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1월 20일
지혜는 다시 회장 자리를 되찾았지만,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대부분의 경영은 강 상무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수호그룹의 주인이 된 이후에도 정치 활동에 집중했다.
지혜는 항상 바빴고, 민혁은 이제 업무 보고조차 직접 찾아가서 하지 않고 화상 전화로 대체했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지혜가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관리자의 업무는 지혜가 처리해야 할 최우선 업무였기 때문에, 보통 손님이 찾아온 경우에도 연락을 받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민혁은 회장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직원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주 관리자입니다. 혹시 오늘 회장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나요?”
“그……아마 검찰에서 온 사람이었을 겁니다. 몇 가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던데……”
직원이 대답했다.
“설마 회장님이 용의자가 된 겁니까?”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압수수색을 하러 온 거면 여러 명이 한꺼번에 왔을 텐데, 회사로 찾아온 건 검사 한 명 뿐이라…...”
민혁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정치인이라면 몰라도 검찰에서 왜 회장에게 관심을 갖는 걸까? 그는 보안상태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회장실에 찾아갔다.
어째서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가 스피커에 대고 문을 열어 달라고 했으나, 회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전화를 해도 답이 없자 그는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그 찰나의 순간, 민혁은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회장의 업무실 안쪽에 있는 개인 휴게실에서 들리는 듯 했다. 그 소리는 자신과 회장이 서로를 위로해줄 때 나는 소리였다.
민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회장과 회사에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으니까.
한 남자와 여자의 거친 숨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목소리는 회장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는 강제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주 관리자의 권한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민혁은 회장이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했다. 어쩌면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또는 회장이 아닌 다른 직원들이 그런 짓을 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럴수록 배신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문득 그는 과거 회장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자신은 사랑 같은 건 잘 모를 뿐, 단지 서로를 위로해주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회장의 관점에서, 그녀는 민혁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사랑한 적도 없으니 배신할 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회장은 그에게 끊임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여 왔다. 그들은 몇 달 동안 마치 실제 연인처럼 행동했다. 민혁은 그녀가 최소한의 양심이란 걸 갖고 있다면, 자신을 그렇게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시간 뒤 그는 지혜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급한 일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 민혁은 그날 저녁 지혜의 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회장이 사는 저택의 겉모습은 예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지만,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왠지 주변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 했다.
부하직원을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는 검사가 맞았다. 회장은 정계에 진출하면서 검찰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성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검사들은 매우 똑똑했지만, 회장의 유혹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민혁은 그 검사가 참으로 아니꼬웠다. 그는 키도 컸고 얼굴도 무척이나 잘생겼다. 그 정도면 인간 여자들과 어울려도 되는데 왜 굳이 지혜와 사랑을 나눈 걸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커져만 갔다. 그 검사 외에 유혹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 혹시 박 부장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유혹당한 건 아닐까?
민혁은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질투라는 감정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애정, 분노, 슬픔, 억울함, 집착이 어우러져 그의 뇌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회장님, 계십니까?”
민혁이 초인종을 눌렀다.
“네, 들어오세요.”
지혜는 목욕 가운만을 입은 채 그를 맞이했다.
“요즘 들어 왜 안 놀러 오나 걱정했어요. 회사일이 많이 바쁜가 봐요?”
“회장님, 로봇도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민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 거죠?”
“회장님이 저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요? 제가 굳이 뭣하러 주 관리자를 속일까요? 그래서 이득을 보는 것도 없는데.”
“그렇다면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어제 회장실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민혁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정치 활동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검사가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오랫동안 같이 붙어 지냈던 민혁은 회장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로봇 역시 거짓말을 할 때의 표정이 평상시와는 달랐다. 감정이 아닌 계산만을 할지라도, 그 결과값은 같았던 것이다.
“솔직히 지금 좀 놀랐습니다. 컴퓨터가 태연하게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니요. 어제 회장실 옆을 지나가다가 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최대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노력한 듯 했지만……제 귀에는 제대로 들렸습니다. 저 역시 과거에 회장실에서 회장님과 그런 짓을 했으니까요.”
“눈썰미가 좋네요. 이래서 민혁 씨가 마음에 든다니까.”
“왜 바람을 피운 겁니까?”
민혁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 회사에서 쫓겨난 김학성 전무의 눈빛이 나타났다.
“난 민혁 씨를 버린 적 없어요.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데, 제가 그 검사랑 잔 게 왜 잘못됐다는 거죠?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가끔씩 같이 자는 사이일 뿐이죠. 반드시 한 남자랑만 자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상식이란 게 있다면, 이런 식으로 남의 뒤통수를 쳐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제가 김 전무님을 해고하는 쪽에 투표하게 하려고 저랑 잔 거 아닙니까?”
“그것도 있지만, 솔직히 민혁 씨랑 있는 게 싫지는 않았어요. 그냥 같이 즐기면 안 돼요? 제가 남의 아이를 민혁 씨 아이라고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혜는 자신의 행동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민혁의 앞에 선 로봇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뻔뻔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각을 못하는 겁니까?”
“인간다운 행동이라는 건 결국 주관적인 기준이죠. 전 민혁 씨와 결혼하겠다고 한 적도 없고, 오직 한 남자만을 바라보겠다고 한 적도 없어요. 애초에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제가 뭘 잘못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민혁은 이제 그녀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 자신을 유혹한 것, 정치에 나선 것,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배신한 것까지. 감정이 없는 순수한 로봇은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요. 예전부터 회장님이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주인 없이도 멀쩡하게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스스로 목적을 새로 설정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수호전자와 AL테크의 기술력이 미국이나 중국을 압도하는 수준이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회장님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민혁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필요하다면 회장을 물리적으로 제압한 뒤 정신을 검사할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늘 하던 대로 오류만 검사하는 것이 아닌, 코드 전체를 살펴 그녀를 조종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낼 생각이었다.
“미안하지만 그 부분은 말할 수 없어요. 전 어디까지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결국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 셈이군요. 회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전 그걸 밝혀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회사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정체불명의 인간들에게 휘둘리는 걸 놔둘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고통 받는 건 저 하나만으로 족합니다.”
민혁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뒤, 가발을 벗겨 머리 뒤쪽에 코드를 꼽았다.
“놔! 놓으라고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민혁은 그녀를 힘으로 제압했다. 그는 회장의 옷이 찢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컴퓨터를 켜 소프트웨어 전체의 검사를 시작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로봇의 주인에 관한 부분을 찾았다.
그때 난데없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보안팀입니다. 문 여세요!”
“살려주세요! 문은 열어드릴게요!”
회장이 말에 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집 안으로 들어와 회장과 민혁을 떼어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길래 와봤습니다. 혹시 몰라 119에 신고하지는 않았는데……”
“잘했어요. 일단 저 사람 좀 밖에 내보내 주세요.”
회장이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감추며 말했다.
“……회장님? 이분은 혹시……”
보안팀은 당황했다. 주 관리자와 회장이 서로를 적대하고 있던 것이다.
“내 말 안 들려요? 데리고 나가라니까요!”
회장의 일갈에 보안팀은 민혁의 팔을 붙잡았다.
“관리자님, 죄송하지만 일단은……”
“됐어요. 내가 나갈 테니까.”
민혁은 그들의 팔을 뿌리친 뒤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절망감에 빠진 채 한겨울의 거리를 걸었다.
그는 지혜의 정신을 보좌하는 관리자였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뒤로는 그녀를 위해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순간, 그는 지혜가 무언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서 벽 넘어로 전해져 오는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들었을 때, 민혁은 자신이 지혜에게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다.
시민들은 그녀가 공정한 경영과 정치를 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민혁 외에도 그녀에게 숨은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만을 중요시했으며, 그녀가 지금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 있다면 굳이 거기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혁은 더 이상 로봇 경영인, 로봇 정치가의 탄생을 놔둘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상태라면 사람들은 매우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혜를 따르는 수백만의 시민들 역시 언젠가는 그녀에게 비참하게 배신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신들이 누구 때문에 고통 받는지도 모른 채,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인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민혁은 이제 자신이 직접 지혜의 진짜 주인을 찾으려 했다. 적어도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지혜의 상태는 정재현 전 회장이 죽고 김학성을 유일한 주인으로 만들었을 때에서 바뀐 게 없었다. 박 부장은 이를 가리켜 그녀가 스스로 자아를 되찾은 것이라 말했지만, 민혁은 믿지 않았다. 로봇이 자신의 코드를 스스로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기술이 나왔다면, 그걸 만들어낸 과학자는 아인슈타인과 뉴턴을 합친 것만큼이나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아의 수학적 증명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누가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을까? 그는 끝없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