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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즈 앤 스노우
작가 : 쿠페
작품등록일 : 2018.12.31

옛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 두 킬러의 이야기

 
6
작성일 : 18-12-31 23:50     조회 : 309     추천 : 0     분량 : 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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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다섯 번째로 잔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로제는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로제와 한 방에 앉아 있는 건 꿈도 환상도 아닌 로제가 아는 그녀였다. 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이라는 것이 누구라도 하나 태워죽일 듯한 것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저런 표정의 셴리와 한 방에 있는 상황은 같은 크기의 독뱀과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피해야 할 것이었다. 로제의 견해로는 전자가 조금 더 위험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목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낀 로제는 여섯 번째로 잔을 채웠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벨 마르셀 5구역에서도 최심부에 위치한 매니저 룸이었다. 고관대작들을 위한 최고급 소파가 싸구려 잡동사니나 되는 양 신발째로 다리를 올린 셴리는 긴 담뱃대를 꼬나물고 테이블 건너편의 로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테이블에는 고급 안주와 주류가 가득했지만 로제는 물잔 외에 아무 것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긴장에 울상이 되어 있는 로제와 반대로 블랑코는 호화스런 비밀 공간에 들어온 것을 순진하게 신기해하고 있었다. 블랑코는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무신경하게 먹어 치울 뿐 아니라 ‘이거 맛있다. 너도 먹어 보지 그래?’하는 식의 망언을 지껄여 로제의 인내를 시험했다. 로제의 생각이 자신의 손으로 파트너를 살해하는 불행한 사태에 이르렀을 때 셴리가 입을 열었다.

  “재밌는 이름으로 불리던데, 메이레이. 로제…라고 했던가?”

  “아, 그거. 저 녀석 코드야. 우리는 코드로 색 이름을 쓰거든.”

  “야!”

  로제가 다급하게 블랑코에게 눈치를 줬지만 블랑코는 아랑곳없이 테이블 위의 쇼트케이크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뭐, 어때. 정보상 앞에서 소란을 피운 이상 우리에 대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고. 어차피 들킬 거라면 우리가 먼저 정보를 줘서 유리한 위치를 얻는 게 좋잖아.”

  “그게 아니라…….”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던 로제는 셴리의 시선을 받고 고개를 푹 숙였다. 셴리는 깊게 빨아올린 연기를 요염하게 뱉어 올리며 잠시 그것을 응시했다. 영롱한 빛깔의 와인과 고급 제과 위에 셴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휘감겼다. 테이블 위에 머문 안개의 농도가 옅어질 때쯤 셴리가 입을 열었다.

  “색을 이름으로 쓰는 조직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어.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곳이란 것도. 다름 아닌 ‘내가’ 이름만 들어본 조직이라는 점에서 그 소문은 신빙성을 갖지. …메이레이 너, 살수(殺手)가 된 거야?”

  로제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셴리를 올려보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애타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끝내는 바닥을 향해 묵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셴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욕설로 들리는 중국어를 작게 내뱉었고 로제는 어깨를 움츠렸다. 흥미로운 눈으로 로제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던 블랑코가 눈치 없이 물었다.

  “그 메이레이란 건 로제의 본명인가?”

  “버린 이름이라고 해야겠지. 지금 저 애의 하는 짓을 봐선.”

  “뭐야. 중국인이었구나. 그런데 왜 로제 같은 이름을 고른 거야?”

  듣고 있던 셴리가 짜증내는 기색으로 가로막았다.

  “내가 먼저 묻겠는데, 그쪽은? 이 아이와는 무슨 관계지?”

  “직장동료야.”

  당당하게 대답하는 블랑코와 다르게 로제의 안색은 점점 흙빛으로 바뀌어갔다. 셴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직장동료……. 그렇다면 댁도 살수인가?”

  “히트맨이냐는 질문이라면, 맞아.”

  셴리가 소파에 몸을 묻으며 기가 차다는 듯 탄식했다. 로제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姐姐…….”

  “閉嘴. 我不想听.”

  셴리가 인상을 쓰며 뱉어 말하자 로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블랑코가 두 사람의 대화를 신기하게 바라보다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좀 물어보겠는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야?”

  방의 공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대번에 가라앉았다. 로제는 눈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것처럼 블랑코를 노려봤고 셴리는 표정 없는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블랑코는 평소 그런 종류의 조심스러움과 별로 사교적인 관계를 만들어두지 않는 부류였다. 결과적으로 블랑코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제에게 ‘친했어?’하고 기름까지 끼얹어 놓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로제가 블랑코의 음독살해 계획을 거의 다 세웠을 즈음 셴리가 대답했다.

  “저 애가 한 말은 중국어로 언니라는 의미야.”

  “으응…?”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해 눈을 끔뻑이는 블랑코에게 셴리가 무심히 말했다.

  “메이레이는 내 동생이야.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일이지만.”

  블랑코는 입을 쩍 벌리고 로제와 셴리를 번갈아 봤다. 머리색과 사소한 인상은 달랐지만 거기엔 확실히 닮은 얼굴이…….

  “안 닮았는데?”

  “피는 이어지지 않았거든.”

  블랑코는 아하, 하고 납득했지만 로제는 그렇지 않았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친자매 같은 사이야. 그렇지 언니?”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눈물겨운 노력이었지만 셴리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대조해서 바라보던 블랑코가 흥미롭게 물었다.

  “대체 로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그러는 거야?”

  “내 친부모를 죽였지.”

  블랑코가 경악과 경멸이 섞인 눈으로 로제를 쳐다봤고 로제는 얼굴을 감싸 안았다. 셴리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진정해. 메이레이가 저지른 일 중 유일하게 내가 빚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니까. 저 애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도 전 일이고. 저 애가 나를 피하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

  “부모의 원수인데 네가 빚을 진 거라고? 별 해괴한 소리도 다 듣겠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계산이 나오지?”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공감할 수 없는 계산이지. 뭘, 우리 동네에선 그렇게 드문 경우도 아니었어.”

  “허, 나도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니었지만 너흰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뻔한 이야기야. 들어도 재미없는 얘기고.”

  셴리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블랑코는 어깨를 으쓱하곤 남은 케이크를 입에 집어넣었다.

  “뭐, 로제가 네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라면 그걸로 됐어. 우리가 여기 온 게 헛걸음이 되진 않을 테니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난 아직 너희와의 거래에 응한 게 아니야.”

  “거 장사꾼 아니랄까봐 되게 깐깐하게 구네. 어떻게 해야 우릴 도와줄 거야?”

  “그건 너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잊지 마. 너희는 손님으로서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게 아냐. 도움을 원한다면 합당한 이유를 가져와야 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너희가 가장 욕망하는 걸 들어볼까.”

  로제와 블랑코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로제가 조심스런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USB를 올려놓았다. 셴리가 그것을 들어 살폈다.

  “이게 뭐지?”

  “뭐인 것 같아?”

  “소형 정보저장장치. 신형 소켓. 공들여 장식돼 있지만 색조는 다소 단조롭군. 스스로의 취향이 고급스럽다고 믿는 투의 장식이야. 정보단말에 일부러 세공을 해서 다닐 정도면 자기애가 강한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보이고. 실용성 위주의 도구에 자기만족적인 디자인이라. 허영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군. 주인은 섬세함과 오만함을 동시에 가진 재력가일 것 같은데.”

  로제와 블랑코는 잠시 서로를 마주봤다. 로제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언니, 우리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거야?”

  “너희가 내게 말해준 만큼. 지금도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블랑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정보상이라 할 만 하네. 대단한 눈썰미야.”

  “그래서? 너희는 정보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러 이곳에 온 건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주간지 기자도 아니고, 그럴 리가.”

  몽블랑 하나를 집어든 블랑코가 남는 손가락으로 USB를 가리켰다.

  “제리코 마르티네의 물건이야. 우리 손에선 해독이 불가능했어. 우린 그 안에 든 걸 원해.”

  “여기서 해독이 곤란하면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을 수배하는 정도로도 좋아. 이 물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의 정보도 좋고. 뭐든 간에 최대한 많은 정보가 필요해.”

  셴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제리코 마르티네…. 펠먼의 조인식에서 상대측 보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지. 사인은 독극물에 의한 중독사…… …설마 너?”

  셴리가 고개를 홱 돌려 로제를 쳐다봤다. 로제가 잽싸게 눈을 피했다. 블랑코가 중재하듯 헛기침했다.

  “뭐, 상상은 네 자유지만 확인받을 일은 없을 거야. 아무튼 이게 우리가 원하는 바야. 값은 얼마를 불러도 상관없어. 가족 할인 같은 걸 받으면 고맙긴 하겠지만 솔직히 우리가 좀 급하거든.”

  잠시 USB를 응시하던 셴리는 소파 손잡이 부분의 복잡한 음각을 어루만졌다. 단순한 장식인 줄 알았던 조각이 딸깍 소리를 내며 작동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방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매니저님.”

  “린다에게 가져가. 뭐든 알아낼 수 있는 걸 알아내라고 전해.”

  셴리는 들어온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USB를 들어보였다. 남자가 공손한 손길로 USB를 받아들고 나가자 로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언니.”

  “착각하지 마. 아직 너희에게 팔기로 정한 게 아니니까. 너흰 아직 내가 너흴 도와야 할 이유를 가져오지 않았어.”

  블랑코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뭐야. 이미 정보를 받아놓고 그러는 게 어딨어?”

  “그건 너희 목숨값이야. 내 구역에서 내 직원을 공격했잖아? 이 정도는 담보로 맡아두지 않으면 수지가 맞지 않지.”

  동요 없는 셴리의 말에 블랑코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어울리지 않게 생각에 잠긴 모양으로 몽블랑을 우물대던 블랑코가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우리가 널 위해 일 하나를 해주는 건 어떨까. 우리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일 텐데.”

  “야!”

  로제가 재빨리 팔을 휘저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셴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건 누군가를 제거해주겠다는 의미인가?”

  “나쁜 거래는 아닐걸? 우린 타겟을 가리지 않아. 죽일 수 없는 대상을 죽이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니까. 재력, 지위, 명성, 무력. 뭐든 간에 우리에겐 문제될 거 없어. 현실적인 제약에 관계없이 세상에서 한 사람을 지우는 찬스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돼. 우릴 고용한다는 건 그런 거야.”

  로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블랑코를 바라보던 셴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런 소릴 했다간 다시는 이 가게에 발 못 붙일 줄 알아.”

  블랑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런 류의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이었나? 이런 가게의 매니저씩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신기하네.”

  셴리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투박하게 머리카락을 젖혀 귀 뒤로 넘긴 셴리는 피곤한 기색으로 길게 한숨을 뱉으며 블랑코를 노려봤다.

  “잘 들어. 네가 어떤 더러운 짓을 하던, 그렇게 번 돈으로 무슨 짓을 하던 난 아무 신경 쓰지 않아. 원한다면 저 밖에 나가서 네 마음껏 활개 치다 가도 좋아. 벨 마르셀은 어떤 말종이라도 모두 포용하지. 하지만 만약 네가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일에 나를 끌어들일 셈이라면 맹세컨대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널 저 4구역의 폐인들과 같은 꼴로 만들어주겠어.”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블랑코가 도움을 청하듯 로제를 바라보자 로제가 우울하게 말했다.

  “우리 언니 앞에서 그쪽 화제는 꺼내면 안 돼.”

  “어째서?”

  잠시 입을 다문 로제가 쓴 것을 뱉듯 대답했다.

  “사람 해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게 엄… 우릴 키워준 사람의 가르침이었거든.”

  조용히 입술에서 연기를 흘리던 셴리가 덧붙였다.

  “저 애가 저렇게 죄스러워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어울리지도 않는 변장이나 하고 있는 것도, 오랜만에 만난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도 모두 댁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 같아선 댁의 사정이 뭐든 간에 그대로 방치하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를 납득시킬 근거가 떠오르지 않아서 당신에게 직접 날 설득해보라고 기회를 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내게 청부를 공짜로 맡아주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군.”

  블랑코는 마지막으로 식은땀을 흘려본 게 언제인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실시간으로 기록이 새로 쓰여지고 있었으니까. 대개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건 철판보다 두꺼운 얼굴 가죽을 가진 그의 파트너의 몫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파트너는 지금 사람이 어디까지 수줍게 굴 수 있나를 두고 사춘기 소녀와 좋은 승부를 펼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블랑코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셴리의 마음을 돌릴 만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블랑코는 자신으로선 셴리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셴리도 거기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네.”

  셴리가 테이블에 놓인 컵케잌에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메모리칩은 돌려주겠어. 원하는 대로 마시다 가도록 해.”

  “잠깐만.”

  내내 가만히 있던 로제가 셴리의 소매를 붙잡았다. 셴리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염치없는 짓인 거 알아.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지도 알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말곤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어. 그때 이후로 오랫동안 언니를 피해왔지만 어쩌면 마음 한 편에선 다시 만나고 싶어 했는지도 몰라. 물론 절대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그만해. 거북하니까.”

  자매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블랑코는 순간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한이 든 블랑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예전부터 그랬어. 넌 뭐든 혼자 결정하고 저질러버리지. 네 주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구나, 메이레이.”

  “언니…….”

  “이번에도 뻔하지. 주변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멋대로 굴다가 더 이상 네 손에서 감당할 수 없어진 거겠지. 너는 항상 그러니까. 하지만 이번엔 8년 전과 달라. 이건 오로지 네가 벌인 일이야. 네가 한 짓 때문에 네게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게 도와달라고? 아니, 난 이 일에서 손 떼겠어. 네가 자초한 일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도록 해. 그런 일을 겪으면 너도 좀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지.”

  셴리의 시선을 받은 로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셴리는 로제를 잠깐 내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차가운 적막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건드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눈치 없이 그것을 깨트린 것은 블랑코의 난처한 듯한 목소리였다.

  “어… 댁이 한 말이 대체로 맞아. 정말이지 구구절절 공감할만한 내용이야. 주변 사람은 신경도 안 쓴다는 부분이 특히 그래. 그렇긴 한데…….”

  블랑코가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마 이대로 놔두면, 네 동생은 죽을 걸?”

  셴리가 흠칫하며 로제를 쳐다봤다. 로제는 셴리의 눈을 피하며 침묵했다. 셴리는 무언가 더 캐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소파 손잡이의 조각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입술을 구기고 주저하던 셴리는 성가신 기색으로 소파 스위치를 눌렀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온 남자는 문앞에서 꾸벅 인사를 하곤 셴리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잠시 로제와 블랑코를 바라보던 셴리가 말했다.

  “잠깐 여기 있어.”

  셴리와 남자가 방을 나가자 블랑코가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기지개를 폈다.

  “아이고, 빡시다. 네 언니라 그런지 성격이 장난 아니네.”

  나른한 어조로 말한 블랑코가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는 여전히 방문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대단해. 그 와중에 그런 연기를 하다니. 변장과 잠입을 밥 먹듯 해본 값이 있나봐.”

  로제는 여전히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 가만히 있던 로제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블랑코의 표정이 변했다. 블랑코는 처음 보는 물체나 되는 것처럼 로제를 바라봤지만 로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블랑코는 그런 로제를 가만 들여다보다 눈을 돌렸다. 밀실에는 잠깐 동안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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