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 입은 모습이 낯설어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대니는 화장실에 들어온 남자가 시온이란 걸 눈치챘다. 그는 리그에서 꽤 유명한 선수였다. 매치 데이 매거진에서 꼽은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팀 선수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골 게터(goal getter). 주력이 좋아 역습에 요긴하고 양발을 모두 잘 써 풀백들을 곤혹스럽게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그를 알기 전까지 대니에게 ‘대한민국’은 미지의 나라였다. 지리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하니, 비로소 “아, 거기!” 소리가 나왔다.
한국인인 시온과 서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하는 여자. 그녀 역시 한국인일 게 자명했다.
“What’s your name? Why did you sneak in here?”
(이름이 뭐야. 여긴 왜 기어들어 왔어?)
대니의 시선이 정원의 가슴에 가닿았다. 그가 정원의 어깨를 흔들 때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출입카드도 같이 대롱거렸다. 카드에 선명히 박힌 아랍계 남성의 사진. 아무리 봐도 정원과 동일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막연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You……!”
(너……!)
정원은 대니와 시온을 한 자리에 오래 둬서 좋을 게 없단 판단을 내렸다. 시온은 영어에 능통하니 대니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터였다. 정원은 홱 몸을 돌려 시온에게 말했다. “날 도와주고 싶다고 했죠?”
시온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호의는 아직 유효했다.
“그럼 달려요. 달리기 하난 자신 있잖아. 뭘 그러고 서 있어요, 가서 사람들 좀 불러오라니까?”
“아아, 알겠어요.” 시온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정말 괜찮겠어요?”
시온은 이해가 안 됐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제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지 않나. 자진해서 술 취한 남자와 단둘이 더 있겠다니, 위험하게. 시온의 우려에도 정원은 씩씩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결국 시온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그의 걸음엔 많은 생각들이 담겼다.
어디에서 봤더라. 이 묘한 기시감은 대체 뭐지. 아니 대체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건데. 도와주겠단 사람한테 왜 끼어드냐니, 어이가 없어서! 물어볼 말이 산더미다. 그녀를 구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다 물어봐야지.
시온을 내보내고, 니킥(knee kick) 한 방에 대니를 제압한 정원은 재빨리 현장에서 벗어났다. 시간이 없었다. 경기에 임할 때만큼 전력으로 달리진 않겠지만, 시온은 리그 내 최고의 스프린터였다. 그가 사람들을 달고 오기 전에 서둘러 일을 끝마쳐야 했다.
라커룸에 잠입한 정원은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자리 앞에 가 섰다. 검정색 백팩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투명 액자 형태의 가방 고리, 그 안에 끼워 넣은 가족 사진. 명실상부 스웨덴 대표팀의 에이스, ‘알렉산더 킨나만’의 자리가 맞다.
정원은 대담하게 그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찾았다. 챙겨간 디바이스를 충전부에 꽂아 해킹을 시도하는데, 지잉, 하고 문자 하나가 왔다.
-내가 다 했어. 거기서 얼른 나와, 걸릴라.-
미성이 보낸 문자였다. 허탈한 웃음이 튀어 나왔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잰걸음으로 경기장을 나서는 정원의 두 눈은 여전히 미성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들어갈 때와 바뀐 게 없었다. 그런 정원의 반대편에서 붉은색 레플리카 유니폼을 챙겨 입은 부자가 허겁지겁 오고 있었다. 경기는 벌써 시작하고 난 후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을 내며 한 계단 한 계단 바삐 올랐다. 아들이 늑장을 부려 경기에 늦은 듯했다. 이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 경기인데, 너 때문에 골 들어가는 거 놓치게 생겼다,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원의 발치에 다홍색 손수건이 떨어졌다. 반복되는 기하학무늬가 미로를 연상케 한다. 추우면 목에 걸라고 남자의 아내가 챙겨 준 것이었다. 서두르느라 목에 맬 겨를이 없었다.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은 게 결국 떨어져 나온 것이다.
손수건을 주워 건네자, 남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맙단 인사를 했다.
“Don’t worry, you didn’t miss anything.”
(걱정 마세요,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으니까.)
“Good. Thanks, again.”
(다행이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번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엷은 미소와 함께 정원은 부자와 헤어졌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부자를 지켜보는 얼굴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오늘 같은 경기는 차라리 놓치는 게 나았을 텐데.
* * *
“벌써 왔어? 내가 한 발 늦었네?”
미성은 양 손에 큼지막한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어디서 장이라도 보고 온 모양새였다.
“한 발 빨랐겠지. 티켓 도둑.”
정원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관에서 팔짱을 낀 채 미성의 뻔뻔한 낯짝을 노려보았다. 남생은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조금 두고 서 있었다.
“걸리면 어쩌려고 그랬어?”
“안 걸렸잖아.”
“농담할 기분 아니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미성은 남생에게 쇼핑백을 건네주고 정원에게 다가갔다. 꼿꼿한 두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부드럽다. “미안해, 제멋대로 해버려서.”
“하나도 안 미안하잖아.”
정원은 그를 잘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아침에 양쪽 부모를 다 잃은 정원 남매를 외삼촌인 청준이 거뒀다. 자연스레 외종사촌인 미성과는 필요 이상의 것을 공유하며 살았다. 그는 다정했고 늘 웃는 얼굴이었고 실없는 농담도 잘했다. 하지만 그건 미성이 가진 얼굴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머지 반쪽 얼굴이 주는 이질감은 아수라 백작의 그것과 유사했다.
미성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에게 사람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 꾸며낸 빈말도 상대방은 진심이라고 믿었다. 의식적으로 밝은 인상을 짓지만 눈이 웃는 법은 없었다. 단 한 사람, 정원과 있을 때만 빼면.
한 지붕 밑에서 지낸다고 대우가 똑같은 건 아니었다. 외숙모인 선희에게 정원 남매는 어디까지나 군식구에 불과했다. 선희의 신경질적인 태도나 대놓고 받는 차별에 상처 받을 때, 정원을 위로했던 건 미성이었다. 정원을 챙기는 미성을 주위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아인 원래 착해. 다른 애들한테도 늘 친절하던 걸,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달랐다. 정원에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래서일까, 정원은 미성이 숨기고 있는 반쪽 얼굴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정원은 미성이 달 같았다. 공전과 자전의 주기를 맞춰, 필사적으로 한쪽 면만 노출시키는.
처음엔 모르는 척했다.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고, 누구나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조금만 각도를 틀면 보이는 그의 어두운 모습이 가련해 더는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미성은 정원에게 간파 당한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편해졌다. 어쩌면 그녀가 알아봐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들켰네.” 미성은 자잘한 미소와 함께 정원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딱딱하게 굴긴.” 그리고는 장난치듯 그녀의 머리를 헝클었다. “심심해서 그랬어. 오랜만에 하니까 스릴 넘치고 좋던데?”
“좋으셨어, 누군 심장 쪼그라들어 죽는 줄 알았구만.”
미성의 얼굴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미소는 여전했다. “걱정했어?”
“내 걱정했다, 내 걱정!”
별일 없겠다, 싶은 시점에서 남생은 미성이 사온 것들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대?”
“요린 내가 할 테니까, 간단히 정리만 좀 해줘.”
“네네, 안 그래도 유정원 표 샌드위치가 지겹던 참이었습니다요.”
“저게!” 정원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너 자꾸 유정원, 유정원 할래?”
“부모님 이름도 막 부르는 나라예요, 여기가. 겨우 누나 정도로 뭘.”
“겨우 누나? 내가 너 똥 기저귀 다 갈아주고, 울 때마다 포대기로 업어 준 거 기억 안 나?”
“그런 건 기억 안 나는 게 정상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형?”
남매가 다투는 모습이 귀엽다는 듯 미성은 작게 웃었다.
“이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거야. 뼈 빠지게 키워 놓으면 뭘 해, 고마운 줄도 모르는데.”
“아이고, 어머님. 화 푸시고 우유 한 잔 하세요. 그 연세에 뼈 부러지면 잘 붙지도 않으니까.”
남생이 웃으며 건네는 우유 한 잔을 정원이 억지로 받아 마시며 남매의 말싸움이 일단락되었다. 거실 텔레비전에선 한창 진행 중인 축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리버풀과 토트넘의 경기였다. 시작한 지 50여 분이 흘렀다.
“오늘 경기는 어떻게 돼?” 미성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두며 물었다. “오프 사이드에 다녀왔잖아, 너.”
축구 용어인 ‘오프 사이드(Off-Side)’는 다른 이들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 플레이에 간섭하거나, 상대편을 방해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반칙 행위와 그 반칙이 범해지는 위치를 통칭한다.
그러나 정원에게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 개념이었다. 현재 진행형의 온 사이드(On-Side)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시간들의 이름.
“나 거기 갔다 온 거 어떻게 알았어?”
미성은 손으로 식빵을 찢어 먹고 있는 남생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보의 출처가 그였던 모양이다. 정원이 동생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대는 사이, 미성은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우, 처참하게 지고 있잖아.”
스코어를 확인한 미성이 유감을 표했다. 리버풀이 토트넘에게 세 골이나 먹힌 상태였다.
“아직 멀었어.”
“여기서 더 들어간다고?”
정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2:6, 토트넘의 완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