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미쳤나! 지금이 몇 시인데 차라리 결근을 하지.’
평소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놈이 오늘도 생긴 꼬락서니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런 꼴을 보일 때는 반드시 비누 냄새를 풍겼다. 예상한대로 김인태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 사람들의 비웃는 미소가 나지막한 소리를 실어 엷게 번졌다.
“어이! 이차장! 집사람 요즘은 주상복합아파트 안 가는 가? 거기 요즘 물이 좋다던데.”
들은 척 만 척 하며 업무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정신이 벌써 산만해진 상태였다. 이선근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그려져 있었다. 다른 직원들 인상도 마찬가지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특히 여직원은 아예 꼴도 보기 싫은 지 퇴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전 직원이 저 말이 무슨 말인 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를 비하하는 말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 그보다 주상복합아파트란 말은 부장이 입만 열면 이 차장의 염장을 파헤치는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에, 이 부서에서는 이미 스크린골프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근무 시간에 골프를 친다. 그리고 차장의 아내를 물이 좋다는 말. 여자를 비하하는 말에 여직원들이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
“부장님!”
이선근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일어서 부장 자리로 갔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그리고 지금 몇 시 입니까? 그 골프장이 목욕탕으로 바뀌었습니까? 비누 냄새가 많이 나는 데. 왜요? 때 밀어 줄 사람이 없었어요?”
난처할 때 나오는 특유의 말 버릇이 또 나왔다.
“아니! 왜 그렇게 심사가 뒤틀어져 있어. 나는 그 게 아니고 애기 엄마 친구가 거기에 매일 보여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사람이 왜 그렇게 속이 좁아!”
이선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모습이 부서원들에게도 신호탄이 되었다. 전부 고개를 흔들면서 퇴근할 준비에 들어갔다.
“제가 바로 전화 해 볼까요? 집사람 친구가 매일 거기 가는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구시렁거렸다.
“사람이 왜 그래?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인데.”
사람 염장을 파헤치는 방법도 참 별의 별개가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선근은 퇴근을 하는 직원들을 따라서 같이 퇴근을 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개 버릇이 또 나왔다. 아직 남아 있는 직원이 있는데도 부장 발은 이미 책상 위에 가 있었다. 미친 새끼!
이선근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광견병에 걸린 거나 다름없는 미친 개로 보여 주먹을 내려 놓았다. 단지 재수없이 물렸다가는 전염이 될 까 두려워서였다. 도대체 사장이 어떤 약점을 붙잡혔길래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저 놈을 내치지 않는지, 당장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저놈과 맞붙었다가 물린 사람들은 광견병에 걸려 도살돼 불태워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회사에서 사라진 원인이 혹시 사장이 무슨 약점을 저놈에게 잡힌 게 아닌가? 저놈의 이빨을 무서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말이란 게 정말 이상했다. 잊을만하면 야릇한 눈으로 쳐다보며 아내를 내세워 직원들의 귀를 쫑긋하게 해 심장을 심하게 요동을 치게 만들었다. 분명히 무슨 약점을 잡았길래 무슨 곰탕처럼 계속 우려먹고 있지 않나. 언제쯤 우려먹을 건더기가 없어질까?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지만 김인태로 인해 한번 의심하기 시작한 아내에 대한 허구의 상상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렸다가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이런 허상이 시작된 발원지를 찾아가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이 또한 추한 짓이라 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적적한 마음에 찾아간 곳이 천명구의 골프연습장 겸 스크린골프장이었다.
“아이고 오랜만이네. 바쁜 모양이지. 한번씩 차라도 한잔 하러 오지 그랬어!”
반갑게 맞이 해주는 천명구와 악수를 하고 앉았다.
“자리가 꽉 찼네요. 사장님 혼자 돈 다 버는 거 같네요. 허허허”
“안 그래. 절반이 허사장 회원들이지 뭐. 참! 얘기 들었나? 아마 다음주부터 여기를 확장할 거야. 인테리어는 허사장인 맡고.”
이선근이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치는 소리로 물었다.
“그럼! 허사장은 뭐 할게 따로 있습니까?”
천명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야 걱정이 뭐 있겠는가. 건설회사 있지. 나이도 젊지. 게다가 그 놈들끼리 똘똘 뭉쳐서 일감 끊어질 일 없지.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그렇게 걱정할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스크린연습장을 시작해 시끄럽게 했습니까?”
“허허허! 장사꾼이잖아. 나도 그 당시 입장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야. 십 원짜리 한 푼도 길에 떨어진 걸 보면 줍는 거나 같아.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을 때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만 흩어질 회원들을 붙잡으려고 그 놈이 하려고 했어. 물론 돈 욕심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놈들 생각이 맞았어. 회원들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잘 붙잡은 셈이지. 허허허. 그것도 모르고 내가 조급하게 굴어서 옹졸한 짓만 했지. 죽어서도 창피할 짓을 자초했어. 허허허!”
이선근이 천명구의 손을 잡으며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꼭 무슨 영웅처럼 얘기들 하시던데.......”
“영웅은 무슨! 바빠서 여기 못 와서 그렇지 자네란 성격도 비슷하고 여기 오는 사람들과 똑 같이 평범한 친구야. 다른 게 있다면 이 도시에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 집 아들이고 힘세고 주먹 센 거 밖에. 허허허!”
그게 무슨 평범? 어이도 없고 천명구를 비웃기도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천명구도 그렇게 말해놓고도 자기도 어이가 없는 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 요란스럽게 뚜벅거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박영걸이었다. 부라린 눈에는 오로지 붉은 공기만 보였다. 금새라도 누군가를 잡을 먹을 기세였다. 숨소리는 거칠었다. 씩씩대며 노려보는 눈과 마주친 천명구가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고도 이선근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흥분한 그에게 저게 또 나를 무시하나? 이 와중에도 이선근의 자존심은 상했다.
구부정하게 일어서는 천명구가 위험을 느꼈는지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이선근이 천명구 옆에 바짝 붙여 팔을 붙잡고 긴장한 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박영걸이 평소처럼 주둥이를 한쪽 비틀어 올린 채 힐끗 쳐다봤다. 태워날 때 자기 어머니부터 비웃는 인상을 달고 나온 놈이 분명했다. 저러다가 입 돌아가겠다. 걱정도 일으킬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