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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뭐...뭐라구요? 돌아갈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구요?"

뜻밖의 사고로 400여년전의 명나라로 타임워프를 한 임서은, 그런 그녀에게 염라대왕은 한가지 제의를 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 모든것은 그녀의 전생이 저지른 일, 전생이 저지른 일은 후생이 수습해야 하는게 명부의 원칙이라고?

더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요동으로 갈것이다. 이여백, 누르하치, 이성량, 만력황제...기다려. 명나라 요동의 역사는 내가 고쳐쓸터이니!

담대하고 지혜로운 그녀의 좌충우돌 요동 정벌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그녀와 그의 사랑과 갈등도 지금 시작되는데....

 
상봉
작성일 : 19-10-15 03:43     조회 : 24     추천 : 0     분량 : 2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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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그렇게도 티났나."

 

 서은은 침상에 멍하니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궐안에 더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염라대왕의 충고도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천기를 누설한다면, 구경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금까지 확신은 없었지만 뭔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만력과의 대화를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저는 오라버니의 동복 여동생 서안입니다. 어찌 갑자기 제가 누구냐고 물으시옵니까."

 "넌, 서안이 아니다."

 

 그녀가 차분히 대답했음에도, 만력의 눈길은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보는 듯 형형한 빛을 뿜었다.

 

 "짐이 아는 서안은 유연하진 않지만 강하지도 못한 아이었다. 서안이 딱 한번 짐에게 맞섰을 때가 바로 비상을 삼키던 그때였다. 서안은 이렇게 당돌한 태도로 짐과 얘기한적 없었고, 나라 정사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제가 비상을 삼켰습니다. 오라버니."

 

 서은은 또렷한 어조로 만력의 말을 받았다. 이쯤에서 흔들릴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전생인 서안공주의 성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만력의 말을 부인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아무리 어째도 현대인의 뛰어난 적응력으로 이미 이곳에 무탈하게 머물러 있었던 것을.

 

 "어차피 한번 버린 목숨입니다. 그런 저였으니 그 어떤 변화라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는 황궁을 떠나 요동까지 갔고 여러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힘과 변화를, 오라버니께서 어찌 다 아실수 있겠습니까. 지금 오라버니 앞에 있는 서안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연약한 성정을 버리고 진정 제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만력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게 보였다. 그는 여전히 의혹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일별한 후 말없이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만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서안이 외람되오나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력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그의 뒤로 다가섰다.

 

 "오라버니께서 생각하시는 정치란…무엇입니까."

 

 만력은 그녀를 돌아보며 피씩 냉소를 지어보였다.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더냐."

 "성인 공자께서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백성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존립할 수 없다)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정치란…바로 백성의 마음을 다스려 그 신뢰를 얻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녀의 말에 만력이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그 뒤를 이었다.

 

 "하오니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먼저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나라의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여 나라와 백성의 일들을 바로잡는 정치는, 권력을 획득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다스려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정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이냐."

 

 만력이 깊숙히 미간을 구겼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뒤의 말을 내뱉었다.

 

 "하여 오라버니께선 그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어쩌면 오라버니께서 고민하시는 게 바로 이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력의 눈에서 한순간 냉혹한 빛이 내비쳤다.

 

 "짐의 적이 되기를 선택한 네게, 구태여 짐의 고민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제가 적이 되는지 아군이 되는지는, 전적으로 오라버니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그녀의 태도에 만력은 또 한번 미간을 구겼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후 한결 의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여백은 오라버니께 있어서 계륵과 같은 존재입니다. 명교 부활 초기에 친정의 대립인물을 제거하는데 그 사람을 이용했었고, 앞으로는 요동의 명장으로서 이용가치도 있으니 분명 지금 팽하기는 아까운 사람일테지요. 하여 오라버니께선 한때 황실의 공주까지 내어주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

 "이번의 그 사람의 상경이 무엇때문인지 알수 없으나 오라버니께서 왜 그를 입궐케 하는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는 제 사심이 들어있긴 하나, 진정 재위시 밝은 정치를 펴보이고 싶은 오라버니의 고민도 알고 있기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네 말이 맞다."

 

 만력은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여백은 죽이기엔 아까운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그 아비인 이성량도 아직 무서운 인물이지. 하지만 짐이 그 후과를 감당하면서도 그들을 제거하려는 이유를 너는 알겠느냐."

 "제거할 이유…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명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것이 그 이유다."

 "충성심…"

 

 서은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로서는 만력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만력은 잠시 뒷짐을 쥐고 방안을 거닐었다.

 

 "명의 봉록을 받는 요동의 장군들은 몇대가 지나도 아직도 그 뿌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성량 역시 예외가 아닐터. 이미 그가 조선은 자신들의 선조의 나라라고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다. 아직은 조선과 사이가 나쁘지 않으나 앞으로 언젠가 그들이 요동을 수복하려고 할 때에는, 요동을 장악하고 있는 이런 장수들이 큰 우환이 되지 않겠느냐. 여진을 견제하는 그들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

 "너는 짐이 단순히 이여백이 짐의 정체를 알아서 해하려 한다고 생각하겠지. 지금 이여백의 태도로 보아 입궐한다 해도 절대 공주를 맞이하라는 성지를 받들지 않을 것이다. 저번에는 장원급제를 독려하는 자리라 참을수 있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하여 짐은 이참에 일을 크게 만들어 이성량에게 죄를 물어 파면시킬 생각이다."

 "..."

 "네가 언감 짐에게 정치를 논하니 내 이렇듯 소상히 일러주는 것이다. 정치란 당면한 현실에 대한 감각이 제일 중요한 것이거늘. 지금 짐이 당면한 현실은 바로 변방의 이런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서은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만력의 걱정이 기인우천(杞人忧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거정이 죽은 후 만력은 척계광(戚繼光,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을 파면했고 이제는 이성량까지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만력이 이런 명장들을 소외한 후과는 어쩌면 명나라의 몰락에 첫발자국을 내디디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임을 그는 알까.

 

 "어마마마께서 왜 정귀비를 싫어하시는지 이젠 이해가 가는군요."

 

 만력은 그녀의 말이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분에 대한 총애가 오라버니의 눈을 이처럼 어둡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오라버니께선 어찌…여진을 견제하는 그들의 역할이 벌써 끝났다 생각하시옵니까."

 

 만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륵성 아타이가 전몰한 다음, 오라버니께선 동북방면에 눈과 귀를 닫아 헤투알라성의 누르하치에 대한 일은 소상히 알지 못하시는가 봅니다."

 "…"

 "타쿠시의 아들,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 대해서 말입니다. 좀전에 말씀 드렸다싶이 고륵성에서 타쿠시는 임종때 원수를 명이라 지목했습니다. 누르하치는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헤투알라성을 기반으로 지금 한창 세력을 늘이는 중인데 정녕 이를 알지 못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만력은 흥 하고 냉소했다.

 

 "짐은 이성량의 상소에 따라 그 아비와 조부의 칙서, 그리고 고륵성에 내주었던 칙서를 누르하치에게 내주었다. 허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작은 추장이라 아직 그렇다할 힘이 있어보이지 않았느니라. 헤트알라성 또한 작고 낡은 성이라 누르하치가 무엇을 어떻게 할수 있다더냐."

 "오라버니께서 지금 누르하치를 경시하시면, 그 후과는 참중하기 이를데 없을 것입니다."

 

 만력이 그녀를 보자 그녀는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누르하치는…효웅입니다. 이성량장군께서 그가 어릴때부터 부중에 거두시고, 무예와 병법을 두루 가르치시어 이미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을 갖춘 인물입니다. 아직은 그 세력이 눈에 띄이지 않으나 그에게는 건주여진을 이끌어 해서여진과 야인여진, 나아가서는 요동 여러 부족을 통합하려는 야망이 있습니다."

 "..."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내리신 교역권인 칙서가 해서여진쪽에 더 많기때문에, 그가 앞으로 힘을 길러 해서여진을 치고 여진족을 통합하는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게 무엇이 나쁘더냐. 그가 몸을 굽혀 명을 섬기고 이성량 대신 요동을 인솔한다면 짐도 나쁠 것 없느니."

 "그건 오라버니께선 그를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옵니다. 누르하치는 야망이 큰 인물이기때문에 절대 명의 신하로 자처하지 않을것입니다. 지금은 일시 몸을 굽히더라도 앞으로는 기필코 세력을 확대하여 중원을 노릴것입니다. 어찌 이런 그가 이성량장군을 대체할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누르하치는 어릴 때부터 삼국지와 손자병법을 정통하여 여진의 호방한 기질과 한족을 대처하는 권모술수까지 능통한 사람입니다. 만일 그를 방비하지 않았다간 그가 힘을 길러 산해관을 밀고 들어오게 되는 날에는..."

 

 서은은 더 말하려다가 얼핏 염라대왕의 경고를 떠올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하오니 요동에서 그를 견제할수 있는 인물은 이성량 부자뿐입니다."

 

 민력의 침묵이 이어졌고 서은은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서안아."

 "오라버니께서 이성량 부자를 비롯한 명에 존속되어있는 여러 민족 장군들을 박대하신다면, 조선 또한 명과의 무역과 여진을 견제하는 일에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며, 여진은 이성량 장군의 감독에서 벗어나 조선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그 힘을 기를 것입니다. 시기가 성숙되면 여진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침범하는 일은 순풍에 돛단 격이 될 것이며 중원은 이를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

 "요동의 앞일이 이처럼 불보듯 뻔한데 어찌 벌써 이성량 부자를 내치려 하십니까. 이족(夷族)의 장점을 배워 그것으로 이족을 제압한다(师夷长技以制夷)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의 성심으로 이런 도리조차 알지 못하신다면 어마마마께선 헛되이 노심초사 하신 것입니다."

 

 그녀의 진심어린 말에 만력의 얼굴색이 어두워 졌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후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마마마께서..."

 "어마마마의 노심초사는, 장재상과의 소문이 아니라 그 소문을 감당하면서까지 오라버니의 친정을 위해 동분서주하신…한 어머니의 노고와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장재상의 죽음으로 멈추십시오, 오라버니...척계광장군의 파면은 조정의 탄핵이 있었다 하나, 이성량장군은 지금껏 공로만 있을뿐 과실은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장재상과 각별히 지냈다 하여 숙청대상이 된다면 장재상에 대한 오라버니의 원한도 너무 큰 것이 아닙니까.하오니 이젠 그 한을 거두어 주십시오...이렇게 부탁드립니다."

 "..."

 "단지 이성량장군 부자를 위해 드리는 부탁이 아닙니다. 서안은 진심으로 오라버니께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가슴속에 이렇듯 한을 품는다면 어찌 삶이 행복할수 있겠습니까."

 

 방안은 물뿌린 듯 조용했고 만력은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뒤이어 자신을 향하는 그녀의 청정한 시선을 마주한 채, 만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의 노고와 희생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

 "..."

 "그럴진데 짐의 동복 동생인 너는, 짐을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할 생각이 없는 것이냐."

 

 그녀는 만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만력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그 뒷말을 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다스리는 방법에, 네가 할 일이 있다면 도와줄수 있겠느냐."

 

 ……

 

 만력이 그녀의 침소를 나가자 그녀는 긴장이 풀려 침상에 주저앉았다. 주먹을 펴보니 어느새 손에 땀이 흥건히 배어있었다. 만력 앞에서 아무리 의연한척 했어도 그녀는 대명제국의 황제에게 엄청난 도발을 하게 된셈이다. 처음엔 이여백을 구하려는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요동 장군에 대한 만력의 불신의 태도가 그녀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가만히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본인도 후세사람들이 고려천자, 조선황제라고 불렀었는데 그걸 알면 아마 억이 막혀 펄쩍 뛸 걸..."

 

 그녀는 잠시 기운을 차린 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로 그때 령이가 한아름 무언가를 안고 허둥지둥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를 발견한 령이는 얼굴에 불안한 기색을 띈채 그녀를 향해 급히 몸을 굽혔다.

 

 "공주님…폐하께서…"

 "양심전(養心殿,황제의 대신 접견 공간과 일상 집무 공간)으로 부르시더냐."

 "어찌 아셨습니까. 궁복을 갖추었으니 속히 채비를 하시고 양심전으로 거동하시옵소서."

 

 령이가 안고 있던 것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명나라 공주의 대례복이 서은의 앞에 하나씩 펼쳐졌다. 그녀는 령이가 해주는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틀어올리고 겹겹히 대례복을 갖춰 입었다. 머리카락은 운계(云髻)모양으로 올리고 양쪽 귀밑머리를 살짝 내리드리우자 령이가 서둘러 얼굴 화장을 도왔다.

 

 "어찌 이렇게 아름다우실수가…폐하께서 달리 이뻐해주셨겠습니까."

 

 경대를 들여다보며 령이가 극찬했지만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응대도 하지 않았다. 령이는 그래도 미타한듯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문밖으로 나가서 화분에 피어있는 홍매화 한가지를 가위로 잘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서은의 운계에 정히 꽂아준 후에 비로소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둬걸음 물러섰다.

 

 "이제야 완벽하십니다. 청정하면서도 화려한 홍매화가 고귀한 공주님의 기품과 꼭 어울리십니다."

 

 령이의 들뜬 반응과는 반대로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긴장감이 내비쳤다.

 

 "령아…오라버니께서 양심전에 혼자 계신다 하더냐."

 "예복을 갖추어 오시라는 어명이셨으니 필시 중요한 자리인줄 아옵니다. 혼자는 아니실 겁니다. 아마 공주님께서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그 자리가 아닐런지요."

 

 령이는 그녀의 긴장이 무엇때문인지 짐작간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작게 숨을 불어 내쉰 후 령이의 부축을 받으며 처소를 나섰다. 양심전이 가까워 오자 그녀는 또 한번 심호흡을 했고, 태감(太監)이 그녀의 입전을 알리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서안공주 납시오..."

 "들어가시와요. 공주님..."

 

 령이가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양심전 서난각의 문턱을 넘으며 그녀는 떨리는 손을 소매안으로 감추었다. 전각안으로 들어서자 삽시에 서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휩쌌다. 그녀는 보지 않고서도 그 서늘한 눈빛의 임자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한걸음...두걸음...용좌가 가까워 올수록, 그리고 용좌앞의 훤칠한 인영이 가까워 올수록...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듯 한 기분에 그녀는 머리를 들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용좌에 앉아있는 만력에게 만복을 했다.

 

 "서안이…오라버니를 뵙고 문안 드립니다."

 

 만력의 목소리가 위엄있게 들려왔다.

 

 "예를 거두거라."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태감이 그녀를 용좌옆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권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머리를 들수 있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는 있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그만 박동을 한박자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 잠시 안개벽이 어렸다. 하지만 눈앞의 준수한 남자가 허리를 굽혀오자, 그녀는 이를 옥물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소인 서안공주님을 뵙고 문안인사 드립니다."

 "어허…한동안 각별히 지낸 사이 치고 인사가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전에 만력이 비꼬았다. 이여백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땐 소인은 공주님인줄 모르고 무례를 범하였으나, 자고로 모르고 행한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세간의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폐하께서 이마저도 용납 못하실런지요."

 "방자하다!"

 

 만력이 버럭 소리지르자 서은은 급히 머리를 들었다. 만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오라버니…고정하시옵소서. 이 모든것은 서안의 과실입니다. 이분와는 상관이 없으니 부디 용안을 흐리지 마시옵소서."

 "흥."

 

 만력은 용좌에서 일어나 이여백의 앞으로 다가갔다.

 

 "짐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겠다. 오늘 공주까지 대면해서 다시 거론하는 것이니…짐이 너를 입궐케 한 것이 무엇때문인지 네 정녕 모르겠느냐?"

 

 이여백은 냉정한 표정으로 만력을 바라보았다.

 

 "성은이 망극하오나 소인은 성음을 따를수 없습니다."

 "뭣이?"

 "불미한 소인에겐 그 어떤 자리도 부당한줄 아뢰옵니다. 그것이 강호의 자리든 황실의 자리든...하오니 부디 어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서은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에 혹시나 했지만 역시 그의 마음은 냉혹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이번에도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상경한 이유가 자신이었기를 한번도 바란적이 없었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었다. 만력이 발을 굴렀다.

 

 "무엇이라! 뭐가 부당하단 말이냐? 서안은 태후마마께서 가장 아끼는 공주였고 짐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동생이거늘."

 "소인 불경한 죄를 달갑게 받겠습니다."

 "불경? 이는 분명 능지처참할 죄렷다! 아니 구족을 멸할 죄렷다!"

 

 만력이 대성질호하자 이여백은 여전히 의연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벌이든 내리십시오. 누군가에게 죄를 덮씌우는 일이 제일 쉬운 자리에 앉아계시는 폐하가 아닙니까."

 

 그의 야유를 알아들은 만력의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그래...더 말하거라.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혀를 함부로 놀린 죄까지, 짐이 필히 용서치 않겠다."

 "오라버니!"

 

 서은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급히 계하로 내려서서 만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부디…고정하시옵소서."

 "서안아, 아직도 저놈 편을 드는거냐. 저놈이 어떻게 매정하게 구는지를 네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더냐."

 "서안이 불충하오나 감히 오라버니께 청을 들겠사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이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짐은 참으로 알수 없노라."

 

 만력은 노기띈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비상을 삼키고, 검상을 입고, 요동을 전전하고, 황궁을 탈출하려 들고…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이런놈때문에 네가 지금껏 제정신이더냐. 대체 전생에 무슨 빚을 졌기에 네가 이렇게 네 자신을 허타이 군단 말이냐…"

 "전생이 아니라 금생, 다음생…그 다음생이라도 오로지 이 사람뿐입니다. 하오니 제발 이 사람...보내주십시오."

 

 그녀의 애절한 말에 이여백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곧 무표정으로 위장한 얼굴이 그것을 대체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만력의 얼굴에도 차츰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잠시후 그는 손을 내리면서 거칠게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당장 서안공주를 냉궁으로 끌어내거라."

 

 ......

 

 양심전에서 침소로 돌아온 서은과 령이에게 미처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건청궁 태감들이 들이닥쳤다.

 

 "황명이요, 서안공주는 오늘 이 시각부터 처소를 편전인 문화전(文华殿) 서각으로 옮기시라는 명이십니다."

 "문화전 서각이라니요?"

 

 령이가 급히 머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못믿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께선 정녕 공주님을…냉궁으로 내치시는 것입니까."

 "그곳 서고에 있는 서책분류를 책임지고 자숙하시랍니다. 다른 궁인은 일절 따라가지 말고 령이만 데려가십시오."

 

 태감은 딱딱하게 말을 끝내자 바로 문밖에 나가 그들을 기다렸다. 령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서은을 쳐다보았다.

 

 "공주님, 폐하께서 이번엔 정말로 진노하셨습니다. 양심전에서 공주님은 어찌 그분 편만 드셨습니까."

 "그럴수밖에 없었다."

 

 서은은 담담한 표정이였고 령이는 벌떡 일어서서 문밖으로 향했다.

 

 "소인 이길로 폐하께 청을 드리겠사옵니다. 아직 옥체가 완쾌치 않은 공주님께 문화전 서각이라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당장 돌아오지 못할까."

 

 서은은 조용히 말했다. 어조는 담담하였으나 전에없는 위엄이 차넘쳤다. 령이는 화뜰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서은은 예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후 운계를 내리고 금봉을 뽑았다. 령이가 다가와서 그녀를 거들었다.

 

 "공주님…정녕 문화전으로 가실 요량이십니까. 문화전 서각은 자금성에서 제일 외진 처소입니다. 그리 비좁고 누추한 곳에 가셔서 어이 견디신단 말씀입니까."

 "몸 뉘일 곳은 있겠지."

 "그곳은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궁녀가 청소 도구들을 넣어두고 피곤하면 잠깐 쉬던 곳입니다…기억나시는지 모르겠지만 공주님께서 전에 보화전에 절 끌고 가셨을때 지나친적 있는 그 작은 반칸짜리 처소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그곳으로 공주님을 보내신단 말입니까."

 "황명이다. 뉘 감히 황명을 거스른다더냐."

 

 서은은 무심히 대꾸한후 처소를 나섰다. 령이는 급히 이부자리를 안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문밖에 서있던 태감이 안내하는대로 여러 누각을 에돌아 가자, 양심전보다 현란한 문화전의 편액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화려한 문화전의 서쪽에는 얼핏 보아서는 전혀 눈에 띄이지 않는, 고작 두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고 나머지 벽은 옆의 건물에 잇닿아있는 허름한 작은 처소가 있었다. 태감이 그들을 그리로 안내했다. 처소를 바라보는 서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자금성 반칸 방…"

 

 현대에서 H대에 온 그 이듬해, 그녀는 윤아와 자금성 관광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자금성 안내원에게서 들었던 그 유명한 구천구백구십구칸반의 이야기가 지금 그녀의 머리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안내원의 해설에 의하면, 하늘의 옥황상제에게는 만칸의 방이 있었고, 하늘의 아들인 천자는 감히 상제와 똑같은 수의 방을 가질수 없어서 자금성을 지을 때 반칸을 줄였다고 한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자리잡은 일상들을 떠올리며, 서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전혀 없구나."

 "변할게 있을리 만무하잖습니까. 고작 일년이 지났는데요."

 

 령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안 구석구석에는 거미줄이 얼기설기 쳐있었고,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침상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령이는 눈앞의 정경에 혀를 차더니 바로 팔을 거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서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방안의 음침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령아, 좀 춥구나."

 "공주님…여기는 원래 이런 곳이옵니다. 음달진 곳이여서 해가 잘 들어오지 않으며 어린 궁녀들은 가끔 밤중에 여기서 귀신을 봤다고도…"

 

 령이는 여기까지 말하다 문득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서은은 그녀를 돌아보며 피씩 미소를 지었다.

 

 "난 무서워하지 않으니 말해도 무방하다. 어떤 귀신을 봤다고 하느냐."

 "소인이 말실수를 하였사옵니다."

 "무서워하지 않으니 말해보거라."

 

 그녀가 재삼 재촉하자 령이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누가 보았는데 선대 황제들을 모시던 궁녀들과 환관들이 가끔 줄을 지어 여기를 지나다닌다 하옵니다."

 

 령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히 말하다가 스스로도 무서운지 오싹 몸을 움츠렸다. 서은은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근거로 선대 황제들을 모시던 궁녀들이라 하느냐. 지금 궁녀들일수도 있지 않느냐."

 "공주님은 모르시옵니다. 선대 황제들을 모시던 궁녀들의 의복은 지금과 많은 차이가 있사옵니다. 궁중의 의복 뿐만아니라 머리양식도 많이 달라져있는데 어찌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겠습니까."

 

 령이의 말에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건 귀신이 아니다."

 "공주님이…어떻게 아시옵니까."

 "음...일단 자세히 보거라. 자금성 벽이 무슨 색상이냐."

 "홍색이옵니다."

 "그래. 붉은색이지."

 

 그녀는 차분하게 령이에게 설명했다.

 

 "붉은색 벽에 들어있는 원소 때문에 비가 오고 번개가 치면 감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기의 작용으로 홍색 벽이 영사막처럼 그때 당시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의 모습을 남길수 있지. 몇십년, 지어 몇백년이 지나도 가끔 번개치는 밤이 되면 여기 이 벽은 그때 그 영상을 투영해서 그대로 보여줄수도 있어.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기때문에 영상을 보고 귀신을 봤다고 하는 것이다. 이건 자연현상이지 절대 귀신이 아니다."

 

 그녀는 더 말하려다가 령이의 망연한 기색을 보고 그만 말을 중단했다. 령이는 일손을 멈추고 한참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저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겠사옵니다. 혹여 지나친 상심끝에 옥체에 큰 병이라도 얻으셨사옵니까."

 "…"

 

 서은이 침묵하자 령이는 급히 머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공주님, 소인은 다만 공주님께서 하도 괴이한 말씀을 하시기에…"

 "…"

 "한가지만은 확실합니다. 귀신을 봤다던 그 시각이 꼭 비가 오고 번개가 치는 한밤중이더이다. 영상인지 감전인지 공주님의 말씀도 일리가 없지는 않사옵니다."

 

 령이가 급히 덧붙이는 수습에 서은은 픽 냉소했다.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중점은 다 알아들었군."

 

 그녀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령이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갸웃했다.

 

 "공주님, 한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냐."

 "공주님께선 어찌 그리 초연하실수 있사옵니까. 폐하께서 저리 무정하시온데 공주님은 전혀 슬프지 않으시옵니까. 그토록 호화로운 처소를 마다하고 이리로 오시어 한낱 귀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는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신 겁니까."

 "때가 되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서은은 담담하게 웃은후 고개를 들어 구멍 뚫린 천정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면 저기가 새겠구나. 내가 청소할테니 넌 가서 저기를 막을 낡은 옷가지들이나 몇벌 가져오거라."

 "금지옥엽인 공주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하신다고 그러십니까. 이것만 마치고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좀 지나면 등불도 켜야 하니까요. 하오나 잠시후 날이 저물면 공주님 혼자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귀신도 무섭지 않거늘 고작 밤이 두렵겠느냐."

 

 서은의 당찬 말에 령이는 싱긋 웃으며 처소를 나섰다.

 

 ……

 

 두렵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였다.

 

 령이가 옷을 가지러 간후 곧 숨막힐 듯한 정적이 서은을 포위했다.

 

 처음에는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궁궐안의 등불들이 미약하게 비쳐오고 있어서 시야 확보는 그런대로 되었다. 다만 어둠이 깃들자 낮보다 더 음산한 기운이 그녀를 덮쳤고, 그녀는 대충 정리한 침상에 몸을 웅크린채 두 팔로 어깨를 바싹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문밖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쯤일까. 만력을 알현하러 온 조정 대신들이 퇴궐하는 시간은.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침상을 내려 처소밖으로 나섰다. 령이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차츰 초조한 기색이 내비쳤다.

 

 "허사였을까."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막지 못한 천정의 구멍으로 총총한 별빛이 새어들어왔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끼익…소리와 함께 방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녀가 방을 들어오면서 미처 닫아두지 않았던 방문이었다. 그녀는 화뜰 놀라 뒤로 돌아섰다. 어둠속에서 훤칠한 인영이 바로 자신의 뒤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입을 벌려 소리를 내려는 순간 귀에 익숙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쉿,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허사가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상, 그녀가 애썼던 모든 일들은 허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눈앞의 인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그의 옷자락이 닿아서야 그녀는 비로소 실감이 나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형님...?"

 "그래, 나야."

 

 어둠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에 양심전에서 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리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가 자신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안도감이 몰려왔다.

 

 "여긴 어떻게…"

 "어찌 그리 바보같은 일을..."

 

 둘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뒷말을 삼켜버린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 비슷한 한숨이 섞였다. 그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잠시후 그가 내민 손이 그녀의 어깨에 와 닿았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그대로 묵묵히 서있었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어서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다행이 그의 손길은 더이상 그녀의 어깨에 머물지 않고 바로 거두어 졌다. 대신 담담하게 내뱉는 듯한 한마디가 그 행동을 대체했다.

 

 "몸은…다 나았느냐?"

 "보시다싶이…죽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보이지도 않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눈앞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도, 그냥 흐릿한 인영만 보이는데도 그녀의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이것이었다.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그를 기다렸던 자신의 마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속에서 그의 유려한 얼굴 윤곽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 또렷하게 안겨왔다. 예의 그 완벽한 얼굴선은 달빛을 빌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어찌…상경하셨습니까."

 

 그는 침묵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때문에…오신 건…”

 

 그녀의 눈빛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그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궁에 볼일이 있었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벽에 비쳐주고 있었다. 그 그림자를 그인양 노려보면서, 그녀 역시 쌀쌀하게 말했다.

 

 "그럼 여기는…왜 오셨습니까. 설마 형님께서 황궁의 이 문화전에도 볼일이 있진 않겠지요."

 "…"

 "저는 혼자였군요…처음부터…"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체 어떤 철석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그녀가 이토록 노력해도 반응하지 않는 걸까. 새삼 염라대왕이 원망스러웠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또 하필 그 사람의 마음을 가져야 현대로 돌아갈수 있다니...다시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는 비장한 결심이라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이젠…포기하겠습니다."

 "…"

 "사실 저…또한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어려운가 봅니다…이젠…당신 마음 같은 건…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연모하는 일이...이토록 어려운 일일줄은…심지어 죽기보다 더 어려운 것일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그러니 이젠…포기해야겠습니다..."

 

 문득 설음이 북받쳐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가 왔다는 사실에 긴장한 탓인가...아니면 어젯밤부터 거의 한잠도 자지 못해서인가...머리속이 윙 하고 울리며 그녀는 몸을 휘청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

 

 그녀는 잠시 현훈증을 느끼며 맥없이 그의 품속에 끌려갔다. 하늘땅이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몸은 솜처럼 나른해져서 땅으로 잦아드는 듯 했다. 하지만 귀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만은 가려들을 수 있었다.

 

 "여긴…당신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그의 이 한마디는, 그녀의 지난 몇개월의 노고를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땀에 흥건히 젖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니 절 따라 가시겠습니까…공주마마."

 

 ......

 

 “따라…가다니요?”

 

 서은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천천히 되뇌였다. 그녀의 눈길이 잠깐 허공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의 표정을 확인할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진지한 그의 얼굴이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어디로, 어떻게요…”

 

 여전히 공허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너무 뜻밖이어서 이런 말밖에 할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석달의 시간이 서로의 오해와 장벽을 허물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던가. 아니면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아서 이렇듯 사람이 바뀔수도 있는 것일까. 그가 그녀의 귀전에 속삭였다.

 

 “날 따라 요동으로 가시겠습니까. 황궁의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형님…”

 “아까 양심전에서 말한 것처럼…부마는 안됩니다. 아니, 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일이지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널뛰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이상 당신을 힘들게 할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문틈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들어와, 그녀의 잠시 뜨거웠던 머리를 식혔다.

 

 “아, 그러면 저를…좋아해서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 동정해서 데려가는 것입니까.”

 

 싸늘한 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도 차갑게 변했다. 그를 기다려 온 것이, 결국은 이런 대답이었단 말인가.

 

 그녀는 입꼬리를 들어올려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더니.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공주라는 신분…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의혹이 담겼고,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오면 형님께서는…제가 형님을 따라간다면…어마마마와 황실에 대한 원한을 버리시겠습니까.”

 

 그녀의 눈길이 그를 주시하자,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다른 건 또 무엇입니까. 먼저 조건을 내어건 쪽은 형님입니다."

 "부마가 되지 않는다 하여 조건을 내건 것이..."

 “그러면 저도 대답하리다. 저는 비록 공주라는 신분을 초개같이 버릴수는 있지만, 이 신분을 적의로 대하는 형님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옥같은 얼굴을 마주한 채, 그가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저희 두 집안이...어떤 사연인지 저는 잘 모르지만 형님께서는 잘 아실테지요. 그런 원한을 눌러둔 채로…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고맙웠습니다. 하지만…저를 바라보는 마음에 그 원한을 담아둔 채, 그래서 저를 보면 고통스러워할 형님의 마음을 저는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도 안타까워졌다. 하지만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금세 표정을 거두고 냉랭한 얼굴이 되었다.

 

 “이만 퇴궐하시지요. 궐에 이목이 많아 걱정입니다. 령이가 곧 돌아올 것이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어디까지 안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그녀는 허한 미소로 답했다.

 

 "글쎄요. 형님께서 황실과 어마마마에 대한 원한이 크다는 정도만요."

 “내일밤 축시, 자금성 동화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느닷없는 말에 그녀는 눈을 올롱하게 치켜 떴다.

 

 “저는 분명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한을 내려놓으라면서요. 내일밤 동화문에 오면, 그 원한...내려놓을수도 있을텐데.”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딘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크다란 환희가 그 불안감을 대체했다.

 

 “정말…이십니까.”

 “약조하겠습니다.”

 “형님께서 하시는 약조라면...무조건 믿겠습니다.”

 

 그녀는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그를 재촉했다.

 

 “어서 퇴궐하십시오. 내일 방법을 대어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고 문가를 향해 돌아섰다. 바로 그때 그녀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가 잠시 주춤하는게 느껴졌고, 그녀는 그의 등에 깊숙히 얼굴을 묻었다.

 

 “몸 조심하십시오.”

 

 그가 손을 올려 자신의 허리를 감은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의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렸다.

 

 “이대로 날 따라가면…부귀도, 영화도, 공주라는 신분도…다 잃게 될터인데.”

 “그거 아십니까...애초에 요동에 갈 때부터…서안공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요한 방안에는 두 사람의 낮은 숨소리만 들렸다. 서로의 오가는 숨결을 들으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가지만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

 “앞으로…제가 없더라도…슬퍼하지 마세요.”

 

 그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이것이었던가…줄곧 그녀의 머리속을 휘젓고 있는 그 불안감이. 결국은 그의 마음을 얻어 현대에 돌아가야 하는 사실 때문에 그토록 불안했을까…

 

 그동안 오매불망 기다리던 현대로 돌아가는 일이, 지금의 자신에겐 이토록 슬픈 일이 되었던 것을. 염라대왕은 왜 하필 이런 잔인한 과제를 자신에게 내주었을까.

 

 바로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이여백은 그녀의 손을 다독인 후 그녀의 팔을 풀었다. 뒤이어 인영이 언뜰하더니 그는 어느새 문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잠깐 마음을 추스리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 한 사람이 문을 등지고 표연히 서있었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명랑한 어조로 그 사람에게 말했다.

 

 “고육계(苦肉计)가 성공하였습니다. 오라버니.”

 

 뒷짐을 지고 서있던 그 사람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뒤로 몇발자국 물러섰다.

 

 ……

 

 “그동안 잘 지냈느냐.”

 

 소름 끼칠듯한 미소. 달빛아래 완연히 드러난 그 모습에 서은은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뒷짐을 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만력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왜 망각하고 있었을까. 어쩐지 불안하다 싶었다. 자금성내의 음침한 구석이라 자유로이 출몰 가능할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지금 이 시각만큼은 그의 출현이 이토록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염라대왕!”

 “나를 잊진 않았구나.”

 

 염라대왕의 싸늘한 눈길이 그녀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

 

 “헌데 왜 그리 놀라느냐.”

 “아닙니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었고, 염라대왕은 둬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하구나.”

 “…”

 “네가 돌아가는 일도 거의 해결된 듯 하고.”

 

 그녀는 시선을 들어 염라대왕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방금전의 공포 대신 한가닥 기대를 담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궁금했던 것들을, 이참에 물어볼 용기가 생겼다.

 

 “대왕님...왜 하필 접니까.”

 “그 이유는 이미 말했을텐데, 너는 지금 네 전생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그러면…왜 하필 저 사람입니까. 만일 제가 저 사람의 마음을 얻어 돌아간다면…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그건…그 사람의 죄값이다.”

 “무엇때문에 치르는 죄값입니까!”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자, 염라대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답을 알고싶으냐.”

 “…”

 “명부에서 정하는 제일 큰 죄목이 뭔지 아느냐.”

 “…”

 “바로 네 전생인 서안공주처럼, 자신의 목숨을 허타이 구는 일이다. 자결로 생을 마감한 영혼은 명부에서 제일 골칫거리로 생각하지.”

 

 염라대왕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결…”

 “그래…바로 자결이다. 명부에 정해진 생사부가 있는데, 항상 그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엮인 모든 운명의 선들이 흐트러지고, 명부는 그에 대한 새로운 인연망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지 너희 같은 세인들이 어찌 다 안단 말이냐.”

 “자결이 제일 큰 죄라 하심은…그리고 저 사람도 죄값을 치른다면…설마...설마 저 사람도 자결을 한 것입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염라대왕이 코웃음으로 답했다.

 

 “아직 이여백의 결말에 대해서도 모른단 말이냐.”

 

 염라대왕이 소매를 뒤적이자 곧 한권의 서책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그는 서책을 펼쳐들고 들여다보았다.

 

 "이여백, 요동 철령위 출신, 명장 이성량의 차자. 철령위도지휘검사, 요동부총병직 역임, 만력 16년 탄핵을 받은후 병으로 1차 사퇴. 임진왜란시 조선으로 출병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우고 다찌바나 가문의 명장 오노 나리유키를 쏘아죽인 공으로 부도독으로 승진. 귀국후 녕하도독으로 승진후 병으로 2차 사퇴. 그후 은둔을 하다가 요동이 위기에 이르자 다시 출사하였으나 사르후전역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 천계 원년 부중에서 자결."

 

 그녀는 믿을수 없다는 눈길로 염라대왕을 보았다.

 

 “왜…왜 자결한 거죠?”

 “명부에서 어찌 그것까지 장악하겠느냐.”

 

 염라대왕은 퉁명스레 대답한 후 서책을 갈무리했다.

 

 “천기를 누설하면 안되는 것이나, 네가 하도 반발이 심하니 이렇게 알려주는 것이다.”

 “저는…저 사람은 무탈할줄 알았어요.”

 

 그녀는 공허한 시선으로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행여 내가 떠난다 해도, 다시 좋은 사람 만나서 그렇게 지내다…은둔을 하고 천수를 누릴 거라 생각했는데…왜…왜 자결인가요…”

 “명부에서 네 궁금증까지 해소해주어야 하겠느냐.”

 

 염라대왕의 시까스르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생사를 주관하는 명부에서, 그 이유를 모른다니 말이 안돼요.”

 “안다고 치자. 명부에서 왜 그런 사소한 인간사까지 관여하겠느냐.”

 

 염라대왕은 저으기 짜증섞인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시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만일…만일 말이죠.”

 “…”

 “제가…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염라대왕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혹시…말인데…저 여기서…그냥 살순 없는 건가요? 현대의 수를 버리고, 여기서 이대로 살면 안되는 건가요?”

 “명부에서 정한 명수다. 어찌 멋대로 행하려 드느냐.”

 “제 전생인 서안공주도 그러지 않았나요? 2년이란 삶이 더 있었지만 기꺼이 버렸잖아요. 저의 현대 삶의 기한이 얼마인지 모르지만…그것을 포기하고라도 여기 남게 해주면 안되는 건가요?”

 

 그녀의 간청 비슷한 말에, 염라대왕은 쌀쌀하게 웃었다.

 

 “인간이란 이래서 안돼. 항상 말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하지. 어찌 명수를 거스르고 네 욕심만 채우려 하느냐.”

 “제 감정이...욕심으로 보이는 건가요.”

 

 염라대왕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어찌 욕심이 아니더냐. 본디 사람의 감정이란, 생사와 관련될 때는 무색하기 그지없지. 이 세상 그 누구도 목숨과 맞바꾸는 사랑은 하지 않는다. 너 또한 단순히 네 감정에 대한 욕심때문에 나한테 떼를 쓰고 있는 게 아니냐.”

 “그렇게 멋대로 단정짓지 마세요.”

 

 염라대왕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한결 쌀쌀해졌다.

 

 "명부에서 아무리 생사를 주관한다 하나, 인간의 감정까지 좌우지 하진 못할테지요. 사람 감정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구요? 자청비와 문도령, 양산백과 축영대, 로미오와 쥴리엣까지...고금중외의 생사를 초월한 이런 감정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지어낸 건가요?"

 

 염라대왕은 시끄럽다는 듯 소매를 떨쳤다.

 

 “내가 왜 하필 구구히 너와 무의미한 설전을 하고있느냐. 한가지만 명심하거라. 만일 천기를 누설해서 일에 낭패를 본다면, 설령 생사의 소관이 명부에 있다 해도 내가 널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염라대왕이 몸을 돌리자, 그녀는 그를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께요.”

 “…”

 “만일 천기를 누설하면…전 어떻게 되나요.”

 

 염라대왕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지옥 먼 끝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같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염라대왕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그 어느때보다 집요했다.

 

 “말씀해주세요. 줄곧 궁금했던 일이에요. 천기를 누설하면 그 후과가 어떻게 되는지…솔직하게 알려주세요.”

 “천기를 누설하면, 죽는다.”

 

 염라대왕의 간단한 한마디에 그녀는 침묵했다. 잠시후 그녀의 입꼬리가 서글피 올라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천기를 누설하면 운명이 바뀌어 궤도를 달리할수도 있으니, 분명 명부에서는 이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사색에 잠겨있는 사이 지옥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듯한 싸늘한 바람이 그녀의 눈앞에 일었다. 다시 눈을 들어보니 염라대왕은 그 바람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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