칠 째야. 우리는 로봇이 아니야. 잠을 좀 재워줘 야지.
임흥길 후, 고생은 타고 났지라. 발시 옛날인가벼. 카라치를 출항하여 이 틀 밤낮을 표류하고 철야작업을 했던 거 몰라서 그런다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둥근 얼굴에 거울 표면처럼 번쩍 벗겨진 ‘대머리’ 최득만, 임흥길의 말투를 흉내 낸다.
‘대머리’ 아라비안 해였지라. 에어 에젝터 부식 때문에 해수가 스며들었을 때 아닌가벼. 참 다행이었지라. 우연찮게 표류하던 배가 폭풍우를 만났으면 어떻게 됐겠어, 야? 참 그땐 날씨가 ‘용했다’니까.
‘대머리’ 최득만의 그 흉내말을 듣자 빙긋 웃음을 피우는 우현태, 흥미에 이끌리는 듯···.
우현태 (뱉어내는 혼자 말) 음, ‘용했다’!? 그것, 날씨에 관한 야릇한 표현 이 재미있군!
‘발설자’ (뒤돌아보고 ‘대머리’에게 묻는) 무슨 이야기인데 사설이 그렇게
길어?
‘대머리’ 아, 아라비안 해 날씨 이야기요.
‘발설자’에게 곁눈질을 은근히 띄우는 우현태. ‘대머리’ 곁으로 다가서며 한 마디 더 걸칠 듯한 ‘발설자’, 그러나 그새 웬 묵연한 표정을 짓는다.
우현태 (조경욱에게 눈짓하듯 낮게 터뜨리는) (E)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써 참견 잘하는 그의 본심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 모르겠군.
S# 19. 선미루 갑판
선미건물 권양기 쪽으로 조르르 미끄러지듯 뛰어드는 임흥길, 권양기 드럼 앞에 별안간 붙어 서고 있는 그는 선속과 물살의 탄력 때문에 큰 짐 덩이가 팽팽히 끌리는 트롤링 낚싯줄을 잡아당기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듯 맹랑하게 소리친다.
임흥길 이야, 그 악질 물고긴가비어! ‘흠흠', 참말이시 묵직하당께로! 머신 가 큰 기시··· 물어버렸당께로!
신바람이 들린 듯 그 특유의 코웃음을 섞은 임흥길, 온몸으로 연출하는 ‘역발산’과 거의 흡사한 몸짓이다. 악의 없는 어릿광대 놀이에 웃음꽃을 피우는 부원들, 어쩌면 한 순간 긴장감 속에 싸여드는 눈빛들.
그와 동시 거둬져 버린 부원들의 웃음꽃. 한 순간, 연기에 몰두하다가 역시 낚싯줄을 놓자마자 시치미를 뚝 떼듯 권양기 드럼 앞에 우뚝 버텨 선 임흥길. 그런 그의 동작과 함께 일제히 통로 쪽으로 던져지는 부원들의 시선.
S# 20. 인서트
기관실 출입구에서 막 선미루 갑판 쪽 무대 위로 잽싼 걸음을 옮기듯 등장하는 ‘역발산’.
큰 키에다 믿음직하게 쩍 벌어진 어깨로 ‘역발산’그 힘을 자랑할 만큼 강인한 체력의 그가 바다 위로 시선을 던지면서 기름기 묻은 얼굴의 땀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고 선미루 갑판 쪽 부원들 곁으로 쫓아들자 긴박할 때의 그의 버릇이듯 거푸 입술을 달싹인다.
‘역발산' 무엇이··· '물어, 물었어!?'
그에게 그러나 암시를 주는 '털보', 고개를 내저으며 임흥길의 장난기를 알린다. 겨우 어색한 주변의 낌새를 챈 ‘역발산’, 분연히 서둘러대는 자신의 행동을 멈춘다.
그제야 ‘역발산', 임흥길의 연기 때문에 속임수를 당했음을 알지만 개의치 않는 그저 저기압에 묻힌 시무룩한 표정이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우현태, 언뜻 곁의 조경욱에게 말을 걸고 있다.
우현태 그것 때문에 꼬투리를 잡아 누구에게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힐 그가 아 니죠.
조경욱 (침묵)
‘발설자’ (대번에 누구에게 꾸짖어 소리치는) 이야, 정신 차려! 이게 무슨 넋 나간 광대처럼 낚시놀이 짓거리야!
돌연, 무엇 때문인가? 정적이 감도는 부원들의 주변···.
우현태 (지켜보는 혼자 말) 도대체 야릇한 분위기는 ‘발설자’의 직설적인 성격과 알지 못할 그의 처신이다.
‘역발산' (당혹감에 싸이다가 이윽고 투덜거리는) 흠흠, 미치겠네. 내 가··· 그걸 한 마리 잡아내야만 하니까!
우현태 (코웃음 치듯 뱉는) 조경욱 씨, 이것 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요?! 늘 그 정신박약자처럼···.
조경욱 글쎄요. 재밌군요.
S# 21. 같은 곳
홀연 장승처럼 버티고 선 ‘역발산’, 침묵어린 그의 눈빛은 안개 서린 부연 바다 저편을 건너다보는 듯···. 그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며 다시 높이는 목소리···.
‘발설자’ (소리치듯) 어릿광대 앞에 버티고 선 광대잖아. 이야, 몸서리가 쳐지 지 않아? 몸서리가···.
‘역발산' (영문을 모르듯, 잠시 흘리는 침묵)
그 주변을 둘러보는 부원들의 의아한 눈빛···.
‘발설자’ 실없는 짓은 글쎄, 그만두는 게 좋아. 몇 번 말해서 못 알아차릴 때 는 그걸 내가 기어이 걷어치울 테니까. 이봐, 난 자네가 어떤 짓을 하는 건지 빤히 알고 있단 말이야!
‘역발산' (울컥 토해내는 목소리) 흠, 뭐요? 왕은 죽었던가요. 선장도 왕이 아 니라면 누가 왕이죠?!
‘발설자’ 무엇이라? 여기서 왕을 찾아!
하지만 ‘역발산’, 금세 붉어진 구릿빛 얼굴로 언제 나타난 망령처럼 덧붙이는 빠른 말투.
‘역발산' 흠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고독의 바람을 불어넣는 마귀 할머니··· 이 바다 속에서든 어디서든 아주 가면을 덮어쓴 간 악한 무리들이 너무도 많아!
그러고는 주변의 부원들을 휘둘러보는 ‘역발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그러는 ‘역발산’을 재미있게 지켜보는 부원들.
‘역발산’ (둘러보며) 어이, 불쌍한 놈은 누구지? 야, ‘험한 풍랑 속에서 목 숨을 잃어봤자 하늘같은 양반이 뱃놈들을 상놈처럼 대한다니까, 흠. 제길, 뱃놈이 뱃놈을 잡아먹을 수야 없는 거지, 흠흠.
‘발설자’ (거침없이 쏟아내는 ‘역발산’의 독백 끝에 벌컥 화를 내는) 그만 해! 어디서 황금과 출세에 눈 먼 작자들만 보아왔군! 그들의 선심 은 깡그리 잊어버리고서···.
‘역발산’ (잠시 듣고 있는)
‘발설자’ 도대체가 ‘분수’도 없는 거야! 말해두지만 그 ‘분별’까지 없으 면 그자는 누구보다 먼저 멸망하기 십상이란 말이야!
‘역발산’ (질세라 거칠게 토해내는) 옳습죠! 흠, 누군가는 휴식시간에 독서 왕 아닌가요? 정말 ‘미치지’ 않기 위해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 던 것과 같죠! 이젠 흥미진진한 취미생활이 돼버렸으니까···.
‘발설자’ 이야, 이제 그만 두지 못해!?
‘역발산’ (그러나 개의치 않는) 흠흠, 선주가 ’시마바람’ 삼각파에 죽은 뱃 놈은 제사도 안 지낸다고 한다던데··· 흠흠, 재주를 곰이 부리 고 돈은 누군가 먹는 판에, 겨우 과업 외 시간에 물고기쯤 잡지 말 란 법 없지 않소! 그렇지, 기껏 ‘잔인하게’ 잡아내야 되는 게요!
‘발설자’ 이야, 실없는 소린 아예 그만두는 게 좋겠어!
‘역발산’ 쳇, ‘알바코’ 같아도 톤당 몇 백 불은 문제없다니까. 거대한 놈 한 마리를 잡기만 해보라지.
‘발설자’ 흥, 웃기는군.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역발산’ 멋있게 땅을 밟으며 한잔마저 걸치겠죠. 먼지가 남은 호주머니에 깨 끗한 지폐가 들어올 땐 바싹 마른 놈들은 재지도 못해, 흠흠.
‘발설자’ 젠장, 여기가 어디 물고기 낚시하는 곳이야?
‘역발산’ 보아하니, 여긴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슬픈 일이지. 저인망 할 것 없이 그물을 죄다 쳐 피라미 새끼까지 싹 끌어간 모양이야!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거푸 횡설수설하는 ‘역발산’에게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는 부원들의 하얀 이가 안개 사이로 부시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발설자’ (비꼬듯 쏘아붙이는 불긋하게 물든 얼굴빛) 여기가 상선이란 것을 분명히 알아둬야만 돼! 그렇지 않아?
‘역발산’ 그렇죠, 그거야 인정해요!
‘발설자’ 아, 이 사람 봐.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물고기를 잡으려면 좀 똑똑히 잡아먹어야 될 게 아닌가?
‘역발산’ 다만, 어선을 타러 간다는 게 너무 늦어졌을 뿐이죠. 포경선 같은 것을 말씀이오!
‘발설자’ 자네가 기관장님 말씀대로라면 ‘모비딕크’라도 잡으러 나서야 한단 말인가?
‘역발산’ 흠, 식인 상어! 그렇겠죠, 그건 큰 놈일수록 더욱 훌륭하죠, 흠흠.
‘발설자’ 흥. ‘백상아리’라도 먼저 잡아 보라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몇몇 부원들, 입 언저리에 누구를 향해선지 피어 날리는 쓴웃음.
어처구니없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동안, 누구 때문인가 아니꼽게 거슬린 ‘역발산’의 눈썹에 어둔 그림자가 서린다.
‘역발산’ (격한 목소리로) 속없는 친구들, 비웃지 말라죠! 종횡무진 뛰어다니 는 악질 물고기들이 비웃고 있어! 흠, 뜻이 있으면 그놈들을 잡아 내야지.
‘발설자’ 뭐라고? 흉내를 내고 싶으면 곧은 낚시를 던지던 도사 강태공씨 같 아도 차라리 괜찮다는 말인가?!. 뭐야?!
‘역발산’ 옳습죠. (주변에 버티고 있는 부원들을 내다보며) 상선에서는 스피드 가 10노트쯤이면 돼. 중량급은 좀 어렵긴 하지만···, 수심 50미터 이하의 깊이로 잠수판을 띄워서 루어(Lure)를 끌기만 하면 돼.
‘발설자’ 잠수판?
‘역발산’ 그래요. 물고기가 잠수판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들 테니 까 말이요. 어때? 잘만 하면 혼마구로라도 잡을 땐 이건 좋은 수확 이야.
그러면서 연거푸 혼자서 중얼거리듯 뱉어내는 ‘역발산’, 그리고 그런 그를 웃음을 날리며 지켜보는 부원들.
‘역발산’ 그래 ‘밀수’를 하지 않고 세관원에게 ‘개밥’인가··· 그 접대 비 같은 비싼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될 깨끗한 수입이지. 밀수꾼 일기원 어디 갔어? 골통이 빈 친구들이 많아서··· 이것, 보통 일 은 아니야.
그러는 ‘역발산’에게 웃음을 날리며 물끄러미 지켜보는 부원들···.
‘역발산’ 휴식시간에도 놀며 먹을 수 없는 게 부원들이야. 흠흠, 1년이면 유급 휴가가 25일, 10년이면 250일, 20년을 한 결 같이 배를 탄다 하여도 2년도 채 안 되는 제집 찾아드는 것밖에 없는 땅 밟기야···.
어느덧 어리둥절한 얼굴빛의 부원들··· 그들은 거의 모두 누가 가장 바보인지 모르는 표정들이다.
심일섭 (코웃음 치듯) 흥, 맹랑한 부업론이군.
그러고 보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듯 허무한 기분에 젖은 부원들로서, 그들은 ‘역발산’의 어깨 위로 펼쳐진 난바다를 번갈아 넘겨다보듯 마냥 우울해져가는 표정들이다.
‘발설자’ (숫제 상대가 달갑지 않게만 내다보는) 어쨌든 ‘도깨비’야. ‘미 쳤어’, ‘미쳐’···.
우현태 (언뜻 조경욱에게 혼자 말로 던지는) 글쎄. 짜릿한 웬 예언처럼 들리 는군. (그러다가 혼잣소리를 높이며) 아니, 다분히 비하의 그런 말은 막연히 씹는 욕지거리 같잖아요.
조경욱 그렇겠죠. 설복 당하지 않을 상대방에게 비탄에 젖어버린 역설적인 질책 아닐까요?!
S# 22. 같은 곳
프로펠러에서 바다를 휘덮듯 들려오는 세찬 물결과 그 소음···.
E 쏴···.
···
마치 폭포수가 하류하는 소음 속으로 휘감겨 드는 두 부원의 논쟁, 들으며 마냥 허무한 기분인가 저편의 바다 위로 시선을 던지는 우현태.
S# 23. 인서트
왼편 손목에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 던지는 우현태의 시선. 오후 5시가 지난 시침과 분침, 움직이는 초침.
S# 24.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천지호
그 위로 내다보이는 선미루 갑판 쪽에는 2층 높이 건물의 기관실 지붕, 그리고 아름드리의 연돌···, 역시 선미 뒤와 그 주변에 날고 있는 몇 마리인가의 갈매기들.
우현태 (조경욱을 돌아보며) 벌써 저녁 식사시간이군. 우린 먼저 식당으로 들어가요.
발걸음을 옮기는 우현태, 뒤따르는 조경욱.
우현 통로를 돌아, 구름다리 쪽으로 걸어 나서는 우현태와 조경욱. 주갑판 위 길이 10여 미터의 구름다리를 건넌 맞은 편 시야에는 낮은 다층 건물의 선교가 가로막고 있다.
언뜻 구름다리 밑 주갑판 쪽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E 철썩!
···
동시에 주갑판 위로 널브러지는 파도의 물결.
E 스르르···
선체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주갑판에서 형성된 맑은 물결, 배수구 쪽으로 미끄러지다가 떨어져 내린다.
E 쿨쿨쿨···
···
한 길 남짓 높이의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2미터쯤의 파고다. 그 바다 위, 일렁거리는 물결을 주갑판 위 구름다리에서 저만치 넘겨다보면서 선교 1층 식당으로 걸어나서는 몇몇 부원들, 여기저기 비친다.
S# 25. 선교 건물 그 주변
부감. 어둠살 덮이는 바다 위로 하얀 페인트칠로 말끔히 도장돼 있는 천지호의 선교. 비치는 그곳 1층 건물에서 식사를 끝내고, 선미건물을 내다보며 구름다리를 건너는 우현태.
그때, 선미건물 쪽에서 들려오는 부원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아직 겨울철이 가시지 않은 바다 위, 차가운 바람결에 실린다.
우현태 (E) 대개 항해 중 하루의 과업을 마치고 식사를 끝낸 무료한 시간, 식 곤증을 달래듯 선미루 갑판에 몰려나와 휴식을 즐기는 그들이다.
잠시 그들에게 귀를 던져 둔 우현태.
E 말소리에 꼬리를 잇는 너털웃음소리···.
···
갖은 잡담을 늘어놓으며 더욱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리는 부원들이다.
우현태 (E) 물론 이 시간 그들의 어울림은 그 장소야 일정하지 않을 테지 만 어느 선박에서나 통상적인 일일 테다.
선미루 갑판 위로 내다보이는 부원들···.
우현태 (E) 유동하는 선체 위에서 그들은 하루 8시간 중노동과 다름없는 과업과 당직에 시달리면서 때때로 인생을 설계하듯 꿈을 피우는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마냥 향수에 젖어서 수평선 멀 리 바라보며 마치 철인(哲人)처럼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곳에서 또한 그 누군가는 권양기 드럼에 감겨 수적(水跡) 위로 팽팽히 끌리는 트롤링 낚싯줄에 시선을 던져둔 채 바다를 지키고 섰는가 하면 그 주변에서 유보를 즐기듯 어슬렁거리는 몇몇인가의 부원들.
S# 26. 선미루 갑판
우현 통로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현태. 앞쪽으로 예닐곱 부원들이 눈길에 얹힌다.
바람결에 날리는 그들의 말소리, 이어서 막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우현태의 머리 위, 쳐다보면 비치는 불혹의 조리장.
백만복 훗훗···. 고사야, 고사! 오늘밤엔 수고했으니까 모두 축제의 기분 속에서 한잔씩 하시라구!
백만복, 보일러 연돌 뒤편 그의 침실로부터 댓 걸음 걸어 나온 층계의 난간 위에 팔꿈치로 기댄 채, 드러내는 누런 금니. 그리고 선미루 갑판 위에서 백만복을 처다보며 귀를 기울이는 부원들···.
백만복 어이, ‘역발산’. 소식이 무소식인가, 그래? 오늘은 해신(海神) 앞에 절을 올려야 되지 않겠어! 자네 ‘오야봉’ 기관장님 말씀이야. 고사 때마다 주기관 앞에서 정성을 들여 용왕님만큼은 잘 모시던데···.
난간에 양팔을 걸친 채 어깨를 구부러뜨려 흡사 목이 짧게 보이는 곱사등 모습의 자세를 취한 백만복, 그에게 동갑내기 ‘역발산’의 힘을 가진 자가 받아치는 목소리.
‘역발산' 고사는 웬 놈의 살을 찌우는 고사야? 제기랄, 선주가 부원들에게 도 크에서 수고했다는 사례라면 흠, 피라미들을 좀 봐줘서 상륙할 때 차라리 지폐로 나눠 주라지, 흠흠.
백만복 젠장. 맙소사다!
‘역발산’ 뭐야! 제길, 그게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백만복 뭐, 자네 거마비 때문인가?
‘역발산’ 그렇겠지. 외지수당이 있으니까 당연히 내지수당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흠흠···.
백만복 호주머니에 먼지만 날리는 주제에 상륙은 무슨···. 배 안에 가만 히 틀어 박혀 물고기나 잡을 일이지.
‘역발산’ 이봐, 기름 냄새만 맡으란 말인가? 가련한 것··· 그래, 그렇다 치 자. 그런데 누굴 닮아 가기에 오늘은 부식이 또 그 모양이야, 흠흠?
백만복 오늘은 잔소리가 비교적 많아졌어! 이야, 물고기나 큰놈을 잡아내라 구. 요리솜씨를 그땐 푸짐히 발휘할 테니까 말이야!
‘역발산’ 똑 같은 속셈의 도둑놈! 이건 너 주려고 잡는 물고기가 결코 아니잖 아, 흠.
백만복 훗훗, 웃기지 마! 너무 흥분하지도 말고 묵묵히 물고기를 잡고만 있 는 편이 훨씬 보기가 좋아! 그래, 그 악질 놈인가를···.
주거니 받거니 그들이 서로 신랄한 농담을 걸치는 동안 저쪽에서 다른 부원의 말소리가 끼어든다.
‘대머리’ 고사는 몇 시에 지내지요?
뚱뚱한 체격에다 별로 고사가 달갑지 않은 말투의 자못 경건하게 벗겨진 ‘대머리’다. 그에게 다시 터뜨리는 넉넉하면서 유들유들한 목소리, 이어진다.
백만복 야식 시간, 밤 여덟 시라네!
S# 27. 같은 곳
비치는 부원들의 흥겨운 얼굴빛···. 그들 가운데 한 잔 술을 기대하는 김대영 펌프수, 느긋한 그의 감탄조 목소리가 화제를 돌린다.
펌프수 어이, 저기 노을 한 번 그럴듯하게 핀다!
동시에, 시선을 옮겨가는 주변의 부원들···.
S# 28. 인서트
바다 위의 전경이다. 저편의 하늘 쪽 붉은 태양이 대륙의 등성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맞은편, 수평선 위로 물들어 있는 노을의 어둠, 주변을 가리고 있다. 마치 그 노을의 어둠은 지구의 원둘레가 길어져 있는 듯 광활한 하늘 아래로 펼쳐진 납빛이다.
S# 29. 같은 곳
시야를 가린 엷은 운무, 그 너머 바다와 하늘에는 거무스레한 어둠의 빛이 깔린다. 그 어둠의 현상을 둘러보는 몇몇 부원들의 시선들.
우현태 (조경욱에게 시선을 주며) 갈매기가 벌써 눈에 띄지 않는군요.
조경욱 ···.
우현태 아마 어둠살이 몰려들기 전 깃을 찾아 저 멀리 날아가 버린 거겠죠.
조경욱 (노을이 물들고 있는 하늘 밑으로 던져진 시선)
S# 30. 같은 곳
우현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조경욱 곁에서 노을의 건넌 편을 내다보는 듯···.
그때, 그들 곁에서 터뜨리는 감흥을 섞은 누군가의 목소리, 우현태의 귓바퀴를 스친다.
임흥길 필시 저긴 천국 같당께! 막 호숫가에 천사들이 날개를 펴 날아들고 있지라우!
우현태 내다보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하얀 솜덩이 구름에 싸여 펼쳐져 있는 노을.
광막한 어느 설야(雪野)와 같은 그곳은 한가운데로 티 없이 맑은 쪽빛 하늘이 바다 위로 나지막이 떠 청명한 호수 그대로 비쳐있다.
그 노을이 물든 황홀한 전경에 그지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누군가가 또다시 맞장구치는 목소리.
펌프수 이야, 정말 그렇게 보이잖아!
임흥길의 곁에서 농지거리처럼 감탄하며 다시 덧붙이는 한 부원, 그는 그러나 이십 대 후반 그 또래의 일갑원이다.
권달수 거기서 천사들이 나체 바람으로 헤엄을 치고 있잖아, 헤엄을···.
그와 동시, 짧게 치는 부원들의 갖은 코웃음 소리. 그 속에서 꼬투리를 잡고 일어나는 겨자라도 먹은 목소리···.
박수도 불순하게 그 또 무슨 소리야? 어디까지나 천사는 천사요! 나체가 뭐 요? 상스럽게···. 차라리 ‘목욕하는 천사’가 어때? 보다 더 고 운 말로 표현합시다!
권달수 (투덜거리는) 이런, 문자 쓰며 웅변하고 있네! 저 친구에게 농담 한 번 못한다니까!
박수도 그래서 뱃놈이라 매도당하는 거요. 다른 좋은 말 얼마든지 있잖아.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고 그려둔 어느 화가의 그림 같다’, 라고 토 를 단다면 훨씬 듣기 좋을 텐데···.
우현태 (귀를 기울여 둔 채) (E) 음, 하긴 ‘목욕하는 천사’그럴 듯한 인상 파 화가들의 소리 같군.
그러면서 우현태, 말장난을 즐기는 젊고 발랄한 부원들에게 시선을 던진다.
우현태 (덧붙이는 혼잣소리) 그야, 흥미를 끈 노을의 경관이다. 그들의 인상적 인 느낌과 그 채근이든 어떠하랴.
S# 31. 인서트
신비스런 진홍빛 노을, 그 빛살은 마치 여인의 정염처럼 진하게 타오르면서 그 아래로는 호젓한 호숫가와 같은 전경이다. 어두우면서 밝은 색상 등등으로 그려둔 형상은 한 폭의 수채화다.
S# 32. 매혹된 부원들의 눈빛
그런 자연의 조화를 시끌시끌한 말소리 가운데 지켜보는 여러 부원들의 흥미로운 시선들···. 그렇듯 우현태 또한 투영되는 빛살에 정녕 매혹되는 눈빛이다.
역시 20대 후반 나이만큼 별다른 진귀한 느낌이야 없겠지만 그 빛을 일러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그들의 표정이다. 차라리 해상경력이 이미 풋내기는 지난 30대 중반의 펌프수에게 어떤 견해라도 듣고 싶은 눈빛의 우현태, 그러자 언뜻 펌프수를 불러 높이는 천진스런 목소리, 이어낸다.
우현태 김씨, 불타는 빛살이 참 아름답군요! 저런 노을을 무슨 빛깔이라 불러 야 좋죠? 어떤 색상인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펌프수 (서슴없이 대답하는) 황혼의 빛이야!
우현태 잉!? (잠시 떠올린 혼자 생각) 동문서답이다! 황혼의 나이가 아직은 아 닐 텐데···? (목소리를 터트리며) 역시 내 질문은 천진한 호기 심만 조장하는 것뿐입니다.
김대영 펌프수의 입술에 빚어진 훤한 웃음을 바라보는 우현태, 곧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는 얼굴빛을 하고···.
우현태 황혼의 빛’?! 웬 늘그막 참에··· 역시 멋있는 표현이네요.
펌프수 (다시 한 번 그 노을을 그윽이 내다보다가 말꼬리를 잇는) 그렇지, 노을의 빛. 황혼의 빛이지. 왜 어디가 별다른 표현이 따로 있나요?
우현태 (싱긋 웃음을 머금고 말을 잇는) 황혼의 빛. 그것 왠지··· 의미심 장한 소리로만 들렸으니까요.
펌프수 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요. 다만 그 빛에는 향수가 어려 있는 거니까. 글쎄, ‘인생(人生)’은 저 빛을 닮을 때까지···. 끝없는 방황만이 있을 뿐이요.
우현태 (그 뜻을 음미하는) 무슨 싯귀를 읊조리는 상징성의 은근한 표현입니 다.
누군가 불쑥 곁에서 뱉어내듯 거들고 나온 또 다른 목소리···.
‘역발산’ 끝없는 방황? 아니야, 인생은 숫제 모험인 거야. 그렇지, 바다 위에서 그것을 우리가 시도하고 즐겨야만 해!
우현태 (느끼며) (E) 어쩌면 펌프수처럼 정녕 어떤 모험가가 무슨 시의 운을 따서 읊조리는 듯한 소리 같다. 그러나 ‘역발산', 그의 시선 은···?!
분명 노을 쪽 아닌 트롤링 낚싯줄에 줄곧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그런대로 침묵을 지키는 ‘역발산’에게 우연태, 말문을 터뜨린다.
우현태 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주제를 빠뜨려 둔 것 같다고요? 무 엇보다 ‘잔인하다’는 것 말씀이오. (언뜻 심일섭 통신사를 떠올리 는) 아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요?!
‘역발산’ (서슴없이 뱉어내는) 그렇겠죠. (어금니를 잘게 씹어대며) 그걸 기껏 사랑할 만큼 간과해야지. 병균을 옮기는 바퀴벌레 같은 놈을 구둣발 로 짓밟아버릴 때처럼, 흠흠.
우현태 (웅얼거리듯 뱉는) 다만 터뜨려진 콧방귀 소리는 분명 한 음절 높아져 서 귓속에 박혀드는군. (확연하게 깨칠 수 없는 표정, 그러다가 소리 높여 발음하는) 무슨 이야기의 주제 같군요.
‘역발산’ 그걸 알았다면 괜스레 왜 물어오우? 저길 보라우. 제길, 거대한 놈이 물어줘야 할 텐데···. 언제 물지는 내가 모른다니까, 흠흠.
S# 33. 인서트
바다 위 저편에 펼쳐져 붉게 타들어 가는 노을빛, 점점 짙어지는 해 그림자 속에 사위어져 가고···.
S# 34. 해거름이 더욱 어둡게 드리워진 고물 쪽
바닷물을 뒤엎는 프로펠러, 고적한 진동음을 동반한 채 세차게 물결을 밀어내는 소음, 우렁차다.
E 쏴···!
···
그러는 동안,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듯한 부원들 O.L. 어느덧 텅 빈 듯 짙은 어둠살이 덮인 선미루 갑판···. 현 통로에서 그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소용돌이치는 너울성 파도 위로 뻗치는 프로펠러의 규칙적인 박동과 그 소음···, 언제나처럼 은은히 울린다.
그 위로 구불텅구불텅 한 번씩 크게 뒹굴어대며 덮치는 파도의 너울···. 그와 동시 프로펠러에서 소용돌이치는 물결이 선미루 갑판을 뒤흔드는 진동음.
E 우르렁, 우르렁···!
···
어둠 속, 항진하는 천지호 선미 뒤로 거친 파도를 가르고 밀어내는 폭포수 같은 거센 물결의 소음···, 기관장 집무실 안으로 뻗힌다.
S# 35. 기관장 집무실
널찍한 공간을 차지한 실내, 데스크 건넌 벤치에 앉아 있는 머리카락 희끗한 환갑을 바라보는 한상오 기관장, 흰 마스크를 끼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빛이다.
그 앞에 거의 부동자세로 버텨선 우현태, 잠시 침묵을 지키는 기관장과 함께 어딘가 귀를 기울인다.
S# 36. 천지호 주갑판
기관장 집무실 바깥으로 귀를 기울이면, 파도가 어둠살 짙게 덮인 주갑판 위로 덮치는 소음.
E 철썩···!
다소 방음 장치된 기관장의 집무실에 들려오는 파도소리, 동시에 기관장실 선창에 반사되는 빛살.
E 쏴···!
···
파도의 소음은 선창 바깥에서 멀어지듯 사라지면서 일순 선미 뒤로 구불텅, 구불텅거리는 너울에 묻힌다. 그러고는 프로펠러에 휘감기고 있는 파도의 소음, 비등하는 바다 위로 뻗친다.
S# 37. 동 기관장 집무실
주갑판 위로 사뭇 귀를 던져 둔 우현태, 그 앞에서 흰 마스크를 낀 한상오, 그 역시 어디론가 귀를 기울이듯 다함께 신경을 곤두세운다.
E 츠얼썩···!
···
간격을 두고 더욱 크게 선체에 부딪치는 파도의 소음···. 그와 동시 가까스로 뱉어지는 말소리.
우현태 파도가 심상치 않군요.
한상오 (약간 눈웃음 짓는) 음, 낮에 좀 일찍 서둘러 고사를 지냈어야 됐을 텐 데···.
우현태 고사···?! 밤 8시 야식 시간, 너무 늦은 시간이었죠.
한상오 ‘폭풍 주의보’가 벌써부터 내려 있었던 모양이야.
우현태 아, 그 동안··· 저기압의 중심권에 들어서기 전에 꽤 잔잔했던 파도 였군요.
한상오 글쎄, 폭풍전야였지···.
S# 38. 같은 곳
파도를 타고 크게 요동치는 있는 천지호의 선체, 그 순간 선실을 진동하는 굉음···.
E 우르렁···!
···
선실 바깥 파성(波聲) 속으로 아득히 귀를 새우는 우현태와 한상오.
S# 39. 인서트
선체에 거세게 부딪치는 파도, 다시 크게 울렁이는 외판의 진동과 더불어 실내로 뻗히는 그 모든 소란스런 소음, 육감적으로 아까보다 다른 혼잡한 불안감을 일으킨다.
S# 40. 동 기관장 집무실
어디론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우현태, 가까스로 입술을 떨어 붙이듯 발음한다.
우현태 잠시 나가봐야 되겠습니다!
한상오 잠깐···. 노천에 방치된 윤활유 드럼들이 걱정되는가? 괜찮아. 지금 일기사가 ‘발설자’,‘역발산’과 함께 다시 묶고 있을 테니까.
우현태 (약간 긴장감을 푸는) 아, 그랬었군요.
한상오 자, 우리도 황천준비를 해야지. 우선 자넨 나와 함께 기관실과 보일러 실을 둘러보면서 작업 후 공구와 같은 것도 모두 제 자리에 놓였는지 살펴둬야만 되겠어.
우현태 네, 알겠습니다.
하얀 빛 벽면에 걸린 원형의 벽시계를 쳐다보는 한상오의 눈빛, 시계는 1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바로 그 시각···.
E 선체에 부딪치면서 물보라를 크게 흩뿌리는 파도, 동시에 그 물보라를 덮어쓴 누군가가 외치는 웬 아스라한 경고성의 목소리.
···
주갑판 위, 거의 한 길이 넘는 높이의 구름다리에서, 기관장 집무실 안으로 뻗치는 경고성, 그것은 밀폐된 기관장실 공간 바깥에서 연거푸 일어나는 파성과 그 위로 다시금 이어지는 웬 고함소리···.
E 역시 귀를 기울여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경고성 목소리다.
···
그와 동시, 물보라를 덮어쓴 채 달려드는 발걸음 소리···.
E 투닥투닥···!
···
구름다리의 바닥철판을 밟고 뛰어드는 뜀박질··· 그 위로 연이어 누군가를 덮쳐 버리는 파도의 소음···.
E 쏴···!
동시에 이어지는 선체의 진동과 뇌쇄적인 그 소음···.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그 모든 소음에 이어져 기관장실에 몰아들이는 선체의 동요와 떨어 붙이는 진동···.
E 우르렁···!
···
그 틈바구니 속에 구름다리를 건너오는 발걸음 소리, 누군가 파도의 비말을 덮어쓴 채···, 어둠속으로 휩싸여 사위어지면 이내 기관장 집무실로 들어서는 통로에서 동작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기관장실 도어 바깥에서 멈추는 발걸음 소리, 쉬이 기척이 일어나기 전의 침묵···.
S# 41. 노크 소리
기관장 집무실 바깥에서 안으로 뻗치는 노크 소리···. 그 음향은 다급하게 도어를 두드리는 울림이다.
E 다닥 닥···!
···
신경을 곤두세운 우현태, 그리고 침잠한 한상오의 얼굴빛.
우현태 (E) 이 밤, 무례하게 누구일까···?!
한상오 ···.
의아한 한상오의 눈빛, 그 앞에서 귀를 기울인 채 긴장하는 우현태의 표정.
S# 42. 동 기관장 집무실(초분 경과)
저항 없이 열리는 도어, 시커먼 덩치를 앞세운 누군가의 그림자, 그 뒤로···. 시끄럽게 더불어 들이는 기관실의 소음, 그리고 바다 위 억수로 흩어지는 빗소리.
E 쏴르르···!
···
S# 43. 더불어 들이는 그림자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 위로 조용히 닫히는 도어. 누구인가의 그림자를 더불어 들이듯 집무실로 한 발짝 더 들어서는 육신, 세일러 우의를 걸친 의젓하고 큰 체구다.
박쥐모양의 검은빛 모자를 목뒤로 벗어젖히면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빛, 정지승 일항사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가 한상오 기관장 앞으로 다가서자 한 순간 뚱딴지처럼 가쁜 숨길을 들이쉬며 웬 침묵을 자아낸다.
동시에,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엄습한 실내···. 그 속에서 유난히도 또렷이 들리는 빗물, 떨어지는 소리.
E 또똑···!
똑···
우의자락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그 소리에 이어 검 초록빛 바닥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
E 주르륵···!
그 순간 실내로 몰아들이는 전율적인 정적···. 그 속에서 뒤흔들리는 투박한 목소리···. 더불어 비치는 일항사의 침통한 표정.
정지승 기관장님. 그, 큰 일 났습니다! (거리낌 없이 입을 여는)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농무에다 조류가 최고 6노트까지 나고 있는데, 이 것··· 레이더 고장입니다! 무엇보다 본선은 남 서해에서 가장 조류 가 센 맹골수도를 통과직전입니다!
우현태 (E) 아, 배가 향방을 잃고 있다. (흘리는 신음소리) 정말 큰일이다!
떨리는 우현태의 파리한 입술···.
정지승 더욱이 기상마저 악화된 바다 위, 여기저기 무수한 섬들이 솟아나 있는 리아스식 해안의 다도해··· 거기서 빠져나와 곧 맹골수도를 통과직전 위험한 협수로입니다.
당혹감이 역력한, 흰 마스크를 낀 한상오 기관장의 충혈된 눈빛. 그 앞에서 겨운 숨길을 돌리는 정지승.
그 위로 거친 파도 소리, 울려드는 실내.
E 쓰아!
주갑판 위로 덮치고 지나는 파도···
동시에 더 높은 파도 소리 울리는 바깥 상황을 내다보듯 잠시 귀를 던지는 세 부원들···.
S# 43. 같은 곳(초분 경과)
언뜻 침묵을 깨뜨리는 마스크 속의 목소리···.
한상오 (갑갑한 듯) 알았네. 그 외 전달사항은? 뭘 더 보고할 게 있는가?
정지승 (겨우 침착성을 되찾는) 네, 레이더는 지금 통신장과 함께 수리 중입니다만···. 현재의 속력은 9노트로써 본선 위치가 확인되는 대로 선장께서 넓은 바다로 진로를 변침할 것 같습니다. 계속 전속 현 상태로 주기관 회전수 90을 유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S# 44. 같은 곳
E 기관실에서 울려오는 왕복동 주기관의 소음.
···
그 순간, 소음 속으로 진동하는 선체와 더불어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상오, 그리고 정지승과 우현태.
E 쿵, 쿵, 쿵···.
거친 파도를 가르고 있는 천지호, 프로펠러와 연결된 주기관의 박동음. 이어서
바깥에서 크게 선체의 외판에 부딪치는 파도.
E 츠얼썩!
실내에 더욱 거칠게 뻗치는 파도소리와 동시에···.
E 퍽···!
밤빛을 받고 있는 선창에 거푸 파도가 부딪치는 소음.
그와 동시, 폭우처럼 산산이 부서져 깜깜한 어둠속으로 새하얗게 내리는 비말과 그 빛살.
그 순간, 요란한 진동을 일으키고 주춤주춤 동요하는 선체···!
E 우르릉, 우르릉!
부하에 걸려든 주기관과 더불어 프로펠러에서 일어나는 소음.
넋 잃은 듯이 선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디론가 쫓기는 한상오 기관장···, 데스크 위에 손을 얹으며 육척의 신장을 세우고 비틀비틀 일어난다.
한상오 이기사!
우현태 ···.
얼떨결 기관장을 주시하는 우현태···. 손아귀에 한 움큼 상대방을 집어넣을 듯 깊은 흡인력의 기관장 눈빛.
한상오 일단, 우린 기관실로 내려가세!
우현태 네···!
S# 45. 같은 곳
머리 위로 고막을 찢을 듯 뒤흔들리는 기적소리···!
E 뿌웅!
···
E 뿌웅···!
우현태 (외치듯) 아, 충돌예방 무중신호다!
E 뿌웅!
···
거푸 이어지는 장음의 기적소리, 시끄럽게 지붕 위 보일러 연돌 쪽에서 울려 야음 속으로 흐느끼듯 퍼져나간다.
E 뿌웅!
···
급히 도어를 열어 제치는 한상오, 그 뒤를 좇아 뛰어나가는 정지승과 우현태.
S# 46. 우현 통로
해치 도어(hatch door)를 열어 제치며 기관실 안쪽으로 들어서는 한상오.
하지만 그와 반대방향의 선교 쪽 현 통로로 내닫는 정지승, 그리고 뒤쫓는 발걸음을 통로에서 잠시 멈추는 우현태, 어둠 속 저만치 구름다리 쪽으로 사라져가는 정지승의 등 뒤에서 우두커니 배웅하듯 던지는 걱정스러운 시선.
우현태 (웅얼거리는 입속 말) 왜? 평소 그답지 않게 당혹해 있었을까?!
그새 발걸음을 구름다리 위로 멈춘 정지승, 한 길 아래 쪽 주갑판 위에서 그 동안 윤활유 드럼을 고박 중이었던 세 부원들을 내다보는 듯···.
정지승 (어렴풋이 비치는 그들에게 소리치는) 어이! 일기사. 괜찮아요?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박해 둬야만 될 것 같습니다!
S# 47. 어둠 속 주갑판 위
파도의 비말이 날리는 곳으로 십여 개의 육중한 무게의 윤활유 드럼들, 곁에서 작업을 중단하고 멀거니 구름다리 위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성윤기 일기사, 그 외 ‘발설자’ 조기장과 ‘역발산’ 기고수의 좀은 의아스런 표정들.
이윽고 구름다리 위로 분주히 건너가는 정지승 일항사. 어둠 속 그의 장도를 못내 지켜보는 우현태의 시선.
우현태 (E) 작업 중의 안전은 물론, 본선의 항운(航運)을 위하여 어떤 대상 에게 왠지 간절히 빌고만 싶군.
그렇듯 지순한 무의식적 기도를 올렸던지 모를 우현태의 표정··· 그리고 한 순간, 정녕 기도가 이뤄졌을지 모를 반신반의에 찬 생각 속의 우현태, 마치 얼뜬 자화상처럼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주변을 얼핏 더듬어 보는 듯···.
우현태 (일순 떠올린 환영을 그리듯) (E) 물론 그 어떤 음흉한 정체가 저 파도 빛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언뜻 들여다보이는 머릿속 어둠의 기억. 그와 동시, 비치듯 스치는 시야의 건넌 편, 우중에 뿔 돋친 도깨비 같은 희미한 환영들···.
얼른 그 형체를 뿌리듯 머리를 흔드는.
우현태 (뱉어내는) 아, 중추신경을 오싹하게 자극하는군!
(떠올려진 잔영을 뿌리듯) 모호한 어떤 대상인지 모를 그림자···, 그런 형체는 파도 빛을 덮어쓴 채 마치 빗줄기 속에서 희번덕이듯···, 흔들린다.
우현태 (뱉어내는) 순간적인 그런 반사체는 조소를 띄워 악희를 즐기는 듯 의도적인 바람을 넉넉히 저버린 한 변절자 같은 하얀 이빨을 드러 낸 존재다!
그러고서 곧 기관장을 쫓아 기관실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간다.
우현태 (다시 뱉어내는) 그렇겠지. 어떤 기도보다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게 더 좋은 방법이다. 변태적인 변절자···!? (그러다가 어둠의 환영 을 확인하듯 투덜거리는) 설마 기관사고까지야 겹치지는 않겠지.
S# 48. 기관실 입구 선회식 계단
스산한 훈기가 널찍한 기관실 상층 공간 속에 서려 있는 층계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현태.
E 고막을 멍멍하게 틀어막는 주기관을 비롯한 각종 기기의 소음···.
그 속으로 귀를 기울이는 우현태, 약간 안정감을 되찾는 표정.
우현태 (흥얼거리는) 그럴 테지···. 선령 23년, 천지호. 워낙 이름도 높은 노후선인 만큼 어련하겠지.
하지만 자위할 수 없는 표정, 짓는 우현태, 골똘한 생각에 묻혀 후끈한 열기를 품고 있는 주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