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가 오른 김인태가 인정한다는 의미로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김인태는 주두희가 박영걸의 아내인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몸짓이었다.
김인태의 엉큼한 대응이 이들의 대화를 서서히 부드럽게 녹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워해도 친한 친구가 있듯이 이들은 마치 천년 지기 친구나 된 것처럼 술이 들어 가면 갈수록 손발이 짝짝 맞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끝내는 음란한 주제로 박장대소를 치는 관계로 발전해버렸다.
그래도 자존심만은 굳건히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취한 와중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게 수(數) 싸움까지 해대며 밀고 당기면서 적절하게 친해졌지만 술 자리가 길어지면 질수록, 입으로 들어가는 수량이 많아질수록, 박영걸의 이해도와 지능지수가 확연하게 딸린다는 게 드러나고 있었다.
중소기업의 영업과 관리를 맞고 있는 부장과 대기업의 생산직 근무자간의 기세 싸움은 개울 둑에서 자란 들국화와 온실에서 자란 들국화를 화분에 다시 심어 길가에 내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지나치는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온실 속에서 자란 들국화가 힘없이 고개 숙여 쳐져 가듯이, 박영걸의 기세가 꺾여가며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나오고 있었다.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 중에는 김인태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말인 딴 년이란 말이 재탕해 나오기도 했다. 잠시 가책을 느끼다가 그럴 필요는 없다며 김인태는 머리 속에서 털어내 버렸다.
마치 무용담 하듯이 박영걸은 김인태 당신들은 회사 돈을 유용해 딴 년들과 놀지만 우리는 우리가 피땀 흘려 벌은 정당한 돈으로 딴 년들과 골프를 치러 다닌다며, 도둑 놈으로 취급하지는 말라고 했다. 차이는 누구 돈으로 노느냐 뿐이지 하는 짓은 똑같았다. 그렇게 변명이 늘어나고 술도 같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면서 대화는 점점 더 음탕한 구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주상복합아파트에 있는 스크린골프장에 가면 물이 그렇게 좋다더군. 웬만한 나이트클럽보다 이거 구하기가 쉽다던데. 김형도 거기서 하나 건졌겠지?”
박영걸이 눈꼬리를 음흉하게 돌렸다. 김인태는 곧바로 응답을 하지 않았다. 여기는 자기 집 근처라 다른 자리를 획 둘러 오고 검지손가락을 살짝 올려 귀를 자기 입 가까이 붙이라며 손가락질을 까딱까딱했다. 박영걸이가 시키는 대로 귀를 김인태 입술에 바짝 붙였다.
“오늘도 거기서 건진 거 하나 따먹고 왔어. 허허허!”
박영걸이 솔깃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인태의 입술에 자기 입술이 부딪힐 정도로 붙이고 늘 만나는 친구였던 것처럼 채근했다.
“새끼 좀 쳐. 나도 하나 먹게. 몇 살이래?”
“마흔이나 마흔 둘 사이. 그 정도면 영계지. 한창 바람 날 나이잖아. 그냥 툭 건드려도 넘어 올 나이지. 그년 주위에 노는 여자들이 늘려 있어. 새끼 치기 해 볼 테니까 당신은 주머니만 든든하게 채워오면 돼. 허허허”
김인태는 침까지 튀겨 가면서 으쓱거렸다. 그 침은 고스란히 박영걸의 입으로 날아 들어갔다. 마치 주두희의 침이 누울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서둘러 가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튕겨 들어간 침을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닦으며 말했다.
“먹기 딱 좋을 나이네. 돈 걱정은 말고 자리만 자주 만들어. 잘 알면서. 허허허!”
박영걸의 기분이 들어올 때와는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기분이 나쁠 때 마신 술로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지만 지금은 흥에 겨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인태는 이 말에 비위가 또 꼬였지만 주머니를 털리지 않아도 된다는 데만 위안을 삼으며 박영걸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버릴 까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그때 박영걸의 꼬인 혀 소리가 먼저 나왔다.
“나가지 뭐! 내가 한잔 쏠 테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젊은 여자들 있는 데 아는 데 없어?”
이게 웬 떡이냐! 하루에 두 여자! 김인태는 쾌재를 부르며 비틀대는 박영걸을 울러 매듯이 밖으로 데려다 놓고 적게 나온 술값은 자기가 계산을 했다.
밖을 한번 힐끗 보고 평소 영업상으로 자주 가던 룸살롱에 급히 전화를 해 평소에 하던 대로 양주 두 병을 빼라며 입을 맞춰놓고, 박영걸을 택시에 태워 룸살롱으로 갔다. 이런 고주망태가 된 사람이던,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거래처 손님이던, 지금 가는 룸살롱에 가면 뚜껑을 따지 않는 양주도 딴 걸로 계산해 양주 원가의 반값으로 현금을 받는 게 김인태와 룸살롱간에 관행이 돼 있었다.
같이 간 사람들이 고주망태가 되면 가짜가 나온 건 당연한 거래였고 또한 그만큼 돈도 받아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불타는 밤을 보낼 기대로 죽마고우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간 룸살롱에서 나올 때는 박영걸은 혼자였다.
“어! 같이 온 사람은 벌써 아가씨하고 자러 갔어?”
“아뇨! 벌써 집에 갔어요.”
박영걸은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이 짓이 독약이 돼 버렸다. 그렇잖아도 흔들리던 머리를 한번 더 흔들어버렸으니 중심이 잡힐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 바로 콕 꼬꾸라져버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박영걸의 귀에는 이해 못할 말들이 계속 조잘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일어나세요. 방 하나 잡아 드릴까요?”
향긋한 향기가 코로 들어오는 것만 느끼고 박영걸은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술이 덜 깬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햇빛을 가린 하얀 천만 보였다. 향긋한 향기는 그대로 나는 데 어디서 나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기가 어디지?’
TV와 작은 원탁 탁자와 의자. 누웠다 앉은 곳은 작은 침대. 어떻게 된 판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틀대며 침대에서 내려 탁자로 갔다. 탁자에는 메모지가 있었다. 기함하는 것 말고는 할게 하나도 없었다.
‘오빠! 깊이 주무셔서 깨우지 못하고 먼저 갑니다. 더 주무시고 가세요. 모텔 비 합해서 250만원만 결제 해주시면 됩니다’
아래에 전화번호와 계좌번호도 같이 적혀 있었다. 깜짝 놀라 천장을 한번 보고 아래도 한번 봤다. 250만원? 무슨 술을 어떻게 마셨길래? 손이 빠르게 몸으로 갔다. 옷이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향기는? 당황한 상황이 아니면 향기의 주인을 찾아 보듬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인 향기였다. 그러나 향기만 몸에 짙게 베여있지 방에는 단 한 명. 홀로였다. 그때 벨이 계속 울렸다.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허둥대며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들리는 목소리.
“사장님! 청소해야 하는 데 그 방만 남았어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 속에 옷은 가지런하게 잘 정리돼 걸려 있었다. 집사람 솜씨로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집이 아니란 걸 확실하게 알게 해주나?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갔다. 뭘 마셨길래 250만원? 누구랑? 눈알이 아릴 정도로 태양열은 광열 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던 김인태도 택시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