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이 지났을까. 여전히 집에서 빈둥거리며 있다. 전화는 감감 무소식.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대를 태운다. 하.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통나무집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계속 생각이 난다.
- 가시는 건가요. 그럼 잠시 만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사실 특별한 이름은 없어요. 기억나는 게 없거든요. 그저 K씨나 당신처럼 코드명으로 정했는데 이상하게 보지는 마세요. 어렸을 때 엘리자베스라는 인형을 좋아해서 엘리자베스나 E라고 불러주세요.―
한글로는 ㄷ, 컴퓨터 자판으로는 L, 영어로는 Elite, Emotion, 알파벳에서 다섯 번째 글자.
그러고 보면 미스터 마는 마 씨니 M인가?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번호제한-
K인가. 받아보자.
“여보세요.”
“혹시 특수형-복수의 분노가 선생님께 맞소? 며칠 전에 구매한 사람인데.”
드디어, 드디어 기다리던 구매전화다. 우선 침착하자.
“네. 미스터 마를 통해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물론. 우리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지금 가능한가요.”
갑자기 왜 만나자고 그러지. 이미 거래했으면 끝난 거 아냐. 설마 반품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조금 떠 볼까.
“무슨 문제라도 발생하였습니까.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만나기 힘들면 제가 직접 찾아가죠. 아니면 오늘 오후 7시 그랜드호텔 라운지에서 뵙겠습니다.”
내 마음이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쉽사리 일어나 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가야만 한다. 소중한 구매고객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쳐보자. 아무 생각 말고.
<그랜드호텔 라운지. 통째로 예약하였는지 안에는 텅 비어있다. 단, 가장 가운데 상석만을 제외하고는. 푸짐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중앙에는 한 노신사가 조용히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음미한다. 옆에는 날카로운 눈매와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라운지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잖아. 저기, 저 사람들인가. 확실히 200억을 가진 사람들은 재력가밖에 없겠지. 쫄지 말고 당당하게 가자. 가만, 저 젊은 사람은 설마.
“회장님, 왔습니다.”
“어서 오라고 하게.”
<쭈뼛거리며 남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는 J. 안내해준 남자는 바로 K였다. 노신사는 J를 지긋이 바라보며 와인 잔을 든다.>
“건배하지. 이래 뵈도 구하기 꽤 힘든 유명한 와인이라고.”
“아, 네.”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 와인을 억지로 비우는 J. K는 그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본다. 노신사가 손짓으로 K를 불러 무언가를 건네준다.>
“한번 읽어보게.”
“형광펜으로 줄쳐진 곳을 자세히 보게.”
그러나 가해자 임 모씨는 박 모 씨를 차로 들이박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임 모씨가 직접 경찰에 진술한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그 당시 다른 거래처와의 미팅 때문에 모임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던 도중 갑작스레 정신을 잃게 되었고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인 박 모 씨가 자주 다니던 골목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니 피해자인 박 모 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곧바로 119구조대에 신고하였으나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내가 바로 그 가해자라네.”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난 정말로 죄가 없어. 다행히 손을 좀 써서 형량이 낮춰지기는 했지만 내 잃어버린 시간들은 누가 보상해주는가.”
“그래서 분노거래소를 없애시려는 겁니까.”
“자네가 얘기했나. 아니라면 저 친구 상당히 이해가 빠르군 그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늙은 노인네가 바로 살인범이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자네의 분노를 사들인 이유도 다 작전의 한 일환이지. 뭐 돈은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네. 이번 일에 대한 대금이라 생각하고 받게. 자네 나이또래에 그 정도 액수면 상당한 거라고 보는데. 평생 만져보지도, 다 써보지도 못 할 그 200억을 말이야.”
날 호구로 봤군. 돈에 미친 노예로.
“솔직히 애들 데리고 그곳으로 가 다 때려 부셔버리면 그만이야.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주 고통스럽고 기억에 잊지 못할 방식으로 복수해주고 싶기 때문이야. 뭐, 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도 말이지. 하하하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미쳤어. 난 그저 저들에게 이용당하는 장난감일 뿐이었어.
“최근 분노거래소를 이용한 고객이 자네밖에 없었다는 점과 희귀형의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축복이었지. 작전을 실행할 좋은 미끼를 얻었으니까. 그렇다고 기분나빠하지는 말게. 세상사는 게 속이고 속고,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거 아니겠나. 대신 섭섭지 않게 보상도 해주었고.”
“솔직히 말해 죽이고 싶은 마음도 들긴 했었어. 그렇지만 속으로만 몇 백번이고 실행시켰지, 실제로는 하지 못했거든. 이놈의 양심과 도덕 때문에. 아주 작게 남아있던 내 안의 이성의 끈이 말이야.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 친구가 살해당한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내가 정신이 말짱해있을 때 그랬더라면 후회하지는 않지. 감히 나를 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한단 말인가.”
<임 회장이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주먹으로 세게 식탁을 내리친다. 그 충격에 의해 접시 몇 개가 쨍그랑하고 소리를 내며 깨진다.>
“좀 흥분했군. 아무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어. 물론 직접 미스터마를 죽이는 건 자네 손으로 해야겠지. 내 손으로 하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고 좀 그래. 그렇지만 젊은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가 있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네. 그러나 가능하면 죽여 달라 이 소리지. 살인청부는 아니니 오해 말게. 분노 거래소만 없애버리면 그만 아니겠나.”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 저들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해를 못 한 거 같아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히 말해주지. 자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야. 미스터마를 만나는 것과 죽이는 것. 나머지 뒤처리는 우리가 하겠네. 해주겠나.”
“J씨. 본의 아니게 설명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워낙 중대한 사항이라 조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추후에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부담 갖지는 마십시오. 이 일을 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죽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회장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진짜로 죽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를 죽이라는 건 바로 그의 『몰락』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다이어리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그동안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가져와주십시오. 쉽지 않은 일이니 필요한 게 있다면 모든 지 지원해 드릴 겁니다.” K가 최대한 미안하다는 말투로 내게 말한다.
그때 보았던 일기장. 나의 모든 것이 적혀져있던 그게 핵심이었다니. 진작 가져 올 걸 그랬나.
“거래가 끝났으니 아마 조만간 그놈에게 연락이 올 걸세.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게 그 일기장을 가져오게. 만약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면 추가 보수를 주도록 하지. 만족스러워 미칠 정도로 말이야. 내 용건은 끝났네. 마저 음식을 먹던지 먼저 가도 상관없네.”
“하나만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말해보게.”
“미스터 마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오, 그래. 뭐가 적혀져있던가. 또 어디에 있었고.”
“일기장은 미스터 마의 사무실 뒤쪽 벽난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사실입니다.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빈 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져오게. 혹시 모르지 않나. 특수잉크로 쓰여 있든가 무언가의 장치는 분명히 해 놓았을 테니.”
“일기장에 무엇이 적혀 있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겁니까.”
“알고 싶나. 가지고와. 그럼 내 직접 보여줌세. 나의 무죄를 입증하고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게 담겨져 있지. 이제 됐나.”
“추가보수.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일을 끝으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운을 빌겠네.”
『압박감이 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내키지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