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집으로 돌아온 새벽, 이상하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보통 새벽에 깨면 잠이 들지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아주 기이한 꿈을 꾸었다.
깊은 새벽, 담배를 피우기 위해 복도에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둑방 작은 불씨가 눈에 들어왔다. 담배가 타들어 갈 때까지 둑방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왠지 둑방쪽에서도 나를 향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듯했다. 서로의 불씨가 다 타들어 갈 때쯤 둑방쪽에서 담배 불씨보다 빛나는 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점퍼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번호가 떠 있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 너머 목소리가 들려왔다.
‘쇼타임’
통화가 종료됨과 동시에 둑방에서 빛나던 불빛도 사라졌다. 다만 담배 불씨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집으로 날아가더니 갑자기 커다란 불길이 집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둑방까지 번져 타들어 가고 있었다. 둑방에 불길이 번지면서 검은 형체의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또렷이 들어왔다. 몸이 타들어 가는 데도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집 뒤로 백발을 한 어머니의 거대한 환영이 나타났다. 어머니 역시 둑방 위의 남자처럼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거대한 불길을 보고 웃는 것인지, 타들어 가는 집을 보고 웃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이 기괴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불장난을 한 아이처럼 요의가 밀려왔다.
꿈에서 깨 제일 먼저 한 일은 천장을 세 번 두드린 것이었다. 잠시 뒤 톡톡톡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뒤숭숭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밥 한 번 먹자.’
여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읽음 표시가 지나갔지만 답은 없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우리들은 아직까지 무사했다.
아침부터 천장을 울리는 발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위층 남자는 어젯밤 집에 돌아온 것인지 새벽부터 위층이 요란스럽더니 아침부터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고,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지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현관문의 진동에 집안이 흔들리는 듯했다.
‘쿵쿵쿵쿵쿵쿵쿵’
다분히 의도적인 소음이었다. 위층 남자는 일부러 바닥에 발을 구르고 있었다. 거실 곳곳을 활보하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소음에 욕지기가 밀려왔다. 간만에 느끼는 살기에 짜증 섞인 묘한 쾌감이 일었다. 작년 여름 505호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일었던 충동이 조금은 잠재워졌다. 하지만 남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참을 수 있다면 참는 것이 좋았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소음을 더이상 참지 못했다. 위층 남자가 의도한 것이라도 좋았다. 이번만큼은 참지 않기로 했다.
“야, 나와!”
505호 현관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자 더욱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새끼야, 나와! 나오라고!”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더해지자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아침부터 술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는. 죽고 싶냐? 어디 남의 집 문을 함부로 두드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는 남자는 작년에 봤던 것보다 키가 더 컸다. 험상궂게 돌출된 눈과 광대, 툭 불거진 코와 입은 전체적으로 위압적인 인상을 주었다. 남자의 인상에 위축됐지만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조용히 좀 걸으시라고요.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잖아요.”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남자 역시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죽으시던가.”
남자의 어이없는 반응에 코웃음이 나왔다.
“너나 죽어, 이 미친 새끼야.”
도발이었다. 죽으라는 말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의 도발에 남자가 내 멱살을 잡았다.
“미친 새끼? 이 자식이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나? 죽고 싶냐?”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남자의 입에서는 술 냄새 베인 악취가 풍겨왔다. 남자의 협박에도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죽고 싶다면 어쩔건데. 죽일 거야?”
계속되는 도발에 남자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돌덩이로 얻어맞은 듯 뻐근한 얼얼함이 얼굴과 머리를 울렸다. 하지만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자의 주먹이 또다시 얼굴을 가격해왔다. 남의 무차별적 폭행은 내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빠, 일어나 봐요. 오빠!”
통증 위로 따가움이 지나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라 어렴풋했다. 무겁고 따가운 통증에 눈을 떠보려 했지만 제대로 눈이 떠지지 않았다.
“오빠, 나에요. 정신이 들어요? 일어나 봐요!”
여자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얼마나 누워 있던 것일까. 사방이 어두웠다. 여자가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두고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여자가 나를 부축했다.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여자가 내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녀린 여자에게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내 몸을 이끄는 여자의 힘이 느껴졌다. 나는 여자에게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가능하면 여자에게 무게를 지탱하고 싶지 않아 힘을 내려 했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힘이 풀렸다. 초여름 날씨에 무거운 남자를 부축해 걷고 있는 여자의 몸에 땀이 베이고 있었다. 여자의 풋풋한 땀 냄새가 잠시나마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여자는 나를 이불 위에 눕혔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여자는 내 옷을 벗기더니 차가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여자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이 들어버렸다.
자는 내내 어렴풋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의 고함 사이에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소리들이 잠속에 묻혀버렸다.
흠씬 두들겨 맞고 나니 응어리가 빠져나간 듯 개운함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못했을까, 어머니에게도, 여자에게도. 사실 내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 게 아니었다. 나 좀 좋아해 달라고, 사랑해 달라는 그 말이었다.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달아나 버릴 것 같았다. 평생 작은 쪽방에 살아도 좋았다. 나를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늦은 밤, 식당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쓰러져 잘 때면 나는 어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기름 냄새에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어머니는 알았을까, 이런 나를.
삶을 공평하게 나눠가졌다 하더라도, 삶에 공평함이란 없었다. 저울의 기울기는 사람마다 달랐고, 이기고 지는 쪽은 존재했다. 그래서 짝사랑은 힘든 것이었다.
얼마나 잔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 달게 푹 잔 듯 남은 잠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온몸 구석구석 쑤시고 결리는 통증에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뻐근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거실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솜뭉치를 안은 듯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소한 냄새였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여자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웬일이야, 이 아침에.”
거실에 앉아 휴대전화를 켰다.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불 앞에 서 있었다.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나의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자 쪽으로 갔다. 여자에게서 비릿한 내음이 났다. 여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냉기도는 여자와 달리 냄비에서는 고소한 냄새의 흰죽이 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여자의 몸을 돌려세우자 여자의 얼굴은 멍자국 투성이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혀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 자식이 또 때렸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 여자를 어깨를 흔들었다. 여자의 음성은 떨렸고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나는 얼른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여자를 의자에 앉혔다. 여자는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퇴근 후 계단을 오르던 여자는 5층 복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를 겨우 집에 데려와 눕혀 놓은 뒤 5층으로 올라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를 향해 날아든 건 빈 맥주캔이었다. 여자는 소주병이 아닌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지만 여자를 보자마자 만취한 남자는 여자를 붙들고는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 새끼랑 같이 있었지. 그렇지?”
“그랬어요, 왜?”
같이 있었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여자의 뺨을 때렸다. 크고 거친 남자의 손이 지나간 자리는 붉게 변했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기 시작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여자의 멱살을 붙잡고 여자를 흔들었다.
“나 없을 때는 그 새끼랑 자고, 내가 오면 나랑 자고. 그래, 그 새끼는 얼마를 주는데? 어?”
남자의 힘에 여자는 고함을 질렀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여자의 고함에 남자는 여자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여자는 잠시 의식을 잃었지만 남자의 계속된 발길질에 정신을 잃을 여유가 없었다.
“쓰레기 같은 년.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바람을 펴? 죽어라, 죽어!”
인정사정 없는 발길질에 이상하게 여자의 정신은 또렷해져 갔다. 남자의 매질을 묵묵히 받아내기만 하던 여자의 눈에 빈 맥주병이 들어왔다.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을 집어 남자를 향해 내리쳤다. 맥주병은 남자의 다리를 내리쳤다. 여자의 반격에 남자가 잠시 휘청하는 사이 여자는 소주병을 집어 남자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충격을 받은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았고 잠시 뒤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부엌으로 가 칼을 집어 들었다. 어디선가 주방칼로 사람을 찌를 때는 각도와 힘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그런 건 여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등에 칼을 꽂았다. 그리곤 사정없이 남자의 이곳저곳을 칼로 찔러댔다.
나는 여자를 안았다. 밤새 더 야윈 듯 떨고 있는 여자는 조금만 더 힘주어 안으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했다. 우선 이렇게 여자를 안고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