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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엄마, 그 인간, 그리고 나린
작가 : 세가잘놀
작품등록일 : 2016.10.5

'가난'이란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듯한,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 85년생 나린이의 굴곡진 삶.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의 우리, 우리 부모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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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5 04:55     조회 : 443     추천 : 3     분량 : 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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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한 명의 사람이자 인격체로서 그의 삶이 당연히 있었겠지만 난 그의 어릴 적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나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대부분 그가 아닌 엄마에게서 어렸을 적 전해 들은 이야기나 그가 엄마와 대화하는 것을 주워들어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자신이 어제 뭐 했는지, 자기 사는 집 주소가 뭔지도 가물가물한 위인이란 걸 아는지라, 지금 그에게 물어본다 해도 더 많은 추억을 캐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의 부모는 모두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먹고 살기 바빠 왕래가 없다 보니 나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에 가 본 적도 없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면 나오는 내 본적이 그와 같은 경상북도 의성군이니까 그가 그 언저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거라 짐작하는 게 다다.

 

 그는 4남 6녀의 막내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엄마와 그와의 대화를 엿들은 기억에 의하면 그의 아버진 그 시대 흔한 양반 행세를 하고 다니는 바람둥이였고 그의 ‘작은 마누라’도 7남 1녀를 낳았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11남 7녀의 막내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이미 마흔이 훌쩍 넘었었고,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대신 집안에 이미 장성한 형제가 있어 일손이 많은 데다가 그의 아버지는 이른바 백 칸짜리 집을 가진 유지여서 그는 일은 하지 않고 곱게 자랄 수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엄마가 그의 무능함과 가난함을 탓하며 하던 잔소리인지라 정확한 사실인지는 잘 모른다. “양반집에서 손만 빨고 자랐으니 당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 하는 엄마의 말에 그는 처음엔 강한 부정으로, 조금 지나선 모든 걸 다 체념한 한숨으로만 대답했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생년월일도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이건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아닌 그의 부모 탓이긴 하다. 주워들은 바로는 학교 갈 나이가 훌쩍 지난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 달라고 조르자 그의 아버지는 넌 아직 출생신고를 안 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했다. 그가 밥을 굶어가며 울고불고 떼를 쓰자 출생신고를 해 주마 약속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 누이 할 것 없이 아무도 그의 생일을 몰랐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봄꽃이 만개했을 때 태어났다고 기억했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그 때문에 산파를 데려오는데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땀띠에 시달렸다며 그가 여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결국, 둘의 의견을 수렴해 봄과 여름 사이, 5월 15일을 출생일로 정했고, 나이 역시 주민등록상 나이가 많아 좋을 게 없다며 두세 살 깎아 썼단다.

 

 더 웃긴 건 그의 이름이다. 그는 출생신고를 할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집안에서 그는 그냥 개똥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이름이 천해야 오래 산다고 그렇게 이름을 막 지었다는데 믿기지는 않지만 난 그 시절에 살아보지 못했으니 그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출생신고를 하러 그의 아버지 손을 잡고 면사무소에 가는 내내 그는 자신의 이름 개똥이 맘에 들지 않음을 강하게 피력했다고 한다. “동네 개들 이름이 다 개똥인데, 나까지 개똥이라 카면 헛갈려서 우얍니꺼. 내 이름 지어주소.”가 나름 논리 정연한 그의 이유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니는 큰 물건이 될 놈이니까 니 이름을 대물이라 하자.” 했단다.

 

 나이 아홉이 지나 그가 받은 이름 김대물(金大物). ‘대물’이 언제부터 조금 야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물이란 이름을 가진 그 또래의 사람이 가끔 있는 걸 보면 그때는 평범한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애들처럼 그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길 좋아했는데 그 레퍼토리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무식해 아는 한자가 大와 物밖에 없어 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키 170이 채 안 되는 그의 체구에 맞춰 그의 이름을 소물(小物)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식식대며 화를 냈지만 변변한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 엄마의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이는 날이면 종종 그가 엄마에게 “대물은 대물이지?” 하며 뻐기곤 했는데, 아마도 그때만큼은 그도 엄마도 그의 이름이 맘에 들었었나 보다.

 

 그는 어렸을 때 꽤 똘똘했었다고 한다. 이건 본인과 엄마 모두에게서 들은 이야기니 부모들이 흔히 하는 “난 너만 할 때 공부 잘했다.” 소리보다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싶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대구에 있는 큰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요즘으로 치면 의성서 서울도 아닌 대구로 진학한 건 ‘유학’이라 부를 수 없겠지만, 당시엔 그게 큰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술과 노름에 집과 땅을 다 팔아먹지 않았으면 아마 좋은 대학도 갈 수 있었을 거란다. 그의 아버지는 대대손손 물려오던 논 수백 수천 마지기를 다 말아먹고,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몇 달 전 술을 먹고 다리를 건너다 꼬꾸라져 비명횡사했다. 곧이어 이미 시름시름 앓고 있던 그의 어머니도 삶을 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아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무작정 일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고, 허드렛일, 공장 일을 하며 서울에 있는 몇몇 친척 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 비실비실한 몸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 싶지만, 그는 이 시절 자신이 꽤 잘나갔다고 자부한다. 돈을 많이 벌어 잘 나간 건지, 술을 먹고 흥청망청 여자를 잘 만나고 돌아다녔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전혀 근거 없는 그의 허풍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 장 남지 않은 그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그도 한때는 주름살 없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만의 젊음을 즐겼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는 장사꾼이 돼 돈을 많이 벌기로 마음먹었다. 어릴 적부터 사교성 좋고 말발 좋기로 유명했던 그였던지라, 사람 대하는 게 좋고, 사람 설득하는 게 쉬웠다. 문제는 본인도 설득을 잘 당한다는 거였다. 좋게 말해 설득을 잘 당하는 거지, 그건 잘 속는 거였다. 장삿속이라는 게 자기 이득을 취해야 하는 건데, 그는 오지랖이 너무 넓었다. 자기도 좋고,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아야 하는 두루뭉술하고 착해 빠진 그의 성격은 엄마 말을 빌리자면 ‘사업 말아 먹고 돈 떼인 뒤 빌어먹기 딱 좋은’ 성격이다.

 

 그는 이때의 결심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착실히 등록금을 모아 대학에서 법학이나 경영학을 공부했어야 했다고. 고시를 보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했어야 했다고. 그가 술에 취할 때마다 난 “공부란 게 다 때가 있는 기다. 사람 일이란 게 다 때가 있고 그때를 지나면 암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기라.”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이게 그에게서 들은 유일한 조언이자 그의 인생사였다.

 

 그나마 그가 가진 유일한 장점은 성실함이었다. 여기저기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수년간 모은 돈에 빚을 얹어 서울 변두리에 작은 사진관을 차렸다. 왜 하필 사진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진에 특히 관심이 있어서였는지, 당시 사진관이 유행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가 구한 돈으로 차릴 수 있는 게 사진관뿐이었는지.

 

 언젠가 티브이를 보던 그가 드라마에 나오는 한 여배우를 가리키며 “어? 저 여자 내 사진관 할 때 내가 사진 찍어줬다 아이가.” 하고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이내 “저 여자 내가 사진 한 방 찍어 줬더니 내 좋다고 억수로 쫓아다녔제.” 하며 엄마 눈치를 다시 살폈다. 엄마는 “쟈가 미쳤다고 니를 쫓아다녔을까 봐. 뻥을 쳐도 칠 걸 쳐라.” 하며 혀까지 끌끌 찼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뻥 아이라 카이. 내가 사진도 잘 찍고 얼굴도 디게 잘생깄다고 내 좋다 했다 안 하나.” 했다. 엄마는 파안대소하며 “니가 사진을 잘 찍는 다꼬? 니가 찍은 사진치고 잘 나온 꼴을 못 봤는데?” 했다. 그는 “서울 시내 다 돌아봐라. 내만큼 사진 잘 찍는 사람 있나.”며 또 뻥을 쳤고 엄마는 “사진을 ‘하나, 둘, 셋’ 하고 찍어야지 니는 만날 ‘하나, 둘’ 하고 ‘셋’ 하기 전에 찍어 뿌렸다 아이가.” 하며 면박을 줬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셋.’ 할 때까지 같은 표정으로 기다리야 셋하고 찍지. ‘셋’ 하기 전에 ‘둘’ 할 때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어야 잘 나온다 아이가. 사진이라는 게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기다. 잘 알지도 모하면서.”

 

 정작 난 그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 사진이건 남의 사진이건. 그가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없다. 난 변변한 어릴 적 사진도 몇 장 없고 친구나 애인에게 보여줄 앨범 한 권도 없는데,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사진이 없는 게 불만이어서 라기보다는, 그냥 왜 사진이 없는지 정말 궁금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진기 살 돈이 있어야 사진을 찍지.” 맞는 말이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남들은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다들 가져오는 사진기를 나는 한 번도 들고 다녀 보지 못했으니까.

 그가 엄마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그를 엄마가 왜 만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지만 둘은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연애결혼을 했다. 경북 영천 출신인 엄마는 그가 같은 동네 사람이라 좋아했다고 했다. 내가 “아빤 의성 사람이고 엄만 영천 사람인데 어떻게 같은 동네야?” 했더니 제대로 대답을 못 한 기억이 있는 걸 보아, 엄만 그냥 그가 좋았나 보다.

 

 엄마는 1남 7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첫째를 아들로 낳고 줄줄이 딸을 낳던 외할머니는 당시 많이들 그랬듯이 엄마의 이름을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말년’이라고 지어버렸다. 4년 뒤 어렵게 들어선 아이도 또 딸이었으니, 엄마의 이름은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엄마는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외할머니가 엄마의 동생을 낳다 돌아가셨다니, 외할머니는 무의식중에 엄마가 말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외할아버지는 종종 엄마를 보며 “저년이 말년인데.”하고 한숨을 쉬었다는데, 엄마는 그 한숨이 막내가 아들이 아니라 억울해서였는지, 죽은 마누라가 그리워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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