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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무협물
대리서사소설(大里敍事小說 )
작가 : 아미가
작품등록일 : 2019.8.10

본"대리(大里)"지역의 패권을 놓고 한바탕 혈투가 벌어진다.

대리지역의 진정한 주인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열강의 다툼 속에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서사소설.

대리지역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본 소설에 나오는 지명이나 이름 등은 모두 지어낸 허구이며 소설의 내용도 실제 사실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한들보유국(韓野保油國)
작성일 : 19-08-11 17:35     조회 : 282     추천 : 0     분량 : 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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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지국 도성에서 서쪽으로 300리 정도 떨어진 곳에 한들보유(韓野保油)란 전화방이 있었다. 한들보유 전화방은 한때는 대리지역에서 노지국의 전화방이 아닌 당당한 하나의 나라로써 위로는 노지국에 근접하였고 아래로는 골만어국, 좌측으로는 아이곤국에 둘러 쌓인 형국이었다.

 

  이러한 열강의 대국 속에서도 땅덩어리는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당당히 그들과 대리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하였다.

 

  이 한들보유의 건국된 이유로는 많은 설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다음과 같았다. 예전 구서(九西)지방의 비수(費手)란 전화방이 있었는데 이곳에 한씨 성을 가진 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매질을 당하였다. 이에 분함을 느낀 그 사내는 비수를 떠나 인근 전화방인 청방(廳方)으로 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청방은 비수와 형제의 전화방이기에 그 사내를 잡아 더 모진 매질을 한 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옥에서 정신을 잃던 그 사내는 꿈속에서 신령이 나타나 계시를 받게 된다.

 

  "서쪽으로 가면 큰 들판이 있나니 그곳으로 가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니라..."

 

  이에 이 사내는 캄캄한 새벽 시간에 탈옥을 하여 맨발을 하고 3일 밤낮으로 정신없이 서쪽지방으로 내달리니 그곳에는 신령의 말과 같이 평평하게 끝이 없는 들판이 펼쳐 있었다. 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큰소리로 "한가인 내가

 이 기름진 들판에 나라를 세우니 그 이름을 한들보유라 하니라..."외치었다.

 

  물론 이 이야기도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고 한씨 가문에만 야사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 한들보유국은 땅의 크기도 크지 않고 백성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다른 노지국이나 골만어국처럼 전화방을 설치 운용하지 않고 직접 백성들을 두루 살피니 백성들은 살기가 편하였다.

 

  보험요도 다른 나라보다 많지 않았고 관리비 같은 세금도 거두질 않았으며 특히 백성들을 핍박하는 관리들을 엄하게 관리하니 한들보유국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살았다.

 

  한들보유국은 화폐도 자체적으로 발행을 하였으며 그 화폐단위를 후불(侯不)이라 하였다. 한들보유국은 골 가격을 다른 나라보다 후하게 백성들에게 지급하니 다른 나라는 일만롲이나 일만이천롲을 지급할 때 한들보유국은 어떠한

 골이더라도 최소 이만후불로 백성들에게 지급하니 비록 골의 수는 많지는 않았지만 나름 풍족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타 다른 나라들처럼 골을 관아에 파는 즉시 골 값을 지급하는 것이 아닌 골을 먼저 받은 뒤 그 비용은 달포 후 지급을 하게 되었다. 이는 한들보유 건국초기에 재정상황이 좋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시행 한 시책으로 백성

 들도 큰 불만을 가지지 아니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인근 노지국 전화방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서 돈을 바로 지급하지 않고 후일에 지급하여 즉후(卽侯)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사용되어지기까지 하였다.

 

  한들보유국은 다른 나라에서 골을 잡을 때 사용하던 피대애이(皮大涯移)라는 도구 대신 자체 개발한 피알(皮閼)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골을 잡았다. 지금은 모두가 수마투본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골을 잡지만 이 수마투본이 개발되어 보급되기 전까지는 피대애이라는 도구를 통해 골을 잡았었다. 이 피대애이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피댕이로 불렸으며 큰 가죽을 물가로 옮겨 골을 잡는 도구로써 가죽이 물에 젖으면 무거워 지고 크기가 커서 이동이 불편한 단점이 있었다. 이에 불편함을 느낀 한들보유왕은 가죽이 물에 젖어도 무겁지 않고 크기도 작은 피알이라는 도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보급하고 피대에이의 사용을 금지 하였다. 그래서 수마투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보급되기 전까지 한들보유는 피알을, 그 밖의 나라에서는 피대애이를 사용하여 골을 잡아 생활을 하였다.

 

  한들보유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법빈기사(法彬基士)라는 신분이 존재하였다.

 *법빈기사(法彬基士) : 나라의 법을 잘 지켜 나라의 터를 지키고 빛나게 해주는 선비들에게 주는 관직. 예전 구서비스나 청방의 전화방에 있던 신분제도로써 구서비스에 살던 한씨가 이 제도를 가져와 한들보유국에 주요 정책으로 시행하였다.

 

  이 법빈기사는 노지국이나 대리지역의 어느 나라에도 없던 신분으로써 이곳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가 법빈기사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이 법빈기사는 골을 잡을 시 옛 전통의상을 입어야만 했다. 수염은 정갈하여야 했고 갓을 써야 했으며 정식으로 두루마리 도포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 골을 잡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옷차림은 골을 잡기에는 매우 어울리지 않았고 어색하고 편하지가 않았지만 한들보유왕은 이를 어길시 매우 큰 형벌을 내리니 이를 따르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

 

  이웃나라 사람들은 법빈기사들이 골을 잡는 모습을 보고 옷과 골 잡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조롱하였지만 한들보유국 백성들은 오히려 아무렇게나 차렵입고 골을 잡는 저들을 미개하다 하였다.

 

 한들보유 왕은 선민통치로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한 때는 전화방 횡포에 못살겠다 하여 이 한들보유국으로 귀화하고자 하는 노지국, 골만어국 백성들의 줄이 십리를 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 어질다 하여도 당장 백성들이 배를 곪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한들보유국은 골의 수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백성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적은 골로도 저마다 백성들이 입에 풀칠이 가능했지만 점점 이민자 수가 많아짐에 따라 사람은 많아지고 골수는 적어지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다시 이웃나라로 야밤 도주를 하거나 관리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른 나라로 가서 골을 잡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한들보유국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 지자 노지국 왕은 한들보유국에 수십만의 군사를 파병하

 여 단 삼일 만에 한들보유국을 멸망시키고 자신의 전화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한들보유국은 5년 만에 건국에서 패국을 거치며 명색이 한 나라에서 노지국의 전화방으로 전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들보유국의 후손들은 골을 잡을 시 옛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식으로 갓끈을 동여 메고 도포를 입고 골을 잡으니 그 행색이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옛 전통을 지키려는 그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일오칠칠. 이오팔팔, 한들보유 말고도 노지국에는 수많은 전화방들이 있었으니 골의 크기나 무게는 상관없이 무조건 일만사천롲만 지급하는 초이(草李)," 일만사천도 많다. 우리는 일만이천롲만 지급한다" 던 친절(親折), 스스로를 하늘의 사자라 불리며 폭정을 하던 천사(天士), 무조건 골의 길이로만 골 가격을 정했던 군모잉(軍毛剩) 등 수백의 전화방들이 백성들을 핍박하며 괴롭게 하고 있었다. 갈수록 전화방들의 횡포는 심해지고 골 가격을 형편없이 지급하여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 지니 노지국에 사는 백성들 치고 노지국 왕과 전화방 관리들을 욕하지 않는 이가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대리지역은 노지국이 영토의 7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골만어(骨萬禦)국과 아이곤(牙理困)국이 각 각 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 때는 노지와 대적할 만큼 큰 나라였던 골만어국은 골값을 형편없이 지급하니 백성들이 못살겠다하여 노지국으로 모두 떠나 나라의 기운이 급격하게 기울어 지금은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곤국은 대리지역을 관통하는 한강(漢江)이남 경기남부지방에 터를 잡고 사는 나라로써 산세가 무척 거칠고 드세 노지국 왕도 굳이 이 곳 까지 침범하려 들지 않았다. 아이곤국은 골이 많이 발생한다는 기록만 짧게 역사에 기록되어질 뿐 자세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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