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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스산한 죽음
작가 : 기옹
작품등록일 : 2020.8.16

미스테리한 가상의 마을 거시를 배경으로, 마을의 비밀과 마주한 남자의 고뇌와 방황을 그린 작품

 
스산한 죽음-10
작성일 : 20-09-30 16:35     조회 : 327     추천 : 0     분량 : 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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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나랑 같이 여기 떠나자.”

  현관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자마자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 · 저녁으로 여자의 집 앞에 서 있는 나를 여자는 일주일째 외면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여자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자 한숨만 쉬었다.

  “일주일 동안 그 자식이 안 온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 오빠가 여기 있는 동안 그 사람이 오기라도 했으면 오빠는 뼈도 못 추렸을 테니까요.”

  여자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여자의 부름에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식탁에 맥주 두 캔을 꺼내 놓았다. 여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앉아요.”

  나도 의자에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빈속에 들어간 알코올 때문에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오빠, 내 이름 알아요? 내 나이는요. 내 고향은요? 내가 대학을 나왔는지 고등학교만 졸업했는지는요.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는요. 나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여자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뭐 기대는 안 했지만 오빠는 내 이름도, 내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다른 오빠들은 적어도 처음 만나면 이름이나 나이 정도는 물어봤거든요. 그럴 때마다 나는 스물다섯도 됐다가, 스물일곱도 됐고, 서른도 됐어요. 사람이 바뀔 때마다 이름도 바뀌었죠. 어떤 오빠한테는 미정이었다가, 다른 오빠한테는 수진이가 되었죠. 어차피 아무도 내 나이나 이름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곳을 떠나버리면 금방 잊어버리니까요. 그래서 적어도 오빠는 거짓은 없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그런데 오빠 있잖아요. 난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에요.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날 때까지 계속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겠지요.”

  여자의 표정은 복잡함으로 뒤엉켜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다른 여자와 있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다. 여자의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떠나자고요? 오빠 나 좋아해요? 나 사랑하냐고요?”

  단도직입적이고 직설적인 질문에 머리가 흔들렸다. 나는 맥주 한 캔을 그대로 들이켰다. 거친 숨이 토하듯 쏟아졌다.

  “나, 좋아하는구나.”

  여자의 말에 이번에는 기침이 쏟아졌다.

  “좋아한다고? 착각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엷은 조소가 흘렀다.

  “훗, 그러면서 도망가자는 말은……. 오빠, 파란색 지붕집에 사는 사람 아는지 물어본 적 있었죠? 말해줄까요? 저 여자가 포주에요. 저 여자가 이 동네 술집 여자들 관리하는 포주라고요. 저 여자가 얼마나 잔인한 여자냐면요, 자식 다섯 명을 모두 입양 보낸 여자에요. 그런 여자라고요.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동네 떠날 수 없어요. 알겠어요?”

  여자의 말에 올라오던 취기가 가라앉았다.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제임스의 얼굴이 스쳤다.

  “오빠, 괜히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지 말고 조용히 떠나요. 그럼 아무 문제 없을 거에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단숨에 맥주를 들이킨 여자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들이켰다.

  “그만 마셔.”

  마시던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여자는 웃었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쓸쓸함 베인 웃음을 보는 것이 싫었다.

  “걱정 고맙네요. 이제 내려가 봐요. 이제 우리 서로 볼 일 끝났잖아요. 나도 오빠 안 좋아하고, 오빠도 나 안 좋아하니까.”

  여자는 남은 맥주를 들이켰고, 나는 그런 여자를 뒤로 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저……,”

  가다가 갑자기 돌아선 나를 여자는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야, 포주에게 줘야 할 돈이.”

  나의 말에 웃음이 터진 여자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여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여자의 웃음에 당황했다.

  “이 오빠 진짜 웃기네. 원빈이에요, 뭐에요. 오빠, 돈 많아요? 한 10억 있어요? 하긴 10억도 부족할 수 있겠다. 이 바닥에서는 부르는 게 빚이니까. 왜요, 내 빚 갚아주게요?”

  아무래도 이번 판의 승자도 여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웃음을 뒤로 하고 도망치듯 여자의 집을 나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봄이 섞여 있었다.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따뜻한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담배를 몇 모금 빨지 않고 불씨를 껐다. 모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어머니의 죽음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파란색 지붕집은 오늘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순간 놀라 몸이 굳었다. 휻전화 진동과 함께 둑방에서도 불빛이 빛났다. 둑방에서 어두운 형체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점퍼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발신번호 표시 제한이 떠 있었다.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둑방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 칙칙 무언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둑방의 빛나는 불빛 옆으로 작은 불빛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나는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하지만 불씨가 꺼지기 전에 발신자가 먼저 통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기고 이내 둑방 위 불빛도 사라졌다. 어두운 형체와의 뜻하지 않은 대치도 종료되었다. 나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지만 그것도 잠시. 불어온 바람에 풀숲이 흔들리더니 둑방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누구일까……. 몽글몽글해졌던 마음에 다시 찬바람이 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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