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요즘 자기가 계획한 일을 수습하느라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스케일 큰 장난을 쳐버렸네’
들키지 않게 서우와 바꿔치기한 이후 서란은 최대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쇼핑몰 사무실을 현재 살고 있는 옥탑방으로 바꾼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서우를 다시 설득시켜 내려보낸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을까.. 요즘 서우는 이상하게 잠잠했다. 서란은 연락이 안 되는 것보다 지금 이 잠잠한 분위기가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서우랑은 말을 많이 안 섞는 게 좋겠지.. 워낙 거짓말이 한두 개가 아니니’
서란의 무리한 부탁에도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는 서우를 보면서 조금 찡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서란은 서우에게 맘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더 믿기에는 테스트가 필요하지. 고롬고롬’
서란은 약간의 미안한 맘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야 너희들!!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서란은 잡생각을 떨쳐버릴 겸, 지금 열심히 상품을 포장 중인 친구 겸 직원들에게 집중했다. 단 두 명뿐이었지만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서란의 죽마고우들이었다. 한 명의 이름은 지호준. 이분이 바로 이 모든 일을 일으킨 문제의 장본인이다. 상황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열심히 상품을 포장 중이었다. 호준은 항상 서란을 과잉보호했다. 가족들과 떨어진 과거 때문일까, 누군가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기 바빴던 서란에게 조건 없는 우정을 가르쳐 준 건 호준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서란은 호준이 서란을 위해 나서주다 사고를 쳐도 탓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서란의 인생에선 드문 일이었다.
“서란아. 딴 건 괜찮은데 여기 옥탑방이라 짐을 너무 옮기기 힘들어.. 히잉”
호준이가 서란을 돌아보며 징징거렸다. 서란은 호준의 뒤통수를 갈겼다.
“퍽”
“아야…”
“그러니까 내가 무슨 행동하기 전에 뇌한테 허락 맡으라 했어 안 했어?”
“너무해…히잉”
징징거리는 말투에서조차 애교가 느껴지는 호준을 가볍게 흘겨보며 서란은 또 다른 친구인 미애에게 눈을 돌렸다.
“미애야. 이번 상품까지는 어떻게 무리 없이 끝낼 수 있겠지?”
“아 뭐.. 제재도 풀렸으니까 상품 수야 차차 늘려가도 괜찮을 거야"
지호준 옆에서 무언가 계속 적고 바삐 움직이며 재고와 상품 현황 및 웹사이트를 관리하는 이 친구의 이름은 조미애. 미애와는 고등학교 때 만나게 되었다.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황금 물질만능주의(?), 재빠르게 돌아가는 상인의 머리는 같은 파장을 갖고 있는 서란을 자동적으로 끌어 당겼고 이제 둘은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로써 하루에 한 번씩은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실 나우 쇼핑몰에 입점할 수 있었던 것도 미애의 영향력이 컸다. 그 회사의 대표님에게 반해 자기 비서로 투잡 뛸 거라며 회사를 뛰쳐나간 뒤 얼마 후에 미애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표님의 비서가 되어있었다. 서란은 돈과 상품에는 집착이 있었지만 사람에겐 집착을 가지고 있기 않았기 때문에 미애의 대표님을 향한 에너지에 정말 놀라 버렸다. 그게 서란이 알고 있는 미애와 자신의 큰 차이점이었다.
“이렇게 옥탑방까지 찾아와서 진짜 고맙다. 아 지호준.. 너는 빼고다. 너 때문에 진짜 이게 뭐야”
“….ㅠㅠㅠ”
호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니 서란의 맘이 조금 약해졌지만 이번에야말로 서란은 자기를 지키려고 할 때만 지나치게 남자다워지는 호준의 버릇을 고쳐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근데 너 언니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미애의 질문에 서란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우리 대표님이 의도가 뭔진 모르겠지만 애정공세가 장난이 아니던데… 나 완전 콘서트 표 이런 거 구하느라 엄청 야근했어. 구하기 힘든 것만 구해달라 하셔가지고…”
“아… 에이. 대표님이 바보냐. 연기하다가 무슨 자기도 기억상실증 걸리게?”
“그건 맞는데… 아무튼 그 표 두 장씩 구하느라 내가 정말 진땀 흘린 거 생각하면…”
“아 그렇지. 미안 미안. 너무 고생했어.. 내가 이번 일만 수습되면 꼭 월급 올려줄게"
“꼭이다..”
사실 미애는 서우의 철벽을 뒤에서 돕고 있었다. 서란의 입장에선 서우와 대표의 만남은 최대한 막는 것이 안전했다. 서우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언제까지 먹힐 줄은 모르겠지만 대화를 조금만 나눠보면 이상함을 느끼는 건 순식간일 거라고 서란은 생각했다. 다행히도 대표님을 좋아하는 미애가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 공작을 펼쳐 주어 지금까지는 둘의 데이트를 잘 막을 수 있었지만 대표가 조금이라도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면 미애가 아무리 애를 써도 서우를 만나는 건 한순간이 될 것 같았다. 서란은 이런 아슬아슬함이 얼마나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갑자기 서란은 이런 상황에서 묵묵히 자기가 하란 대로 열심히 자신을 연기하는 서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서란 행세는 길게 이어져 이제는 한 달 반이 돼가는 시점이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하지도 않을 텐데 서우는 왜 나의 부탁을 있는 대로 들어줄까. 정작 그 대가로 서우가 원한 것은 원장 수녀님의 안부를 계속 체크해주는 것뿐이었다. 서란은 서우 생각만 하면 어딘가 맘 한구석이 불편했다. 서란은 계속 서우에게 이런저런 곤란한 일을 부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흔쾌히 들어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쨌건 아직은 믿을 순 없지’
서란은 혼자서 맘을 굳게 먹어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1층에 쌓여있는 짐을 가져오기 위해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옷 두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는 지수가 보였다. 서란은 지수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었다.
“어!? 지수야. 이거 내 짐이야?”
“아.. 어머니가 집 앞에 박스 있는데 도와주라고 하셔서 일단 들고 올라왔어요. 누나네 짐 맞죠?”
말을 마친 지수는 짐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무거울 텐데.. 이제 보니 힘이 엄청 세네’
지수는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큰 짐을 들 때도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체대생이라 그런지 무거운 짐을 들고 옥탑방으로 올라오는데도 호흡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란은 그런 지수의 모습에 감탄하며 말을 이어갔다.
“너… 내 알바생이 되라”
“네?!”
“……원피스 봤어?”
“아뇨…..”
“흐음.. 그럼 알바 해볼 생각 없어 학생?”
“으음???”
“그냥 지금처럼 짐만 날라주면 되는 거야. 시급은 쏠쏠하게 맞춰 줄게. 지금 너무 급해서 그래. 갑자기 사무실을 옮기느라 할 일이 엄청 늘어서.. 뭐 짐 나르다가 옷도 입어볼 수 있는 거고 사진이 찍힐 수도 있는 거긴 하지만…..”
“할게요.”
지수의 빠른 결정에 오히려 제안을 한 서란이 살짝 당황했다.
“.. 진짜?!?!”
“네.. 어차피 훈련에 돈도 꽤 들어가고… 이걸로 운동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집도 가깝고”
“와아!!! 땡큐땡큐
서란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서란의 모습을 본 지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란은 지수의 무심한 듯한 다정함이 무척 고마웠다. 평생 동안 남의 도움을 별로 받은 적이 없었는데 요새는 왜 이렇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까.
“근데.. 누나. 그럼 이렇게 4명이서 자주 일하게 되는 거예요?"
폴짝 뛰는 서란을 지켜보던 지수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서란은 지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 아니. 보통 둘이 있겠지? 저 둘은 일주일에 한두 번 올걸?"
서란의 말을 들은 지수는 좀 더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서란은 지수의 등을 다독이며 어르듯이 얘기했다.
“왜 걱정돼?? 에이.. 걱정 마. 내가 재미있게 해줄게. 어색하게 안 할게”
지우는 그런 서란의 말을 듣고 서란을 조용히 내려보았다. 그리곤 서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할래요. 그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