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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혼란한 세상, 이상한 사람
작가 : 토토
작품등록일 : 2016.9.28

 
코가 커지다
작성일 : 16-09-28 17:03     조회 : 463     추천 : 0     분량 : 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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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가 커지다

 

  영주가 마트에 가지 않겠냐고 했을 때 장삼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영주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갔다. 아이들은 마트에 간다고 하면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좋아한다. 집안이 조용해지자 장삼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영주의 휴대폰이 옆에 놓여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다. 장삼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켜서 통화기록을 살펴보았다. 낯선 전화번호들. 장삼은 다시 문자 기록들을 검색해보았다. 많은 문자 중 눈에 띠는 문자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강 쌤과 윤 선생님이란 호칭이 오고간 걸 봐서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쌤 스윙 자세도 좋고 비거리도 있느니 이제 필드에서 놀아봅시다.

  -윤 선생님 덕분이죠. 필드에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 흥분 모드.

  장삼은 문자 목록을 뒤로 더 넘겼다.

  -요즘은 온통 강 쌤 생각뿐입니다. 우린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요.

  -윤 선생님 저도 괴로워요. 우린 모두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젠 선을 지켜야할 것 같아요.

  장삼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강 쌤, 오늘도 스윙 연습 끝나고 맥주 한 잔 합시다.

  -나이스 샷!♡

  다시 통화 기록을 살며보자 윤선생의 전화번호가 많이 찍혀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삼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나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장삼은 소파에 누워 무표정하게 TV를 보았다. 영주와 아이들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들어왔다. 윤주는 과자 봉지를 들고 있고 유주는 입가에 범벅을 한 채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다. 윤주가 말했다.

  내일 엄마가 팬케이크 만들어준다고 했어.

  팬케이크 맛있지. 엄마 표 쿠키, 케이크, 머핀, 도넛, 제빵사 엄마 있으니까 윤주 유주는 좋겠네.

  아빠는 빵 싫어하잖아.

  아빠는 옛날에 빵 좋아했었어.

  지금은 싫어?

  싫은 건 아니고 많이 익숙해지니까 조금 멀어지고 싶은 거지.

  밤늦은 시각. 아이들은 잠이 들고 영주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다. 장삼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볼만한 채널을 찾고 있었다. 백 개가 넘는 채널 중에 선뜻 눈이 가는 프로가 없었다. 볼만한 방송이 없는 건지 취향에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이 없는 건지, 장삼은 마음에 드는 프로가 나올 때까지 리모컨으로 채널을 계속 돌렸다. 훈네 섬의 원숭이 바이러스 소식이 계속 TV를 통해 전해졌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변종이라 더 위험하다느니 원숭이의 자체적 발병일 뿐 인간에게 전염되는 일은 없다고 하는 등 전문가들의 엇갈린 전망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곳을 다녀온 여행객들을 인터뷰했는데, 병에 걸린 원숭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며 머리숱이 빠진 토착민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곳을 다녀온 한국여행객 중에 아직 특이한 증상을 보인 사람은 없다고 말을 했다. 장삼은 다시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 영화, 뉴스, 토론방송, 예능, 가요, 홈쇼핑 등의 화면과 소리가 눈앞에 머물다가 다음 채널로 넘어갔다.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국회를...

 

  썩 꺼지지 못해? 바보 같은 녀석들..

 

  장기 불황과 저성장 문제가 청년 실업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게..

 

  목사 아버지가 초등학생 아들을 두드려 패 죽이는 사건이...

 

  잘 한다 잘 해. 세상 꼴 자알 돌아간다!

 

  제 말은 현 정부 들어 인권과 민주주의가 더 후퇴하고 있다는 거예요.

 

  넌 내 사랑이 아니야,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10대 청소년 열 명이 열 어섯 살 소녀를 집단 윤간하는 사건이 발생해..

 

  모든 때 싹싹 한 스푼이면 하얗게 싹싹 문질러만 주세요.

 

  20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기로 살해한..

 

  세상에 어이없어서. 왜 난 안 주고 쟤만 주는 거야? 후훗

 

  채널 고정! 마지막 한정 판. 지금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이 가격에...

 

  채널들이 장삼의 눈앞에 열차의 풍경처럼 스치고 지났다. 어느 채널에서 아프리카 야생동물이 나오자 장삼은 화면을 고정시켰다. 수도 없이 많은 누우 떼가 협곡을 건너간다. 물속에 숨은 악어들이 도사리다가 게릴라처럼 덤벼들어 누우의 다리를 물고 늘어진다. 어떤 누우는 발버둥을 쳐서 기적적으로 도망쳐 나오지만, 대개 악어의 표적이 된 누우는 갈기갈기 찢겨져 피의 강물이 되고 만다. 장삼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수백 킬로를 이동해 왔는데 악어의 표적이 되어 죽는 누우는 억울하다. 인생은 재수가 따라야 하는 것일까.’

  장삼은 스스로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에서 영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가 재미있는 것 같았다. 장삼은 그림자 없이 일생을 산다면 정말 육신의 고기 덩어리와 다름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 없이 찢겨진 누우의 신세가 잔상이 되어 남는다. 장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영주는 드라마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삼이 말했다.

  자기, 나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인데?

  영주가 TV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TV 좀 끄면 안 될까?

  TV를 왜 꺼? 할 말 있으면 하라니까?

  장삼은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말하기로 했다.

  나, 사실은 그림자가 없어졌어.

  영주가 TV를 보며 다시 깔깔 웃었다. 영주는 장삼의 말을 못 들었는지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어?

  그림자가 없다고.

  누구 그림자?

  내 그림자.

  영주는 뚱한 눈길로 일시 장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숨 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자기, 요즘 외로워?

  영주는 다시 드라마 속 인물의 행동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장삼은 안방을 나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재수 없는 누우 몇 마리 따위는 세상이 기억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우는 불쌍하고 억울한 게 아니라 사냥꾼에게 필요한 먹잇감일 뿐이다. 장삼은 소파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내 몸이 단단해지고 무척 육중해졌다. 살갗은 창이 튕겨나갈 정도로 가죽이 두꺼웠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 진동이 느껴졌다. 머리에서 자라난 혹이 내 눈앞에 위치하기에 이렀다. 내 눈이 세상의 풍경과 사물을 볼 때면 커다랗게 솟은 뿔이 소총의 가늠자 역할을 한다. 나는 늘 뿔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고 겨누곤 한다. 내 몸속은 포악한 공격성이 뜨거운 혈류를 타고 흐른다. 움직이는 대상 그 누구라도 반경 안에 들면 성난 뿔을 내세워 치 닫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곳 야생은 낮에는 무덥고 밤에는 추우며 사방이 삭막한 모래벌판으로 펼쳐져 있다. 오랜 가뭄에 초록의 풀들이 말라가고 점점 사막화가 되어간다. 모두들 살기위해 발버둥 치며 센 놈이 살아남고 약한 놈은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 하지만 나는 강하므로 살아남는다. 내가 콧김을 씩씩 내뱉으며 땅을 박차는 모션이라도 취하면 모두들 혼비백산이다. 사자무리도 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내 성난 뿔에 받치기 라도 하는 날에는 배구공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라 패대기쳐지거나, 가죽을 뚫고 내장이 빠져나와 즉사당할 수도 있다. 난 홀로 무적이다. 나의 육중한 몸이 드리운 그림자만 봐도 개체들은 알아서 꼬리를 내리며 뒷걸음질 하거나 돌아서 간다.

  도시 속에 모래 바람이 불고 도로와 골목길은 점차 모래 길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하고서 고개를 숙이며 걸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고 거리마다 부연 침묵이 흘렀다. 곳곳에 원숭이 얼굴을 한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띠었다. 정장을 입은 원숭이, 투피스 차림의 고운 원숭이, 귀여운 아기 원숭이, 노인 원숭이, 거리에는 원숭이들이 아니 사람 같은 원숭이들이 내게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 도심도 이미 사막화가 진행되어 모래가 바닥에 쌓여갔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자동적으로 길이 되어 열린다. 저만치 윤 프로 골퍼가 모래톱에서 스윙을 하고 있었다. 그의 공은 모래 바람을 뚫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내가 다가갔지만 그는 무심하게 스윙을 길게 날렸다. 길을 비켜줄 의사가 없는 듯 보였다. 내가 바짝 다가서자 그는 나를 위협하듯이 골프채를 머리위로 휘둘렀다. 이쯤 되면 해보자는 거겠지. 나는 뒷걸음으로 물러나 땅을 박찬 후에 곧 돌진했다. 그는 골프채를 휘둘러 내 코 뿔을 강타했으나 채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는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으나 이내 모래에 스며들었다. 그의 몸이 모래 바람에 말라가더니 푸석푸석해졌다. 이어 부서져 날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황사 바람에 휘날려가고 있었다. 모래 이불을 헤치고 누군가가 반쯤 일어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장이었다.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등을 돌리며 모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사방을 휘돌며 괴성을 질러댔다. 주위엔 아무것도 눈에 띠지 않았고 쉼 없이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눈을 파고들었다. 눈이 따가웠다. 나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내달렸다. 코에선 씩씩 소리가 거칠게 새나왔고 솟아오른 코끝이 무척 간질간질했다. 무엇인가를 쿵 받아 버릴 때까지 달리고 계속 달렸다. 거리에 원숭이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온몸에 피가 끓었다. 나는 모래 바람을 뚫고서 달려갔다. 코가 세상의 표적을 향해 벌름거렸다.

  아빠, 일어나. 잠꾸러기.

  유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장삼의 코를 톡톡 쳤다.

  으 음......

  눈을 뜨니 유주가 헤헤 웃고 있었다. 장삼은 유주를 안아주었다. 토요일 휴일이지만 특별히 할 게 없었다. 그렇다고 뭘 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장삼은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서재가 있는 방으로 가서 책상의자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그림자 없는 사람’을 입력해 검색을 해보았다. 그림자와 관련된 동화책 몇 권이 검색되었고,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니 공상소설 비슷한 글에 그림자 없는 사내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역시 그림자 없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삼 깨닫는 순간. 세상 어디에도 그림자 없음은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했다. 장삼은 병원에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본다. 내과, 외과, 피부과.. 아마도 의사들은 그의 말을 듣고 정신과를 권유할지 모른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분열증이나 망상증을 의심하며 약을 처방해주거나, 아니면 가족을 불러 정신병원 입원을 강요할 수도 있다. 장삼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에도 솔루션은 보이지 않았다. 장삼은 인터넷 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혹시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삼은 카페 이름을 ‘그림자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하고 카페를 개설했다. 가입만 하면 등급 없이 글을 읽도록 설정했다. 장삼은 필독의 꼭지 글을 올렸다.

  - 삶을 살면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분이 계시나요? 이것은 만화 영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인간의 그림자가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현재 그림자가 없는 상태로 여러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나 원인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살고 계신 어려분 중에 혹시 저와 같은 그림자 상실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카페에 꼭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림자를 상실한 회원은 특별회원으로 모셔 커뮤니티의 장을 별도로 마련하겠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니 장삼은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기도 했다. 카페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 장삼은 게시판에 공지 사항을 명시했다

  -이 카페는 누구나 회원이 되어 이용할 수 있으나 악플이나 장난스러운 게시 글을 쓸 경우에는 강퇴 하겠습니다. 이 카페는 절대 장난으로 만든 공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카페의 카테고리는 간단히 몇 개뿐이었다. 비록 허술하고 성의 없는 모양새였으나 장삼이 바라는 건 외양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픈 바람뿐이었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낚시 대 하나를 몰래 드리운 기분이 들었다.

  장삼은 토요일을 TV 앞에서 뒹굴뒹굴 보냈다. 아이들이 공원에 가서 놀자고 보챘으나 장삼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림자가 없는 아빠의 모습을 내보이기 싫었고, 무엇보다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누이고 싶었다. 내일은 뭘 할까.

 

  장삼은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무가 지나고 집이 지나고 산이 지나고 무심하게 지나는 풍경 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휙휙 지나갔다. 30대 후반의 남자, 안정된 직장, 한 가정의 가장, 보통의 얼굴과 성격, 굴곡 없는 삶의 길, 그러한 가운데 장삼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못 살아온 적은 없다. 난 누구에게 한 번도 손가락질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내는 나를 배반했을까, 또 그림자는 왜 내 곁을 떠나갔을까...’

  답답함을 피해 밖으로 나온 휴일 하루. 장삼은 이 버스가 종착역 없이 계속 앞으로 내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장삼은 벨을 누르고 일어났다. 장삼은 정류장에서 내려 걸었다. 수도권이라 가까운 거리지만 명절을 제외하고 생각만큼 자주 오기가 힘들었다. 장삼은 슈퍼에 들어가 주스 한 박스를 샀다. 주변 산에서 새의 고운 지저귐이 들린다. 낮은 언덕길을 오르자 산 아래 단독 주택이 보였다. 열린 대문을 들어서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저 왔어요.

  거실에서 어머니가 장삼을 보자 일어섰다.

  아니,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 일이냐

  꼭 연락하고 와야 하나요?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말했다.

  애들은 어디 있니?

  저 혼자 왔어요.

  어인 일로 혼자서 왔어?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내놓았다. 아버지는 퇴직 후 경비 일을 하고 계셨다. 연금을 받아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몸을 놔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무탈하게 살아오셨지만 성실 근면함이 몸에 밴 분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장삼이 너 무슨 일 있냐.

  장삼은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했다.

  아니요...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영주 엄마하고 또 싸운 게냐?

  아니에요.

  걔가 좀 기운이 드세서 말이야. 이 애미한테 할 말 있으면 해 봐.

  아니라니깐요. 그냥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며늘애가 어때서? 강단 있고 똑 부러지고 현명한 앤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기주장이 좀 세요? 성격은 또 어떻고. 그러니 장삼이 하고 부딪치는 일이 많지.

  장삼은 정작 나오려는 말이 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건 다 겪어봤고 그러려니 해요. 근데 애 엄마가 바람을 피고 있다고요!’

  장삼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나지막이 말했다.

  피곤한 사람한데 사소한 거 심부름 시키지 않나.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결정하질 않나. 툭하면 쫌팽이, 굼벵이, 마마보이라고 비아냥거리지 않나?

  장삼의 입에서 저절로 말 톤이 높아졌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의 톤도 곧 높아졌다.

  뭐, 마마보이? 아니 그 년이 얼마나 너를 물렁하게 봤으면 심기 건드리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 엉?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어허 참. 임자가 얘한테 말을 듣고서 며늘애한테 한 마디 하니까 그런 거지.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쯧쯧.

  아니, 내가 어른답지 못한 게 뭐가 있어요! 순둥이 같은 아들애가 그 여시한테 당하고 사는데 부모가 돼서 맘이 편해요?

  장삼이가 애야?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왜 걔들 인생에 자꾸 간섭하려고 그러나 그러길.

  오죽 답답하면 얘가 나한테 하소연을 할라구요?

  장삼은 갑자기 무안해졌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윤주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요. 뭐 별 거 아니잖아요. 그런 다툼 없이 사는 부부가 있겠어요?

  아니야. 가만 보니 걔가 갈수록 이 시어머니까지 무시하려고 해. 말대답도 교묘히 비틀어서 하질 않나. 나도 차곡차곡 쌓인 게 있다고. 내 벼르고 있다가 한 번 터뜨릴 거야.

  에잉,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좀 넓은 마음을 가져야지.

  장삼은 입을 다물었다. 아내의 외도 얘기는 꺼낼 엄두가 안 났다. 만약 얘길 꺼낸다면 어머니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직행할 것이다. 이후 상황은 짐작하기 어렵다. 장삼은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집 밥을 먹는 편안한 기분. 구수한 된장찌개에 손이 갔다. 어머니의 맛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TV를 보며 시간이 지나자 장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말했다.

  다음에는 다 함께 오거라.

  네.

  장삼은 부모님 집을 나와 길을 걸었다. 아이는 품안의 자식이듯이 자식도 결혼을 하고 나면 부모는 품 밖의 존재였다. 길가의 전봇대들이 서산 햇살에 길게 늘어져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도 각각 제 그림자가 있는데 왜 내 그림자는 자취를 감춘 걸까?

  장삼이 마음에 품은 말은 ‘외도’와 ‘그림자’였지만, 결국 그 속말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내 문제는 집안에 풍파를 일으킬만한 사건이고, 그림자 문제는 감히 누구에게도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사안이다. 장삼은 마을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지만 답답함은 씻어내지 못했다. 홀로 선 유령마냥 다리 두 개가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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