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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겨우살이왕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8.12.23

30년전,

각지의 점쟁이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모든 신들의 죽음이 예언되었다.

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예언의 집행자는 과연 누구인가!

살신(殺神)의 운명을 거머쥐고 태어난 아이들 앞에서 지금,

세계의 운명이 들끓기 시작한다!

#동양판타지

 
0. 서(序)
작성일 : 18-12-23 23:05     조회 : 275     추천 : 0     분량 : 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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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원형의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 이는 총 열 셋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무구(巫具)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서북쪽 점쟁이들이 본인들의 수정구 외에도 두 가지 물품을 더 챙겨왔기 때문이다.

 

  거울과 방울.

 

  미숙함을 드러내는 꼴이라고 비웃기 좋아하던 남쪽의 점쟁이들도 오늘만큼은 진지하게 그것들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각지의 점쟁이들을 한데 불러 모은 바위산의 우두머리가 직접 그 무구들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바위산의 현인들이 서북쪽의 무구를 요청하는 상황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세계의 운명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두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깨비, 거인, 용. 오지 않았다.”

 

  “도깨비는 진지하지 않고, 거인은 상관하지 않고, 용은 믿지 않지.”

 

  “인간만의 일이라고 볼 순 없지 않나.”

 

  “바위산의 샤도 인간은 아니다.”

 

  “불완전 역시 운명의 궤. 이대로 진행하는 게 옳을 듯.”

 

  “모르는 것을 운명이란 단어로 대체하려 들지 말아요. 추해질 뿐이니까.”

 

  시끌벅적 하진 않았으나 점쟁이들의 말은 끊이질 않았다.

 

  불안과 공포. 세상의 어둠을 꿰뚫어본다는 현자들을 잠식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만.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시바삐 질문을 준비해야 합니다.”

 

  “허락된 물음은 몇 가지인지?”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준비해둬야 합니다.”

 

  “샤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나 질문지를 좁히려면 다시 한 번 확인을…… 죄송합니다만, 정말로 신이?”

 

  “전달자들의 귀띔입니다. 세 차례였습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엔 침묵이 감돌았다.

 

  점쟁이들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불신의 감정을 조용히 털어냈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은 준비를 해야 될 때이다.

 

  “첫째, 무엇을 물어야할 것인지에 대해 물을 것.”

 

  “둘째…… 죽음에 대해 물을 것.”

 

  “셋째, 방법에 대해 물을 것.”

 

  “방법?”

 

  “막는 것인가요? 아니면 죽이는 것?”

 

  “……지금 제정신으로 묻는 겐가?”

 

  “그 말에 대답해야 하나요?”

 

  “우리는 보는 자. 거인의 태도를 배워야 할.”

 

  “다들 미쳤군.”

 

  “하나만 묻겠어요. 운명이 우선하는 가요, 신이 우선하는 가요?”

 

  “둘은 동등하다. 이걸 꼭 가르쳐줘야 아나?”

 

  “운명의 여신께서도 자신이 운명 위에 있다 하지 않으셨죠. 듣지 못하셨나보네요.”

 

  “이래서 서북쪽의 너희들이 싫은 거야. 그것은 신을 가둔 자들의 궤변이다. 정도를 모르는 것들.”

 

  “다툼. 좋지 않다. 상관하지 않는 거인의 태도. 잊지 말 것.”

 

  그즈음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의 손이 탁자를 강하게 때렸다.

 

  “다들 그쯤 해두시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어서 빨리…….”

 

  그때였다.

 

  “움직입니다.”

 

  서북쪽 점쟁이들 앞에 놓여있던 방울이 천천히 딸랑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방울이 움직임을 멈추자마자 옆에 있던 거울에서 환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거울이 까마귀의 모습을 한 운명의 전달자를 비추었다.

 

  거울 속 까마귀가 입을 열었다.

 

  “세상의 세 가지 진리. 알고 싶은 것을 물어라.”

 

  까마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세 가지 물음은 무엇입니까?”

 

  까마귀는 곧바로 대답했다.

 

  “세상에 관한 물음, 신에 관한 물음, 인간에 관한 물음.”

 

  전달자의 첫 번째 대답은 뭇 점쟁이들의 얼굴을 실망감으로 물들였다. 저와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는 물론 그들의 전공분야이긴 했으나,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의 해석은 그들 역시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답변이 필요했다.

 

  “……신을 죽이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까마귀의 입이 바로 열리지 않았다. 모두들 숨죽인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닫혀있던 까마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세상이 가둔 신, 모든 이보다 천한 신, 단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신.”

 

  까마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어 탁자의 한 축으로 모든 점쟁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방울과 거울을 가져온 서북쪽 점쟁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 역시도 서로의 놀란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세상이 가둔 신…… 네놈들 짓이더냐!”

 

  “아, 아니…… 잠깐!”

 

  “뒤의 두 신에 대해선 토론이 필요하나 첫 번째의 것은 분명…….”

 

  “세상이 가둔 신. 그것은 주물(呪物:신비한 힘을 가져 신성시되는 물건)을 의미. 서북쪽 점쟁이들이 대답해야 할.”

 

  “조용히 해주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웅성거림이 점점 더 심해지자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가 서둘러 대화를 중재했다. 당장은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아직 운명의 전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의 물음은 모두의 눈길을 교묘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이는 의미심장하게 거울을 쳐다봤다. 바위산의 현인이 택한 것은 신의 죽음을 막는 일이었다.

 

  까마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운명, 기질, 의지.”

 

  “이런…….”

 

  “아…….”

 

  까마귀의 대답은 첫 번째 때보다도 더욱 더 확실하게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것은 평생 동안 그들이 습관처럼 되뇌어온 세 개의 단어에 불과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청한 질문의 대답으로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잠깐! 방울이 움직이려 해요. 서둘러 마지막 질문을!”

 

  누군가의 지적에 모두의 시선이 방울로 향했다. 그것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이는 갈등했다. 갈등할 시간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어야 할 것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누구냐, 언제냐.

 

  “……신들의 죽음을 저지할 수 있는 세 번의 시기는 언제입니까?”

 

  까마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울이 요동쳤음에도 까마귀는 침묵했다.

 

  거울이 흐릿해져갔다. 까마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점쟁이들이 숨을 죽였다.

 

  거울을 뿌옇게 채운 안개가 그 속의 검정을 거의 다 지워냈을 즈음, 마침내 까마귀의 입이 열렸다.

 

  “하늘 위 밝음이 두 차례 색을 달리할 때, 지상의 도깨비가 스무 번째 옷을 지어 입을 때, 거인의 발굽이질이 잠든 신을 깨울 때.”

 

 

  *

 

 

  바다를 건너던 최초의 거인이 작디작은 물푸레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 이후, 억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인의 몸은 퇴적되어 하나의 대륙을 형성하게 되었다. 거인의 등뼈는 대륙을 양단하는 거대한 산맥이 되었고, 그의 두 팔과 다리뼈는 각기 동, 서, 남, 북 지형을 나누는 경계의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거인의 왼쪽 두 번째 가슴뼈가 바람과 세월에 깎고 잘리어 산이 된 이곳, 옛 거인의 얼굴을 닮은 바위의 존재로 인해 ‘바위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된 다룬 산은 언젠가부터 들어선 일단의 무리에 의해 점거된 이후, 무려 1500년 동안이나 허가 받지 않은 자들의 발길을 거부해왔다.

 

  부당한 점거로 많은 이들의 편의를 해친 불한당들이 ‘침입자’라 지칭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사람들의 편의를 빼앗은 대신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위산에 둥지를 튼 이래로 줄곧, ‘미래’의 일부를 ‘지혜’라 속여 사람들에게 제공해왔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혜가 뜻하는 바를 곧장 깨달을 수 있었으나 그들의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미래를 말하는 예언자 일족, 인간의 몸에 까마귀의 머리를 단 괴한들을 사람들은 바위산의 현인이라 불렀다.

 

 

  이제는 현인들의 터전이 된 바위산의 어느 깊숙한 골짜기, 잡목들이 무성히 우거진 한 시냇가에 허리에 방울을 찬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머리무녀님, 종달새를 띄울까요?”

 

  남자가 여인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로 말이죠?”

 

  “그야 당연히 샤께…….”

 

  “좀 전에 분명 내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인지라…….”

 

  남자의 송구스럽다는 태도에 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툼은 없어요. 이미 늦었거나, 아직 멀었거나. 그 둘뿐이죠.”

 

  “하지만 전달자의 예언은…….”

 

  “그의 마지막 귀띔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요, 예언에서 언급된 첫 번째 시기는 고작해야 이틀 뒤를 뜻하죠. 해와 달이 두 번 뜨고 지는 것을 말한 것이니까. 하지만 당장 이틀 뒤에 일어날 일을 무슨 수로 막으란 거죠? 머리무당께선 누가 어디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미 다 알고 계신단 말씀이신가요?”

 

  남자는 여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단지 앞으로의 환란을 착실히 준비해온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일 뿐이에요. 신을 미워하는 누군가가 이틀 뒤에 무언가를 할 것이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 신들을 죽이는 무기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

 

  “후우…… 그럼 단순히 20년 뒤를 대비하자는 것 외엔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열이 많은 도깨비는 추운 겨울에만 옷을 지어 입는다. 도깨비들이 스무 번 옷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은 20년이다. 남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수만 년을 살아온 신들을 죽일 무엇인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남자의 말에 여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무당께서는 정말이지 신의 안위만을 걱정하시는군요. 그래요, 신들의 죽음에 관해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현재로선 그다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 서북쪽의 일족들에 대해선 어떨까요? 전달자의 귀띔 중 하나는 분명 우리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세상이 가두는 신. 당장은 바위산 샤의 의해 중재를 받을 수 있었지만 곧 모든 지역에서 추궁을 해올 거예요. 그에 대한 대비책은 당장 세워둬야겠죠.”

 

  여인의 지적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그렇군요.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신의 죽음을 획책했으리라고 생각하는 지역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감히…….”

 

  “혹시 또 모르죠. 우리 일족의 시조이신 ‘영원을 희구하는 돌’께서도 당시엔 미친 인간 취급을 당하셨으니까.

 

  “아…… 아니 어찌 그런…….”

 

  남자가 놀라 돌아보았으나 여인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얼마 전, 샤께서 비밀리에 북쪽을 방문하셨어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샤께서?”

 

  “모르고 계셨군요. 물론 유랑을 가셨던 것은 아닙니다. 신께 버림받은 자들을 만나고 오셨다더군요.”

 

  순간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거래를 요구해왔어요. 우리의 신을 빌릴 수 있겠냐고.”

 

  “설마…… 샤께서!”

 

  “물론 샤가 그런 불경스런 짓을 저지르진 않으셨죠. 하지만 샤는 그들의 제안에 관심 있는 척을 해야 하셨어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선 그 편이 더 나으니까.”

 

  “……어째서?”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땅에서 바로 선 자’라 칭한 한 남자가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그들을 모두 규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미 서북쪽 일대의 몇 배나 되는 사막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답니다. 이에 발맞춰 동쪽의 불지킴이들이 일부 북상했고, 중앙과 남쪽의 인간들도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그들에게 합류하기 위해서.”

 

  “거참 희한한…… 헌데 지금 그 일을 말하시는 이유가?”

 

  남자의 말에 여인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들이 신을 요구해왔기 때문이에요. 전달자의 귀띔을 떠올려보세요. 신을 죽이는 세 가지 중 두 번째, 모든 이보다 천한 신. 신께 버림받은 이들보다 천한 존재가 세상에 있던 가요?”

 

  남자의 입에서 자연스레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 그런!”

 

  “우리에게서 가두어진 신을 빌린 그들이 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신이겠죠.”

  남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자신의 일족이 처한 위험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북쪽의 인간들이 접촉을 시도한 건 비단 우리들뿐이 아니에요. 그랬다면 동쪽의 불지킴이도, 중앙숲의 나무지기도 움직이지 않았겠죠. 분명 바위산에 모인 몇몇 점쟁이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바위산의 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어요. 저토록 엄청난 예언이 끝나고 난 뒤에도 말이에요. 남쪽이 서북쪽을 견제하고, 동쪽이 중앙을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여인의 말은 남자를 침묵의 구렁텅이 속으로 끌고 내려갔다. 남자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디를 가장…… 주의해야 될까요? 역시나 호전적인 남쪽?”

 

  “모르겠어요. 사실 우리는 지금 공공의 적에 다름없어요. 가능한 한 모든 곳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죠. 다만 제가 지금 당장 주목한 곳은 동쪽이에요. 오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들.”

 

  “그런가요? 하지만 중앙숲의 점쟁이들 역시 침묵을 지켰던 건 마찬가지…….”

 

  “전달자의 마지막 귀띔, 거인의 발굽이질이 잠든 신을 깨울 때. 그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의아해한 반면, 유일하게 몸을 움찔거렸던 이들이 있었죠.”

 

  그것은 분명 기이한 반응이었다. ‘잠든 신’과 같이 지시대상이 모호한 현학적인 표현은 그 대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이상 곧바로 반응할 수가 없다. 여인은 동쪽의 점쟁이들이 ‘잠든 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잠든 신이라.”

 

  “물론, 중앙숲 역시 경계의 대상인 건 마찬가지겠죠.”

 

  가장 늙은 신들을 섬기는 동쪽과 중앙숲의 일족들. 여인은 신들과 가장 오랜 시간 교류를 닦아온 그들의 이상스런 침묵을 결코 쉬이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골짜기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심스레 두 남녀의 몸을 휘감은 바람은 이어 남자의 깊은 한숨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20년 뒤에 나타날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단순한 푸념을 내뱉었을 뿐이다. 그러나 남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곧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신이겠죠.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또 다른 신뿐이니까.”

 

  “허나 신은…….”

 

  “그래요, 혼자선 드러날 수 없으니 그를 받들 수 있는 누군가를 대동한 채 나타나겠죠. 그리고 그것은 아마…… 20년 뒤 세상에 태어날 누군가의 아이일 테고.”

 

  남자는 여인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여인은 이 사안에 대해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달자가 언급한 세 번의 시기는 아마 순차적으로 나열된 것이라고 생각돼요. 이틀 후, 20년 후, 그리고 언젠지 모를 어느 때. 그리고 그것은 예언을 준비하는 시기, 예언의 집행자가 출현하는 시기, 예언이 집행되는 시기로 나뉘는 것이겠죠.”

 

  “하지만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이틀 후 태어날 아이에게 죽음의 신이 깃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확률은 낮아요. 머리무당께서도 점을 쳐보셨겠지만 현재의 하늘은 무미건조합니다. 범용한 별들밖엔 없어요. 세계를 뒤흔들 ‘메’의 주인은 밤하늘을 찢으며 등장하는 법입니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여인의 말에 동의했다. 전달자의 섬뜩한 예언과는 달리, 현재의 하늘은 맑고 잠잠했다. 세계의 멸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20년 후에 태어날 아이들을 모조리 다…….”

 

  순간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린 남자는 곧이어 자신이 뱉은 말의 의미를 깨닫곤 스스로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남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방법이죠. 우리들의 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야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정직한 방법이기도 해요. 우리 일족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일족들도 그렇게 할까요? 당신은 다른 이들을 믿을 수가 있나요? 설령 주물(呪物)신을 믿는 서북쪽 일족들이 모두 동의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동쪽과 남쪽, 중앙숲의 그들은요? 또 북쪽의 버림받은 자들은? 도깨비는? 거인은? 용은?”

 

  여인의 말에 남자는 순순히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했다.

 

  “지혜를 구하겠습니다. 그럼 혹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여인은 침묵했다. 그녀는 다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남자는 여인이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인이 아니라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때 여인의 허리에 걸려있던 방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샤의 부름이에요.”

 

  여인과 남자는 시냇가에 던져뒀던 각자의 돌덩이를 주워들었다. 주물(呪物)의 신이 새겨진 돌덩이들은 그들을 목적지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인도할 것이다.

 

  “서북쪽의 모든 일족들에게 오늘의 일을 전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머리무녀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곧장 샤에게로 가시지요.”

 

  “먼저 부룬 강으로 가도록 하세요. 가장 일찍 해답을 제시하는 자는 불태우는 버드나무가지를 섬기는 이들이니.”

 

  남자가 떠난 뒤, 여인은 잔잔히 물결치는 시냇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흘러가는 물속에서 자그마한 돌들이 이리저리 굴러대고 있었다.

 

  여인은 저 돌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 난잡하게 굴러다니는 생각들, 그리고 기억들. 여인은 이리저리 물결치는 혼돈 속에서 바위산 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수정구 속의 그는 다급해보였고, 체질처럼 보이던 침착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여인을 바위산으로 부르기까지 샤가 필요로 했던 말은 단 세 문장에 불과했다.

 

 

  “신이 죽을 것입니다.”

  “샤? 그게 갑자기 무슨……?”

  “다시 말하겠습니다. 신들이 죽을 것입니다.”

  “……어떤 신을 말하는 것인지요? 혹 서북쪽의…….”

  “죄송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모든 신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여인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혼돈에 먹혀버릴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할 때였다.

 

  여인은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자신의 돌을 움켜쥐었다. 물속에서 열을 식힌 돌덩이는 다시금 제 속에 든 신을 꺼낼 준비를 시작했다.

 

  “누구보다 멀리 보는 신이시여, 당신의 넷째 따님이 필요합니다.”

 

  여인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돌 속으로 스며들더니, 곧 온 숲을 감싸 안는 광채로 변했다. 이어 광채는 조금씩 줄어들며 특정 짐승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늠름한 적갈색의 독수리였다.

 

  “……소리.”

 

  “가루니, 오랜만.”

 

  “급한 건가?”

 

  “응, 오래 날아야 돼. 준비됐어?”

 

  독수리는 대답 대신 날개를 활짝 펴보였다. 머리무녀의 온 시야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날개였다.

 

  “아오리 골짜기. 샤에게로 가자.”

 

  독수리의 등에 올라탄 여인은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바위산을 돌아보며 일족과 온 세상과 모든 신들을 위해 오래전 소실된 옛 영웅의 기도문을 되뇌었다.

 

  ‘바라건대 난관을 꿰뚫을 거인의 힘을, 미지를 풀어낼 도깨비의 재치를, 추위를 견뎌낼 겨우살이의 인내를, 그리고 죽음을 긍정할 불새의 용기를.’

 

  석양을 등지고 활강하는 독수리의 날갯짓 아래로 세계의 운명이 들끓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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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5. 신기(神技) (1) 2019 / 10 / 4 199 0 6377   
38 4. 탐욕의 산(9) 2019 / 10 / 3 250 0 4014   
37 4. 탐욕의 산(8) 2019 / 10 / 1 228 0 4338   
36 4. 탐욕의 산(7) 2019 / 9 / 26 207 0 4417   
35 4. 탐욕의 산(6) 2019 / 9 / 25 251 0 4029   
34 4. 탐욕의 산(5) 2019 / 9 / 24 220 0 5103   
33 4. 탐욕의 산(4) 2019 / 9 / 20 226 0 4033   
32 4. 탐욕의 산(3) 2019 / 9 / 19 239 0 5914   
31 4. 탐욕의 산(2) 2019 / 9 / 18 212 0 4308   
30 4. 탐욕의 산(1) 2019 / 9 / 17 212 0 4024   
29 3. 여명을 쫓는 이리(9) 2019 / 9 / 16 208 0 6623   
28 3. 여명을 쫓는 이리(8) 2019 / 9 / 11 216 0 4160   
27 3. 여명을 쫓는 이리(7) 2019 / 9 / 10 231 0 4840   
26 3. 여명을 쫓는 이리(6) 2019 / 9 / 9 251 0 4424   
25 3. 여명을 쫓는 이리(5) 2019 / 9 / 7 228 0 4572   
24 3. 여명을 쫓는 이리(4) 2019 / 9 / 6 237 0 5386   
23 3. 여명을 쫓는 이리(3) 2019 / 9 / 5 247 0 4121   
22 3. 여명을 쫓는 이리(2) 2019 / 9 / 4 259 0 4319   
21 3. 여명을 쫓는 이리(1) 2019 / 9 / 3 212 0 4020   
20 2. 영신제(迎神祭) (13) 2019 / 9 / 2 235 0 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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