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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즈 앤 스노우
작가 : 쿠페
작품등록일 : 2018.12.31

옛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 두 킬러의 이야기

 
16
작성일 : 18-12-31 23:57     조회 : 297     추천 : 0     분량 : 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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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곳은 볕 한 줌 들지 않는 방이었다. 창문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문마저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 공간이 외부와 단절된 밀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건 방의 한 쪽 끝에 있는 철책 달린 승강기였다. 호텔에서 창고로 쓸 법한 지하실 같은 구조였지만 방 안에 청소도구 같은 집기는 찾을 수 없었다. 방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휑하게 비워져 있었다. 바닥과 천장 사이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사물은 철제 의자들이나 탁상보다 조금 큰 규모의 나무 테이블과 그 위에 어지럽게 널린 도구들이었다. 각자 다양한 용도를 가지고 있는 도구들은 서로 뒤섞여 그것들의 쓰임을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창백한 백열등이 천장에서 늘어져 끼릭 흔들리며 음산한 음영을 자아냈다. 방에는 사람이 있었다. 라틴계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의 존재야말로 이 공간의 목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검은 포댓자루를 뒤집어쓰고 철제 의자에 두 손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긴장과 음산한 공포만이 고요한 하모니를 연주하던 방에 난데없는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도 승강기가 작동하는 그 소리에 반응했다. 와이어가 감기며 거대한 기계가 기동하는 소리가 시각이 차단된 남자에게 벌레처럼 들러붙었다. 이윽고 승강기가 도착했고 철책이 차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강기에서 나오는 발소리는 여럿이었다. 거침없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들은 각자 방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서는 것 같았다. 일부는 남자 쪽으로 걸어오기도 했다.

  복수의 발소리가 지나가고 또 하나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 여유로운 움직임에는 일종의 경쾌함마저 있었다. 음침한 지하실이 아니라 사교회장의 홀에 어울릴 것 같은 발소리였다.

  별안간 남자의 얼굴을 가리던 포댓자루가 확 벗겨졌다. 갑작스런 빛의 자극에 남자가 눈을 찡그렸다. 남자의 얼굴은 봐줄만 했다. 한쪽 눈이 잔뜩 부어 눈꺼풀을 가릴 정도였고 입술이 터져 턱 주변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성한 곳보다 성하지 않은 곳이 더 많을 듯한 얼굴이었지만 남자는 흐릿한 시야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에 힘을 줬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다양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건실한 직업에 종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남자의 자루를 벗긴 것은 아리아계 백인 미녀였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금발과 푸른 눈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녀는 자루를 갈무리하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남자는 그를 보게 되었다.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바지는 완벽하게 맞춤으로 제작된 검은 테일러드 팬츠였고 셔츠는 브라운과 차콜을 맵시 있게 조화시킨 디자인이었다. 고급품일 것이 뻔한 셔츠를 황색 계열의 수트가 덮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두꺼운 순금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메스티소 특유의 가무잡잡한 피부에 밝은 머리색이 눈에 띄었다. 얼굴에 새겨진 관록은 그를 적어도 중장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게 했지만 그 얼굴이 자아내는 표정은 짐짓 천진한 것이었다.

  남자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남자는 가쁜 숨을 토해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데르베스…!”

  “내 이름을 아는군?”

  남자에게 이름을 불린 사내, 디에고 데르베스는 미소 지으며 철제 의자를 끌어왔다. 커다란 손바닥에 집힌 의자를 사내의 앞에 놓고 앉은 디에고는 그제서야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디에고가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사내는 움찔했지만 디에고의 큼지막한 손가락은 개의치 않고 남자의 미간 앞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몇 번 남자의 머리칼을 매만진 디에고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은 내가 누군지도 안다는 말이겠지?”

  디에고의 말은 어떤 의미로 터무니없는 겸양이었다. 이 도시에서 디에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디에고 데르베스는 산 호엘로 최고의 거부 중 하나였다. 괴팍한 성격과 호쾌한 씀씀이로 유명한 디에고는 거리의 소년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도로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기 쉬운 인물이었다.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는 하나도 없었지만 전국에 몇 개나 되는 지점을 가진 거대 회사의 회장들이 사실은 디에고가 뒤에서 조종하는 꼭두각시라는 것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좋아 친구. 얘기해봐. 자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나?”

  창백한 백열등 아래,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흰 피부의 여자가 디에고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디에고는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고개를 주억거린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남자에게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자네 혹시 밭 가꿔봤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남자는 의혹에 가득 찬 표정으로 디에고를 바라봤다. 하지만 디에고는 전혀 개의치 않고 철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사소한 잡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밭 말이야 밭.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밭 가꾸는 걸 좋아해. 흙을 만지는 감각은 언제나 나를 평화로운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게 해주지. 나는 내 밭이 필요로 하는 건 뭐든 다 주고 싶어. 햇빛도 주고 물도 주고 거름도 주지. 가끔은 벌레를 잡기 위해 농약도 좀 쳐가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농사에는 이로운 벌레가 있고 해로운 벌레가 있지만, 결국에는 둘 다 조금씩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야.

  예를 하나 들어보지. 개미는 눈에 띄지 않지만 농사일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체야. 그놈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내가 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씨앗을 옮기고 썩은 것들을 치우고 환경을 순환시키면서. 그것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아주 훌륭해.

  그에 반해 진딧물이란 놈은 고약하지. 이놈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내 작물들의 즙을 빨아먹고 결국 말라죽게 만들어. 그러고서는 다음 나무로 이동하지. 좋지 않아. 난 그렇게 염치없는 생물을 본 적이 없어.

  재밌는 건 이 부분이야. 진딧물이 작물을 말려 죽여가며 만드는 달콤한 즙액에 개미들은 환장을 한단 말이지. 이게 내가 진딧물을 보이는 즉시 잡아 죽이지 않는 이유일세. 밭에 조금은 해롭고 개미를 나태하게 할지라도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생물체가 저런 것으로 행복해진다면 좀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공생이라는 말이지. 이충도 해충도 모두 알아서 뒤섞여 살아가는 시스템이란 말이야.

  하지만 진딧물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진다? 그건 곤란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거지. 작물은 말라죽고 개미들은 즙에 취해 움직이지 않고 결국 밭 자체가 죽게 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전보다 훨씬 굳어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 도시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는 사람이야. 나는 잡다한 것을 팔지만 항상 전체를 고려하면서 장사한다네. 균형. 그게 중요한 부분이지.

  그런데 요즘 들어 문제가 조금 생겼어. 내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지역에서 내가 취급하지 않은 물건이 돌아다니는 거야. 분명히 내가 유통시킨 물건은 아닌데 말이지. 아니, 오해하진 말아주게. 나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존경하지. 문제가 되는 건 물건의 품목이야. 그게 샌드위치나 침대보 같은 거였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성실한 친구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의향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말이지 친구. 내 구역에 돌아다니던 그 물건은 아쉽게도 샌드위치가 아니었다네. 그건 필로폰보다 3배는 강력한 마약이었어.”

  남자의 눈은 서서히 긴장으로 물들어갔지만 디에고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건 좋지 않아. 주제를 모르고 마구 수를 늘리는 해충만큼 꼴같잖은 것도 없지. 나는 가급적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자는 것에 찬성하는 축이지만, 필요하다면 농약을 치는 것에도 유감은 없어.”

  “…….”

  “내가 해충을 잡을 때 어떻게 하는지 말해줄까? 해충이 창궐할 때면 나는 아픔을 참고 잎사귀 하나를 떼서 꿀을 잔뜩 발라놔. 그러고 조금 내버려두면 몰염치한 것들이 꾸물꾸물 모여들지. 달콤한 냄새 앞에서는 좌우도 분간하지 못하는 놈들이거든. 그러면 나는 핀셋으로 그중 한 마리를 떼어내고 잎에는 불을 질러버려. 왜 한 마리를 떼어 놓느냐고? 그래야 나머지 놈들이 숨어 있는 둥지를 찾을 수 있거든.”

  “그게 자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유라네.”

  디에고는 사내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젖혔다. 사내의 뒷목에는 갱단의 문장임에 분명한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디에고는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자네에게 운이 좋은 날이야. 얼마간 내 정원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긴 했지만 난 자네에게 큰 유감이 없어. 날 도와주면 자네는 그냥 놓아주지. 어려울 거 없어. 자네 친구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만 말해주면 돼.”

  “엿 먹어 이 자식아. 엿 먹어!”

  의자에 묶인 남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거세게 반항하며 디에고에게 침을 뱉었다. 도열해 있던 남자들이 나서려 했지만 디에고는 태연하게 그들을 제지했다.

  수트 포켓에서 행커치프를 꺼내 얼굴을 닦은 디에고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의자의 남자를 의뭉스런 눈길로 주시했다. 남자가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제풀에 화를 내려고 할 때쯤 디에고가 입을 열었다.

  “돈이 문제군. 그렇지?”

  “뭐…?”

  남자가 제대로 대꾸하기도 전에 디에고가 손가락을 튕겼다. 시립해 있던 금발 여자가 다소곳한 동작으로 디에고에게 몇 장의 종이를 건넸다. 디에고는 그것을 백열등에 비춰가며 찬찬히 읽었다.

  “호세 미겔. 25세. 산 호엘로의 슬럼가 출신. 부친은 석탄 공장에 재직하다 팔을 다친 후 퇴직. 모친은 방직 공장에서 재직 중. 누나가 있군. 아주 미인이야. 이런, 우리 회사 계열의 제지 공장에 다니고 있군?”

  디에고가 한 줄 한 줄씩 읽을 때마다 의자의 남자, 호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지 못한 그가 소리쳤다.

  “무슨! 무슨 짓을 할 셈이야!”

  “이런 원 세상에. 진정해 이 친구야.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할까봐 그래? 난 그저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래라고?”

  껄껄 웃은 디에고는 손에 든 서류를 탁탁 두들겼다.

  “자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겠어. 힘들었겠지. 일도 안 하는 주정뱅이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 등쌀에 시달려 아무 생기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한창 꽃다울 나이인 누나는 청춘을 구가하긴 커녕 공장 불빛 아래 시들어가. 지긋지긋했겠지. 달아나고 싶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겠지. 젊은 혈기와 건장한 몸뚱이가 있으니 준비물은 다 있는 셈이고. 안 그래?”

  디에고는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도와주지.”

  호세는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호세의 의문은 금발 여인이 디에고 앞에 서류 케이스를 들고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케이스를 열자 그곳에는 잡다한 문서 더미 대신 보안장치가 달린 일종의 컴퓨터가 있었다. 디에고는 익숙한 동작으로 어떤 코드를 입력하고 장치에 지문을 인식시켰다. 그런 다음 디에고는 경쾌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들고 호세에게 말했다.

  “지금 자네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까?”

  어딘가에 전화를 건 디에고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다 호세에게 한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아버지는 슬럼가에 있는 자네 집.”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말했다.

  “어머니는 시내 병원. 누나는 살바도르 거리에 있는 마트 근처라는군. 내가 어떻게 자네 가족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까?”

  호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확실한 예감 속에 미친 듯한 불안만이 가슴을 시커멓게 잠식했다. 디에고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는 그 물건은 호세의 핸드폰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그것을 내려다보던 호세는 이어지는 디에고의 말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지금부터 숫자를 셀 거야. 5초를 셀 동안 내게 자네 친구들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자네 가족이 무작위로 죽을 거야. 그런 다음 난 다시 5초를 셀 거고,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면 또 한 명이 죽을 거야. 자네 가족은 3명이니 총 15초만 버티면 되겠군.”

  “뭐… 뭐라고? 당신… 그, 그게 무슨…….”

  더듬거리는 호세 앞에 디에고가 호방한 동작으로 손을 휘저었다.

  “걱정 말게. 난 그렇게 불공평한 성격이 아니야. 자네 가족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자네 계좌로 1억씩 넣어주지. 어떻게 보면 자네 것을 빼앗는 셈이니 값을 치르는 거야. 자네로선 손해 볼 게 없는 거래군. 15초만 버티면 친구들에 대한 의리도 지킬뿐더러 3억이라는 부수입도 생기는 셈이니.”

  “그, 그런… 자, 잠깐 기다려….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호세를 조용히 지켜보던 디에고가 기습적으로 말했다.

  “5.”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기다려줘!”

  “4.”

  “안 돼! 기다려!”

  “3, 2, 1.”

  핏대를 올리며 외치는 호세와 상반되게 디에고는 무정하게 카운트를 끝맺었다. 그리고 동시에 호세의 핸드폰이 울렸다.

  호세는 공포에 사로잡힌 눈으로 더듬더듬 액정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은행에서 발송된 메시지는 그의 계좌의 입금 내역을 고지하고 있었다. 화면에 뜬 숫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억이었다. 호세는 떨리는 눈으로 몇 번이고 그것을 다시 읽었다. 그 현실감 없는 숫자는 그가 처한 이 상황이 악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호세가 스스로 현실을 자각할 수 있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5.”

  호세가 발작처럼 외쳤다.

  “안 돼! 하지 마!”

  “4, 3.”

  “하지 마! 하지 마, 개자식아 하지 마!”

  “2, 1.”

  죽음을 알리는 사신의 전보처럼 다시금 호세의 핸드폰에 알림 문자가 울렸다. 이번에도 한 치 오차 없는 1억이었다.

  “안 돼! 안 돼! 아아악!”

  호세는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치며 광분했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에는 격정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그것마저 기다리지 않았다.

  디에고는 다시 카운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빠른 속도였다.

  “5, 4, 3.”

  “잠깐! 말할게! 다 말할게!”

  “2.”

  “다 말할게! 말하겠습니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마지막 말은 거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절망과 공포 속에 오열하던 호세는 그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디에고를 바라봤다. 디에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를 마주봤다.

  “루이스 항구… 17번 창고에…….”

  디에고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을 보냈다. 여자를 제외한 사내들이 일제히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디에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철제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디에고는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호세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악인이 아니야.”

  호세는 눈물 젖은 눈에서 증오를 불태우며 디에고를 올려봤다. 디에고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탄식했다.

  “때로는 악인인 게 더 편할 때도 있지만.”

  품속에서 고풍스럽게 장식된 아스트라 권총을 꺼낸 디아고는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슬라이더를 장전하고 호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타앙!

  방금 전까지 울고 소리치고 분노하며 살아있던 남자가 한 순간에 생명 없는 고깃덩이로 화했다. 디에고는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는 호세의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고 차분하게 아스트라의 점검을 마친 후 그것을 다시 품에 넣었다.

  “계좌 이체는 끝났나?”

  “방금 완료했습니다.”

  컴퓨터를 조작하던 여자가 대답했다. 디에고는 듣는 둥 마는 둥 무성의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정대로 가족들에게 각각 1억씩 지급해. 아들 잃은 값 정돈 치러줘야지.”

  행커치프를 사용해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낸 디에고는 그것을 호세의 시체 위에 툭 던졌다.

  “너는 어떻게 하는 걸 더 좋아했을까? 내가 한 거짓말대로 가족을 잃고 네가 보상금을 가지는 걸 원했을까? 아니면 네 죽음을 대가로 가족들이 신세를 고치게 된 이 상황을 기뻐했을까?”

  당연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디에고는 피식 웃으며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빠져나왔다.

 

 

  디에고와 금발 여인을 태운 승강기는 천천히 위층을 향하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는 철책을 세워놓은 고풍스러운 느낌을 내고 있었지만 지상층 위로 올라가자 인테리어는 전면이 강화유리로 된 모던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지하실의 음침한 분위기와 다르게 1층의 로비에서 보는 그 건물은 유동인구가 대단히 많은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승강기는 계속해서 고층으로 올라갔다. 전면이 유리였기에 디에고는 밑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산 호엘로의 정경이 그의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디에고는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상을 당장이라도 움켜쥘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그 손은 유리에 막혀 멈췄다. 잠시 유리에 가만히 손을 대고 있던 디에고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에펠에서 본사의 직원들과 접촉이 있었습니다. 컬러네임 후앙과 마론 조와 격돌, 그 결과로 요원 마론이 사망했습니다.”

  디에고 옆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이 즉각 대답했다.

  “아아, 그 함정 만들던 친구? 똘망똘망하니 귀여운 친구였는데. 아깝군.”

  “요원 후앙은 사건 직후 현장에서 이탈해서 본사의 소환 명령에도 불응하고 있습니다. 단독으로 그들을 쫓으리라고 예상됩니다.”

  “뭐… 그 친구라면 그럴 만하지. 방해가 될 것 같나?”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전적과 이력으로 미루어 볼 때 회유나 협박이 어려운 인물이라 판단됩니다. 완전히 저희 쪽 의도에 맞춰 움직일 거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디에고는 창문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슬슬 승강기가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했나?”

  “예. 아마 목표는 인디고가 아닐까 합니다.”

  “좋아좋아, 완전히 바보들은 아니구만.”

  승강기 문이 열렸다. 디에고 데미안 데르베스, 오로(oro)라는 이름을 쓰는 청부조직의 대간부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빨리 만나보고 싶군. 로제 양과 블랑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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