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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잃어버린 자들
작가 : 라하비
작품등록일 : 2019.7.15


'록 바이러스(Lock Virus)'라는 전염병이 퍼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1부 시계 도시 中>

“오빠.”

잠시 침묵한 티아가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응?”

대답을 하면서도 지금 티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혹여나 안가겠다는 대답이 나올까봐 불안했다. 얼굴에 그런 생각이 드러난 것일까. 티아가 머그컵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내 손을 잡는다.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걱정하지 마. 내일 갈 거야.”

“그래.”

“대신에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

“부탁? 뭔데?”

티아가 싱긋 웃는 걸 보고도 이상하게 안심이 들기는커녕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빼고 달아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실행하기도 전에 티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게 먼저였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내린 거야. 내일 추첨 용지 넣을 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안 돼.”

나는 다급하게 티아의 말을 끊어버렸다. 듣고 싶지 않아. 싫어. 공포와 경악으로 몸의 모든 장기들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를 악물며 처음으로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어떻게? 악바리처럼 악쓰고 티아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에 나는 티아의 손 안에 갇혀있던 내 손을 빼고 어두운 눈빛으로 티아를 향해 다시 한 번 단호하고 절박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안 돼”

널 잃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야. 나는 티아를 노려보았다.

“알아.”

무엇을 아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티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록 바이러스에 걸린 걸 토큰에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나 알아, 오빠.”

티아의 눈에서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
.
<중략>
.
.

“오빠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나는 내 미래는 내가 결정하고 싶어. 혹시라도”

잠시 말을 끊으며 숨을 고른 티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설에 가야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어. 그리고 나는……. 나로 살고 나로 죽고 싶어.”


 
5화 Winter 보급소(2)
작성일 : 19-07-26 11:20     조회 : 231     추천 : 0     분량 : 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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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병아리마냥 삐악대는 티아를 보며 나는 패드도 조작해 티아가 자동기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낮은 가능성마저도 없애버렸다. 너무 오냐오냐 해주는 건 교육에 좋지 않다. 콘이 항상 해주니까 매번 어지럽히지. 한번정도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러기야? 콘? 콘!”

 <죄송합니다. BChouse69 'KONPAM'의 최종 결정자는 크리스님입니다.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애타는 티아의 외침에 어쩐지 우울하게 들리는 콘의 대답이 들려왔다. 결국 티아는 지저분해진 방을 훌쩍이며 홀로 치우기 시작했다.

 “나쁜 오빠. 이 정도도 안 봐주냐. 진짜 못 됐어.”

 대놓고 내 욕을 하는 건 덤이었다. 뭐,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방만 깔끔해진다면 말이다. 못들은 척하면서 티아가 잘 하고 있는지 문에 기대서 감시겸 구경을 했다. 가구들은 티아가 치울 수 있는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널브러진 옷같이 기본적인 것들만 치운 후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티아의 방을 폐쇄했다. 그리고 나는 내 방으로 가, 문에 달린 패드에 손을 올려 관리자 모드로 변경을 요청했다. 승인이 되는 과정은 티아의 방을 열었을 때처럼 두 차례의 과정을 거쳐 빠르게 처리되었다.

 <관리자 모드로 변경됩니다. 명령어를 입력해주세요.>

 “4구역 12번째 WC‐S로 이동. 최종 목적지 Winter 보급소.”

 안내가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Winter 보급소로 갈 수 있는 WC‐S(무인 정거장)로의 이동 명령을 내렸다.

 <현재 WC‐S12는 사용 불가합니다. 최종 목적지 Winter 보급소로의 이동이 가능한 WC‐S는 3, 19, 112번째만 가능합니다.>

 콘에 대답에 나는 의아해졌다. 그도 그럴게 4구역이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구역을 말했는데, 보급소는 BChouse 주변에 분포되고, 이 구역은 보급소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에 따라 4등분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1구역과 4구역의 무인 정거장의 수는 다른 곳보다도 그 수가 많은 편이다. 사실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운데다가 순번 자체가 순차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총 몇 개의 WC‐S가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용가능 장소가 3곳뿐이라는 것 또한 BChouse의 움직일 수 있는 블록이 3개뿐이라는 것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무슨 민족 대이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검지로 턱을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아, 젠장.”

 문득 떠오르는 가설에 작게 욕지거릴 내뱉으며 나는 패드에 이마를 기댔다.

 “왜 그래? 오늘 못 간데?”

 웬만해선 안하던 욕을 하니 티아가 놀라 다가왔다. 어째 뒷말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이 그날이었어.”

 이마를 긁적이며 난처해하는 나를 보며 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날?”

 티아의 물음에 나는 망설였다. 기억하기로 두 달 전이었을 거다. 지금보다 더 정거장이 적은 날이 있었는데 알아보니 ‘르 레브’에서 시행하는 '추첨' 날이었다.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날들 중에 하필 오늘인거야. 마구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좌절하느라 티아의 눈이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반짝이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어쨌든 알게 될 내용이라 나는 마지못해 티아에게 설명했다.

 “르 레로에서 하는……. 추첨 날이야.”

 추첨이란 르 레브에서 2주에 한 번씩 진행하는 일종의 사람들을 끌어 모이기 위한 이벤트였다. 당첨자는 시스템에서 무작위로 선정하며, 방문수와 게임을 한 횟수에 따라 확률이 높아지는 시스템이다. 사람들이 이 ‘추첨’에 목숨을 매는 이유는 당연히 1등 상품 때문이었다. 1등으로 당첨된 사람한테 주는 게 록 바이러스의-반쪽짜리-백신인 레로(Rero)였으니까. 완전한 치료가 가능한 슈퍼 백신은 실존하지 않으므로 그저 병의 진행을 늦춰주는 용도일 뿐일 것이다.

 플램은 그것만으로도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레로를 소개했고, 후기를 올린 사람이 없으니 진위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플램에 말처럼 진행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 사실을 욕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그 날이 ‘그’ 날인 게 문제인거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렇다고 하루 종일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사실 답은 나와 있었다.

 “할 수 없지. 19번째로 이동해줘."

 어디나 비슷할 거라는 생각에 성의 없이 아무번호나 불렀다.

 <이동을 하기 위해 모든 가구 및 물품들을 수납합니다. 10초 후 무중력 모드로 변경됩니다. 카운트 10. 9. 8······.>

 “언제 봐도 신기해. 꼭 내가 마법의 집에서 살고 있는 거 같아.”

 주위를 둘러보는 티아가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얼마 전에 같이 본 마법사 영화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명령’이라는 시동어만으로도 알아서 움직여주니까. 티아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 나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확인했다. 수납한다는 콘의 안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 없이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숨바꼭질 하듯 몸을 숨기기 시작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흡사 살아있는 것처럼 작은 물건들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소파 위에 올려져있던 외투는 얌전히 옷걸이에 걸려 같이 사라졌다. 수납이 완료된 곳은 필요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몸을 숨겼다. 이제 우리가 서 있는 거실만을 남겨두고 물건도 공간도 모두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휑하네. 단칸짜리 방에 막 이사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변화는 곧 출발의 시작을 의미했다. 처음 콘을 시동했을 때 느꼈던 것처럼 발이 무언가에 밀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딱딱하던 모든 벽면들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걸 꽂거나 시간이 지나면 공기가 빠져나가는 일이 없게끔 재질 역시 허접하지 않았다. 직접 실험해본 결과이니 믿어도 좋다. 바닥이 점점 탄력을 가진 푹신한 쿠션으로 변한 이유는 이동 도중에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이리저리 굴려질 테니까.

 준비가 끝나자 곧이어 나와 티아는 부드럽게 위로 떠올랐다. 나는 버둥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그 느낌을 즐겼다. 물론 티아는 이 순간을 보급소에 가는 것 다음으로 제일 마음에 들어 하기 때문에 걱정할 건 전혀 없었다. 아, 이젠 보급소에 방문하는 걸 제일 좋아하려나. 질리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는 분명 티아에게 보급소란 신기한 것투성이일 것이다.

 풍성마냥 두둥실 허공에 떠올라있는데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내 몸인데도 내 마음대로 통제하는 게 어려웠다. 티아는 적응되기 전에 느껴지는 이런 부분들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심지어 지금도 입을 벌린 채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내 표정도 저러진 않겠지. 아마 저 정도는 아닐 거야. 티아의 표정은 귀여움을 넘어 코믹하기까지 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아깝네, 두고두고 놀릴 수 있을 텐데. 지금이라도 콘에게 부탁해봐?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티아가 내가 싫어할만한 질문을 시작했다. 그건 지금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투명 모드로 해도 돼?”

 올게 왔군.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한 질문 리스트에 당당히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예상된 답을 할 수 있었다.

 “무섭지 않겠어?”

 하지만 이어지는 티아의 말은 솔직히……. 반칙수준이었다.

 “처음도 아닌데, 뭘. 게다가 매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흐릿해졌다. 티아가 침울해하는 원인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좋지? 매번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패닉으로 인해 뇌가 굳어버린다.

 나는 평소의 하던 실없는 농담으로 어물쩍 넘기지도, 적절한 단어를 찾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다가 결국은 멍청이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다. 나는 티아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마땅히 누려야할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해보는 일들을 위험하다는 핑계로 막아왔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안감에 미쳐버릴지도 몰라서. 내 이기심 때문에 보급소에 가는 것도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장을 보고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데리고 가는 것조차도. 그로 인해 티아는 집 이외에 세상을 모른다. 내가 보급소에 있을 때 홀로 무인 정거장에서 기다려야할 티아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그게 티아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고, 고집스럽다고 욕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내 욕심이었다.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못하게 하고 싶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티아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불치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록 바이러스에 전염되거나······, 그로인해 동생을 잃는 것. 그렇기에 가능하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에는 티아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오늘처럼 사람들이 많은 날에는 안 좋은 생각이 계속 불어나기만 하는 걸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과 동양식 명상과 티아의 시무룩한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까지고 티아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결국은, 언젠가는 티아도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지금부터 티아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게 옳은 결정일 수도 있었다. 나는 티아를 보호해주고 싶은 것이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가 되길 원한 게 아니니까.

 아빠가 떠나기 전 해준 말이 있었다. 현실 속에서 감출 수 있는 건 없다고. 꽁꽁 숨겨두어도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앞에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짧은 여행 속에서 티아가 무엇을 느끼고 알아챌지 두렵지만 무르고 싶지 않아졌다.

 “한 면만?”

 다만 어느 정도는 협상을 통해 조절해볼 생각이었다. 뭐든지 급해서 좋을 건 없었다.

 “좋아! 이번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게. 더 고집하다가는 쓰러질 거 같으니깐!”

 웬일로 티아가 바로 수긍해 놀랐다. 웬일이지?

 “네가?"

 깜짝 놀란 덕분에 음이 이탈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목을 가다듬으면 될 일이다.

 “어. 지금 오빠, 걱정 많은 노인네 같이 굴고 있잖아. 아, 미안. 걱정 많은 오빠라고 정정해 줄게. 그러니까 그 눈빛은 좀 거둬줘.”

 숨죽이며 웃는 게 아주 얄미웠다. 저 미운 입술을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티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엉망으로 헝클어뜨리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결과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중간하게 되어버렸다. 허우적거리는 게 오히려 티아에게 웃음만 선사해준 꼴이 되었다. 어,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내가 정성스레 묶어주었던 티아의 머리카락이 나 때문에 정전기 폭탄을 맞은 것 같이 변해버려 당황했다.

 미안한 마음에 티아의 눈치를 보자 웃음을 멈춘 티아의 눈빛과 입술이 노리고 있던 고기를 낚은 동물마냥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티아는 엉망이 된 머리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음에도 그걸 이용했다.

 “역시 다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아.”

 손으로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티아의 눈빛이 매우 불편했고, 말한 내용은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체 누굴 닮아 저리 영악한지.

 “뭐?”

 일부러 못들은 척 했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걱정 안한다며?”

 역시나. 허리에 두 손을 척하고 올려두고는 티아가 대꾸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 두 개만 펴서 티아에게 보여줬다.

 “2개.”

 “3개! 대신에 오빠가 원하는 곳으로 한군데 제외해도 돼.”

 크게 양보한다는 뉘앙스로 티아가 말을 끝맺어버렸다. 더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어서 결국 두 번째 협상은 티아한테 유리하게 결론이 났다. 티아가 진지하게 나오면 나는 항상 지고 만다니까. 오빠라는 위치가 그렇지 뭐.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나는 결과에 승복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내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티아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혹은 평소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얼굴을 붉히고선 좋아하는 티를 팍팍 냈다. 일부러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의심의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젓는 나를 티아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내가 콘을 부르자 다시 기쁨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한 면은 임의로 지정하고 나머지 면들에 투명 모드를 적용해줘. 아! 물론 위와 아래는 투명 모드에서 제외야.”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치사해.” 라는 중얼거림은 가뿐히 무시했다.

 <임의로 지정된 ‘5’번째 면을 제외하고 전부 투명 모드로 변환합니다.>

 콘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투명 모드가 실행되었다. 새까맣게 칠해진 연필자국이 지우개로 지워지는 걸 보다 뭔가를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참.

 “언제 나빼고 둘이서 짰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따지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아니!”

 <그런 적 없습니다.>

 심지어 콘의 목소리에서마저 웃음기가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더욱 의심스러웠지만 두 사람(?)이 저렇게 싱글벙글 인데 더는 따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마음마저 풀린 건 아니었지만.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 말한 위와 아래는 말 그대로 내 위에 있는 천장과 내 아래에 있는 바닥을 의미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투명해지고 있는 부분에 천장과 바닥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 콘을 매수했는지 나중에 꼭 밝혀내야지. 나중에 오늘과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콘은 다 좋은데 가끔은 명령대로 수행해야된다는 규칙의 허점을 티아를 위해 이용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알아내야겠어. 내가 몰래 다짐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티아는 설정이 완료되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벽 쪽으로 양 팔과 다리를 안으로 모았다 밖으로 빼는, 일명 개구리헤엄 동작을 이용해 앞으로 이동했다.

 “와아!”

 순식간에 한쪽 면에 두 손을 대고 그대로 통과해 나갈 것처럼 코를 바짝 댄 상태로 바깥 풍경을 본 티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런 티아의 태도가 의심스러워 반사적으로 비꼬는 말이 나갔다.

 “지금 감탄한 거야?”

 감탄할 만한 광경은 없을 텐데. 반은 의문, 반은 정말일까. 싶은 마음에 나도 티아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 이동했다. 도달했다는 걸 볼 수는 없었지만 손에 닿아오는 감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푹신했다.

 티아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내려 밑을 본 나는 눈가를 좁혔다. 큐브 안은 잔잔한 호수 같은데 반해 바깥의 풍경은 여전히 삭막하고, 복잡했으며,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다시금 티아의 미적 감각이 의심스러워졌다. 만약 사실이라면 당장 시력 확인이 필요할 만큼 심각했다. 티아가 감탄한 바깥 풍경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뉴라(*BChouse들을 엮고 있는 검고 굵은 선)와 과일마냥 주렁주렁 달려있는 BChouse들이 전부였으니까. 아름다운 바다가 햇빛을 받아 찰랑이지도,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다채로운 색을 가진 식물들이 땅을 물들이고 있는 광경도 없었다. 오로지 검은 상자들만이 빼곡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보급소에 다녀와서 시력 검사를 해봐야겠어.

 <준비가 다 되었으면 운행을 시작할까요?>

 진지하게 그리고 약간은 장난을 담아 고민하던 나와 여전히 바깥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는 티아를 콘이 재촉했다.

 “그럼, 가볼까?”

 “준비됐어!"

 “이동해줘.”

 <경로를 재확인합니다.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위험한 줄타기'를 시행합니다.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딱딱한 말투와는 다르게 모순적인 문장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매번 듣는 거지만 콘은 가끔 말투랄까, 단어가 재미있더라.”

 티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위험한 줄타기란 단어가 특히 그렇지. 다른 곳은 어떻게 불리는지 궁금하네.”

 “나도!”

 나와 티아는 서로의 말에 동감하며 한참을 낄낄거렸다.

 “이동하면 아마 가까이서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난 좋아. 바깥을 볼 수 있잖아. 가상현실에서 해봤던 서커스 같아서 좋아.”

 “특이한 녀석.”

 “겁쟁이.”

 또 다시 우리는 서로가 한 재미없는 이야기에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벽에서 떨어져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위험한 줄타기'란 뉴라(=줄)들을 이용해 이동하는 것을 뜻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고전 영화 타잔이라는 명작을 보았다면 위험한 줄타기라는 방식을 이해하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콘 그리고 여타 BChouse들은 오로지 이 방법을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며, 덧붙이자면 정말로 위험해서 지어진 명칭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일어날 위험으로부터 긴급하게 대피해야할 경우가 생겼을 때, 예상치 못한 파손이나 충돌이 생겨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이란 단어가 붙은 것뿐이다. 보통은 놀이기구이자 이동기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위험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뭐, 그게 불만인건 아니다. 단지 이따금씩 지루해져서 그렇지.

 앞과 뒤로 움직이는 일련 동작의 반복과 반복, 그리고 위험하지 않다는 안도감이 합쳐지면 긴장은 풀리기 마련이었으니까. 때문에 지루함이 극에 달할 때면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며 공기 파동에 의해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무기력한 상태로 멍하니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도 티아만큼이나 이걸 즐겼다. 마치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처럼. 다른 BChouse들과 거리가 가까워질 때면, 부딪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허리케인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결국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걸 봤을 때만큼. 비약하자면 내가 마치 영화 속의 타잔이 된 기분이 간혹 들기도 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가나봐.”

 나와는 다르게 티아는 여전히 바깥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투명한 벽 너머를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흠, 이건 좀 무서울 정도인데.”

 수십 채의 BChouse들이 '위험한 줄타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 모습은 좀 징그러웠다. 우리는 그들 대부분이 르 레브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티아는 정확한 의미까지는 모르고 있다. 르 레브의 추첨이 가진 의미와 치유의 섬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플램에서 달콤한 글만 적어놓았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들이었고, 또 가본 사람조차도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나는 우연히 아빠와 삼촌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적어도 그들만큼은 알고 있었다. 티아에게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BChosue들이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는 티아를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면서.

 화재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때마침 콘이 평소와 다른 길로 방향을 튼다. 오늘만큼은 경로를 바꾸게 해준 추첨이 고맙게 느껴졌다. 애초에 추첨날짜가 오늘이 아니었다면 더 고마웠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더 이상의 불만은 의미가 없었다.

 “아.”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뭘 기대한 걸까. 보이는 풍경은 변화가 없었다. 평소 내가 이용하던 경로와는 그 길이가 2배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은 보이지 않았고, 검은 큐브들은 많았으며, 하늘은 안개에 섞인 알 수 없는 먼지와 모래들로 인해 거대한 시계마저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휙 하고 빠르게 지나쳐가는 바깥을 무덤덤하게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옆으로 려 티아를 확인하려했다. 홀린 듯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티아를 보자 온몸이 굳어버렸다. 다급하게 티아의 어깨를 잡아채 돌렸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두려움이 아주 잠깐이지만 나를 잠식했다. 티아의 시선에 내게 향하기 전에 표정을 정돈해야했다.

 “왜?”

 “이제 다른 배경으로 할까? 곧 도착할 거야.”

 망했다. 웃고 있는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티아와 눈이 마주친 후였다.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을 거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싶은 걸 참았다. 티아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억지웃음을 유지했다. 티아는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티아한테는 거짓말이 잘 되지 않는다. 그건 티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유를 말해주길 기다리는 티아의 시선을 간신히 피하지 않았다. 뭔가를 말해야했다. 지금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장난을 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티아가 관심이 더는 바깥으로 향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한 면만 투명 모드로 두는 건 어때?”

 좀 더 에둘러서 표현하거나 마땅한 이유를 들어 제안을 했어야했다. 내게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바로 대답하지 않는 티아로 인해 긴장하면서도 나는 내 속을 읽고 싶은 듯이 시선을 마주쳐오는 티아에게 미소 띤 가면을 벗지 않고 응시했다. 눈을 먼저 피한 것은 티아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티아가 왠지 한숨을 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뜨끔했다. 잠시 후 티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누가 봐도 한발 물러서 준 것이다. 티아의 배려로 인해 겨울 한파처럼 얼어붙었던 싸늘한 공기가 봄이 오듯 풀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복잡하지 않은 경로로 완전히 접어들면서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개구리헤엄으로 벽면에 손을 집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래의 검은 배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신 보급소에 가면 과일 바구니에 귤도 넣어줘.”

 갑작스레 티아가 어려울 수도 있는 부탁을 해왔다. 불만 표현이자 심술이었다. 잠시 놀랐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알았다는 표시로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여 말했다.

 “그래. 오렌지도 넣어줄게.”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유를 묻거나 떼 쓴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내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들어주는 동생이 기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렌지는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그게 보상이냐고 헛웃음 짓는 사람은 시계 도시 내에서는 없을 것이다. 귤이나 오렌지 같은 과일은 Winter 보급소에도 많지 않은, 귀한 품목 중의 하나였으니까. 가져간다고 해도 한 사람당 1개에서 2개 정도가 한계였고, 상황에 따라서는 보급소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티아가 먹고 싶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라는 마음도 한 몫 했기 때문에 선뜻 말할 수 있었다.

 물론 보급소에 나오지 않았거나 이미 다 소진되었다고 해도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넣어준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차선책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오히려 시장에서 구하는 것보다 100%의 확률을 자랑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만큼 더 쉬웠다. 나에게. 오로지 우리만이 가능한 방법. 좀 귀가 아프긴 하겠지만……. 그건 티아만 있으면 해결되겠지. 애초에 받을 수 없다는 가정은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 사람의 싫어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티아에게 당장이라도 말해주고 싶어 근질거리는 걸 나중을 기약하며 참았다. 덕분에 얼굴에 열이 오르지만 괜찮다. 티아도 기뻐하겠지. 그 생각 때문에 보급소에 도착하는 일이 처음으로 기대되었다.

 어느새 유일하게 하얀색이기에 더 눈에 띄는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하얗고 뿌리가 달린 괴상한 압정 모양처럼 생긴 무인 정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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