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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즈 앤 스노우
작가 : 쿠페
작품등록일 : 2018.12.31

옛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 두 킬러의 이야기

 
프롤로그 : 그녀의 경우
작성일 : 18-12-31 23:47     조회 : 465     추천 : 0     분량 : 10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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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한 건 집요함이다.

  마르티네 패밀리를 이끄는 제리코 마르티네의 입버릇이자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십대에 암흑가에 발을 들이고 불과 십여 년 만에 펠먼의 뒷골목이나 어슬렁거리던 갱 집단을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의 대규모 조직으로 일구어낸 비결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일을 벌임에 있어서 철저히 신중했다. 그가 계획한 건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 포착한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시켰고 꼬리를 잡힐 만한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암흑가의 거물이 된 후에도 그의 방침은 건재했다. 아무리 조그만 조직이라도 알력이 생기면 강력하게 대응했고 꼬리를 밟힐 만한 일은 용의주도하게 미연에 방지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대리자를 파견했고, 불가피하게 직접 나서야 하는 일에는 과할 정도의 호위병력을 움직였다. 그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자들이 겁쟁이라 조롱할 때에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목숨을 구해주진 않는다. 그를 비웃던 자들은 모두 그보다 먼저 죽었고 그는 살아남아 뒷세계를 주름잡는 권력가가 되었다. 결국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계획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갖추는 것. 그것이 제리코 마르티네의 성공비법이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제리코의 편집증적인 집요함이었다.

 

 

  검은 수면 위에 형광불빛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밤은 깊었지만 수면은 오히려 낮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도시는 사람의 욕망을 연료 삼아 탐욕스럽게 불빛을 밝혔고, 사람들은 빛에 끌리는 벌레처럼 다시금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거리는 쾌락과 돈의 환전소였다. 카지노, 고급 주점, 클럽과 각양각색의 윤락업소.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항만에 위치한 거대한 호텔이었다. 도시 전체를, 혹은 검은 바다 전체를 내려보듯 서 있는 호텔은 규모도 화려함도 거리의 다른 건물들과 차원을 달리했다.

  그 초호화 호텔의 입구로 수 대의 고급 차가 줄줄이 들어섰다. 정차하기 무섭게 열린 문에서는 검은 정장의, 그러나 견실함보다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호텔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레드카펫 앞에 선 차 문을 한 사내가 정중하게 열자 그곳에서 제리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코의 주변에 도열한 남자들의 눈빛은 삼엄하다 못해 살기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그 이면에 있는 것은 외부에 대한 경계심보다도 오히려 내부를 향한 일종의 긴장 같은 것인 듯 했다. 보스의 경호를 맡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호텔 문을 지키는 벨보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려다 검은 남자들에게 거칠게 제지당하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로비에 들어선 제리코는 거침없이 중앙의 고풍스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침 엘리베이터는 로비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문 앞에 선 제리코를 검은 남자들이 빙 둘러싸는 형태로 감쌌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급사 한 명이 서두르는 모양으로 튀어나왔다. 급사는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난 남자들의 무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던 제리코와 부딪혀 비틀거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주근깨가 난 어수룩한 인상의 급사였다. 그녀는 벌벌 떨며 사과했지만 검은 남자들은 그녀의 팔뚝을 잡고 용서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끌어냈다. 검은 옷의 남자들이 탑승하려는 승객들을 막는 사이 제리코는 당연하다는 듯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갔고 제리코와 그 부하들만을 태운 채 엘리베이터 문이 슥 닫혔다.

  조인식은 최고층의 파티 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 흉흉한 남자들을 잔뜩 태운 엘리베이터는 그 분위기의 무거움과 몸뚱이의 무거움 모두에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중력을 거슬러 갔다. 제리코는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 안은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이 타기 직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급사를 생각한 제리코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멍청한 년. 아무거나 잔뜩 뿌리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달짝지근한 싸구려 향수 냄새에 머리까지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의 최고층은 고대 술탄의 하렘을 연상시켰다. 고급 양탄자 위에 수상쩍은 보랏빛 연기가 휘감겼다. 테이블마다 호화로운 음식들이 정성스럽게 장식되어 있었고 숙련된 몸짓의 미녀들이 각자의 손님을 시중들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각각의 업계에서 거물로 통하는 자들이었고 이곳에 있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면 난처할 입장에 처하게 될 인물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띠었다. 제리코는 그 사이로 거침없이 발을 내딛었다.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남자들의 무리가 제리코를 둥글게 감싸고 인파를 헤치며 부자연스러운 공기를 만들었지만 손님들은 그들을 힐끗 보고 눈을 돌리는 데에 그치곤 했다. 남자들 역시 그 사실을 당연한 낯으로 받아들였다.

  답답한 공기 탓인지 갈증을 느낀 제리코는 홀 가운데에서도 상석에 놓인 물소 가죽제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음료를 시켰다. 곧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미녀가 칵테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익숙한 동작으로 무릎을 꿇고 칵테일을 건네던 미녀의 손을 제리코가 덥썩 붙잡았다. 흠칫 놀라 경직된 그녀의 손에서 넘친 칵테일이 제리코의 소매를 조금 적셨다. 젖은 소매를 잠시 바라보던 제리코는 다른 손을 품으로 슥 집어넣었다. 다음 순간 품 밖으로 꺼낸 제리코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고풍스럽게 장식된 권총이었다. 제리코는 파랗게 질린 여인의 미간을 조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마셔봐.”

  여인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바들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테이블을 둘러싼 검은 남자들의 벽 때문에 그 간절한 시선이 밖으로 닿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동작으로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한 두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그녀를 제리코가 신중한 기색으로 응시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영원과도 같은 몇 초가 흐르고 제리코가 해방을 명하자 비로소 여인은 비명과도 같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거센 숨을 내쉬었다. 창백한 낯으로 식은땀 범벅이 되어 걸어가는 여인이 방금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제리코는 콧방귀를 끼며 여인의 입술자국이 남은 칵테일 잔을 홀짝였다.

  땡땡땡!

  어디선가 맑은 금속성의 소리가 울리자 장내가 일제히 조용해졌다. 주목을 불러 모은 자는 제리코 못지않게 고급 옷을 걸친 반백의 신사였다. 그야말로 제리코가 오늘 밤 이곳을 방문한 이유였다. 네이블랑 패밀리의 보스, 루이자 네이블랑은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대신 글라스를 손에 들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 이런 뜻 깊은 저녁을 맞을 수 있어 정말 반갑군요. 오늘은 펠먼을 보금자리로 삼아 함께 자란 마르티네와 네이블랑이 진정으로 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경사스런 날입니다. 이렇게 모여주신 내방객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림과 동시에 새로이 가족이 된 마르티네의 형제들에게도 환영의 말을 건넵니다.”

  루이자의 시선이 거만하게 드러누운 제리코를 향했다. 그를 따라서 청중의 시선이 제리코에게 몰렸다. 제리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일어나 그를 향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환대에 감사하는 바이오. 좋은 일은 둘러 할 필요 없다고 했지. 당장이라도 시작합시다.”

  “마르티네는 호탕한 아버지를 두었군요. 좋습니다.”

  루이자의 손짓에 따라 그의 부하가 서류 케이스를 가져왔다. 케이스에서 나온 종이는 루이자와 제리코에게 각각 건네졌다. 제리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종이를 훑어보았다. 어차피 조인식은 일종의 세리모니다. 협정 자체는 이미 충분히 오랜 기간 엄정한 과정을 거쳐 맺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형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겉치레를 무시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사례를 제리코는 여럿 알고 있었다. 서류의 내용이 사전에 협의한 내용과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제리코는 신중한 동작으로 자신의 서명을 종이에 새겨 넣었다. 이윽고 서로 서면을 교환한 후 한 번 더 내용을 확인한 제리코는 교환한 종이에도 서명을 써넣었다. 이제 이 아무 것도 아닌 종이쪼가리는 각각의 패밀리에서 엄중하게 보관되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보험으로 쓰일 것이다.

  펠먼의 암흑가를 대표하는 두 거물이 악수를 주고받자 홀 전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뿌연 자줏빛 연기와 어지러운 조명에서 언뜻 보이는 그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암흑가에 연이 있는 정재계 인사, 이번 기회에 거물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약소 조직의 인물들, 심지어 경찰의 고위 간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제리코는 그들을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내려 봤다. 그들은 이른바 욕구의 덩어리들이었다. 어느 정도의 돈과 힘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멍청이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달려드는 그 맹렬한 탐욕만큼은 제리코도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지만 그 모습에는 철저함도 깔끔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리코의 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조인식을 기념하여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형제여.”

  루이자가 웃는 낯으로 내민 선물을 제리코가 찌푸리며 받았다. 봉인을 연 제리코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건?”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엘 펠리시페입니다. 전 세계에 천 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환상의 시가지요. 평소에 시가를 즐기신다고 해서 준비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제리코의 입가에 미소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스쳤다. 품에서 소형 나이프를 꺼내 익숙한 동작으로 시가의 포장을 벗기고 끝을 잘라낸 제리코는, 그러나 손질이 끝난 시가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제리코가 문득 루이자를 바라봤다.

  “귀한 선물인데 나 혼자 즐길 수는 없지요.”

  “아쉽게도 저는 시가를 피지 않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만끽하시길.”

  제리코의 말을 겸양의 표시로 여긴 루이자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제리코의 뒤에 도열한 남자들의 표정에선 순간 차가운 긴장이 흘렀다. 그 긴장에 방점을 찍는 것처럼 제리코가 사납게 웃었다.

  “아니아니, 그럴 수야 있나. 콩 한 쪽도 나눠 먹으라 했는데 하물며 한 가족 사이에야.”

  제리코가 손질이 끝난 시가를 짐짓 우아한 동작으로 천천히 루이자에게 내밀었다.

  “먼저 맛보시지. 형제여.”

  루이자의 표정이 굳었다. 정중한 말로 포장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상 기미(氣味)를 명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며 더군다나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는 그 태도는 도저히 갓 동맹을 맺은 상대 조직을 대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는 그러나 다음 순간 제리코의 뒤에 도열한 남자들을 보고 멈칫했다. 그들의 표정에선 단호함을 넘어 일종의 필사적임이 엿보였다. 사위는 싸늘했다. 집단적인 침묵이 가져오는 무거운 긴장이 그를 짓눌렀다. 험상궂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루이자가 시가를 건네받았다. 제리코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시가를 입에 물자 제리코의 부하 한 명이 정중한 동작으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제리코를 노려보며 한 모금을 머금은 그가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 연기는 천장으로 올라가 조명을 감싸고 맴돌다 흩어졌다. 루이자가 씹어 말했다.

  “맛있군요. 환상의 시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루이자가 떨리는 손으로 시가를 내밀자 제리코가 거만하게 그것을 받았다. 동맹이라는 껍질을 쓰고 있지만 그가 사는 세계는 순진한 사고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언제든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했고 어떤 종류의 관계든 나름의 서열 정리가 필요했다. 제리코의 행동은 힘을 쥐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에 대한 시위였고 그것은 훌륭하게 작용했다. 제리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시가를 전리품과도 같이 들어 올리곤 한 모금 빨아올렸다.

  그것이 제리코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항구 외곽, 호텔로부터 뻗어 나온 길을 한 여자가 걷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호텔 제복을 입은 그녀는 로비에 들어온 제리코를 지나쳤던 급사였다.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또각또각 걸어오던 그녀가 문득 안경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팽개쳤다. 안경을 쓰고 있을 때의 유순한 인상과 달리 그 속에서 드러난 맨눈은 화려한 육식동물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풀어내고 품속에서 빗을 하나 꺼냈다. 정수리에 신중하게 빗을 갔다댄 그녀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그것을 내리그었다. 단지 그것뿐인 움직임이었지만 결과는 다소 극단적이었다. 그녀가 빗어낸 부분의 머리색은 무슨 원리인지 선명한 주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빗질을 마친 그녀의 머리는 완전히 붉은 생머리로 바뀌었다. 이어서 손거울 하나를 꺼낸 그녀는 화장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손길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주근깨가 사라졌다. 이어서 눈썹과 눈매의 인상이 미묘하게 바뀌고 입술에는 강렬한 붉은 립이 칠해졌다. 마지막으로 알이 작은 뿔테 안경을 코에 걸치자 그곳에 어수룩한 인상의 급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과 수 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항구를 빠져나온 그녀의 앞에 밴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 탄 하얀 정장의 거한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불렀다.

  “타!”

  그녀는 짙게 웃으며 쾌활한 동작으로 밴에 올라탔다.

  “일은 잘 끝낸 거야?”

  “그럼~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곧…….”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텔 최정상부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수한 총성과 함께 터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뒤섞여 따라왔다. 그녀는 그것 보라는 듯 백미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조인식 현장에서 보스가 살해된 거야. 마르티네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겠지. 마르티네와 네이블랑은 전쟁에 돌입하고 결과가 어찌 되든 양방 모두 큰 소모를 하게 돼. 지배자가 사라진 펠먼은 한동안 혼란의 도가니가 될 테고, 소요가 끝난 무주공산을 웅크리고 있던 우리 의뢰인께서 꿀꺽하시겠다 이거지. 아마 회장에 있던 멍청이들 중 한 명일걸?”

  남녀가 나누는 대화는 흉흉할 뿐 아니라 펠먼을 터로 삼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항구도시인 펠먼은 그 특성상 암흑가의 모든 조직이 침을 흘리는 황금 같은 땅이었다. 치안력이 이미 오래전에 기능을 상실한 그 도시가 아비규환의 무법지대로 남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 항쟁 끝에 펠먼의 영향력을 거머쥔 두 거대조직은 서로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자신들의 영토를 분할해서 지배하고 있었고 그 두 조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는 불량배는 펠먼에 없었다.

  여자는 그 첨예한 암흑가의 균형이 깨진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이 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터무니없는 자백을 들은 고해사제는 정작 그 말의 의미에도, 그것이 담고 있는 무게에도 시큰둥해보였다.

  “아 뭐. 그런 사정 따윈 어찌 되든 좋아. 난 일이 무사히 끝나면 그걸로 됐어.”

  여자가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거한이 엑셀을 밟았다. 두 사람이 탄 밴은 항구를 빠져나가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이어진 해안도로를 하얀색 밴이 유유히 미끄러졌다. 옆자리에 남자가 타고 있음에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제복의 버튼을 풀고 거침없이 옷을 벗어젖히기 시작했다. 호텔이 한참 뒤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 남자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한 거야?”

  “응? 뭐가?”

  “이번 타겟, 독살이었지? 어떻게 타겟만 중독시킨 거야? 내가 독을 흘려 넣은 건 분명 호텔의 ‘모든 수도관’이었는데. 난 네가 대량 학살이라도 일으키려나보다 했지.”

  “거기 있던 작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 알기나 해? 그런 짓을 하면 펠먼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거라고. 그리고 인명 피해를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으면 언제든 기회는 있었어. 이번에는 연출적으로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거지.”

  “하긴. 그냥 죽이기만 할 거라면 방법은 많았지.”

  혀를 한 번 찬 거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 일에 사용한 트릭은 뭐였는데?”

  “대단한 건 아냐. 조금만 끈질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벗은 제복을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여자가 말했다.

  “무언가를 숨기려면 나무가 아닌 숲에 해라. 내 스승이 한 말이거든.”

  “거창한 말이네.”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고 여자가 싱긋 웃었다.

  “내가 쓴 독은 모두 세 종류야. 각각은 섭취하거나 흡입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지만 세 종류의 약을 모두 먹게 되면…… 수 초 안에 죽음에 이르는 극약이 되지.”

  “호오…….”

  여자는 허리를 돌려 뒷자리에서 주섬주섬 옷을 찾아 꺼내더니 팔다리를 힘겹게 끼워 넣기 시작했다.

  “네가 호텔에 잠입해서 풀어놓은 약이 그 중 하나. 물과 음료에 섞인 독. 최상층에 제공되는 음료가 모두 호텔에서 자체적으로 만드는 칵테일이라는 건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였어. 네가 점거한 수도관을 통해서라면 호텔의 모든 음료에 약품을 섞는 게 가능해. 맛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약간의 산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체내외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전혀 없기 때문에 보통은 기분 탓이라고 넘길 거야.”

  “하지만 타겟이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면? 조심성이 많은 놈이니 외부 음식에 손대지 않을 가능성도 있던 거잖아.”

  “그게 내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이유.”

  여자가 셔츠에 팔을 꿰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두 번째 독은 향수형이야. 타겟이 오는 타이밍에 맞춰 밀실인 엘리베이터 안에 잔뜩 살포해놨지. 어쩔 수 없이 나도 흡입하게 됐지만 어차피 세 종류의 약을 모두 먹지 않으면 효과는 발생하지 않으니까. 다만 첫 번째 독과 달리 두드러지는 냄새가 나고 몸에 드러나는 증상도 있어. 그 증상이라는 게 바로…….”

  “갈증을 유발한다고?”

  “그야말로 뭔가 마시고 싶어질 정도로.”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몰던 남자가 물었다.

  “마지막 하나는 뭐였어?”

  “입 아프게 뭘 물어. 네이블랑 쪽 보스가 선물한 시가였지.”

  “그럴 줄 알았어. 언제 바꿔치기한 거야?”

  “바꿔치기?”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바꿔치기 같은 거 한 적 없어. 루이자 네이블랑이 건넨 선물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짜였어.”

  운전을 하던 거한이 여자를 바라봤다. 같은 타이밍에 마침 여자도 그를 쳐다봤으므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고 뭐고. 말 그대로야. 루이자 네이블랑이 조인식 선물로 구한 시가는 구입부터 운송까지 아무 문제없었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이블랑이 선물하려고 했던 시가.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아?”

  “그런 걸 내가 알 리가 없지.”

  네가 그렇지 뭐, 하고 작게 투덜거린 여자는 남자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말했다.

  “독특한 향을 가진 최고급 시가지만 한 번에 고작 천 대밖에 출고하지 않아서 환상의 시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놈이야. 마니아들은 그야말로 환장할 만한 물건이지.”

  “흐음…….”

  남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쿠바에 말야. 노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어. 시골도 그런 시골이 없지. 아주 외진 데 있을뿐더러 그 마을 사람들은 좀처럼 바깥세상과 교류를 안 하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잘 모르는 거야. 둘러 봐도 보이는 거라곤 나무와 하늘뿐인 그런 마을에, 그곳에만 자라는 특수한 담배가 있는지 없는지.”

  여자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밤바다를 쳐다봤다.

  “가끔씩 그 노인들은 소일거리 삼아 시가를 만들어. 어떻게 만드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 양반들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가 있는 거지. 대부분은 자기들이 피워버리고 말지만 가끔씩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을 밖에 내다 팔 때가 있어. 많이 팔지도 않아. 기껏해야 일 년에 천 대. 본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팔겠지만 마을과 바깥세상을 잇는 중개업자가 실은 그 마을에 눈독들인 카르텔이어서 말이지. 상품에 그럴 듯한 포장을 곁들이면 세간에서는 누가 어디서 만드는지 온통 베일에 감춰진 환상의 시가가 되는 거야. 그게 바로 엘 펠리시페. 마을 사람들에게서 헐값에 사들인 시가가 시장에서는 한 개비에 천 달러를 호가하는 최고급품으로 팔리는 거지.”

  “흐음. 꽤 자세히 알고 있네?”

  “뭐, 그렇지. 좋은 곳이야. 공기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길을 잃었다며 갑자기 외국인 의사가 나타나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도 순박하고.”

  “뭐?”

  하얀 거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너 설마…?”

  여자가 장난을 치다 들킨 악동처럼 짓궂게 웃었다.

  “은퇴를 하면 남미에 가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여행 다니기 썩 좋더라고. 커피 농장주와 대마 농장주를 홀려서 한 번에 결혼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그래서 둘 다 독살시키고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당연하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자 여자가 킬킬거렸다.

  “숨기려면 나무가 아니라 숲에라…. 아무리 조심성 많은 사람이라도 설마 천 대나 되는 시가를 출고 전부터 오염시켰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지.”

  “제리코 마르티네에 대한 선물로 뭘 고를지는 뻔했어. 원체 재미없는 남자라 이렇다 할 취미나 선호하는 선물 같은 게 알려져 있지 않았거든.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제리코의 기호품은 시가였어. 조직의 체면이 걸린 문제니까 싸구려를 선물할 리는 없을 테고 조인식이 있기 전에 출고되는 고급 시가는 엘 펠리시페뿐이었으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엘 펠리시페의 제조 시기는 우기가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이야.”

  “놈은 두 달 전부터 죽어있던 거였군.”

  “정확히는 우리 타겟이 된 순간부터지.”

  여자가 짙게 웃고 남자도 가볍게 미소 지었다. 여자는 두 팔을 위로 올려 크게 기지개를 펴고 말했다.

  “설명은 이걸로 끝. 뭐라도 먹으러 가자. 일을 했으면 배를 채워야지.”

  “펠먼 시내로 가지. 한동안 이곳도 못 오게 될 것 같으니까.”

  “찬성!”

  두 사람이 탄 밴은 후미등의 붉은 궤적을 남기며 도로를 질주했다. 하얀 달만이 인적 없는 해안도로를 비췄고 검은 바다는 창백한 달빛을 부수며 반짝였다.

 

 

  필요한 건 집요함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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