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_마청과 A조_합작_160824
8.
“있잖아.”
채소한이 한소래담의 눈앞에 작은 반지 두 개를 들이밀었다. 하나는 작은 왕관 모양 장식이, 다른 하나는 작은 별 모양 장식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 반지 두 개가 대체 뭐가 다른 걸까?”
“...왕관이랑. 별이랑.”
“아니 그건 알고. 이렇게 작은데 꼈을 때 보는 사람이 구분이 돼?”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한소래담은 코앞에 있는 채소한의 손을 밀어냈다. 숨길 것이 많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질문 하나도 부담스러워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사실 배꼽티 때문에 드러나는 채소한의 복근이 더 부담스러웠지만.
채소한은 다시금 두 반지를 내려다보며 그 차이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누나와 여동생이 있는 것에 비해선 절망적인 센스였다.
“그것보다,”
“응?”
한소래담이 가게 바깥쪽을 손짓했다. 채소한은 반지를 내려놓고 한소래담을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왜?”
“부탁이 좀...”
한소래담이 상황을 살피다가 입을 다물었다. 채소한도 뒤를 돌아보았다. 남학생 두 명이 저들끼리 대화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 애들은 다 저런 옷을 입고 다니나봐.”
“혜달도 당연히 입고 있겠지? 겁나 기대된다. 나 카메라도 들고 왔어.”
익숙한 교복이 아니었다. 채소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옆에서 살랑살랑 걸어오고 있는 이우비를 발견하고 채소한은 아하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우비, 네 친구들이야?”
한소래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한솔.”
이우비가 손을 파닥여 한소래담을 불렀다. 한소래담이 이우비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채소한은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친구들 데려가.”
“뭐? 왜?”
“내가 쟤네랑 같이 들어가는 건 어색하잖아.”
“하지만 내가 들어가는 것도...”
‘어색할 것 같은데...’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이우비는 이미 채소한의 팔을 붙들고 튄 후였다. 채소한은 끌려가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뭐, 뭐야? 네 친구들 두고 어디 가려고?”
“하하, 내 친구들 아냐.”
“응?”
상큼하게 돌아온 대답에 채소한이 말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이우비는 설명해 줄 생각도 없이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채소한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한편, 낯선 남자 둘과 남게 된 한소래담은 급격하게 굳었다.
“어...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데? 되는 거예요? 됩니까?”
남학생 하나가 어색하게 물었다. 굳어 있던 한소래담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이쪽입니다.”
한소래담이 앞장섰다. 남학생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수군거렸다.
“와, 분위기 죽인다. 여자 옷 입은 비리비리한 놈인데 말을 못 놓겠네.”
“쉿. 들린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한소래담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데 신경 쓰기에는 그녀가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코앞이었다.
이 남학생들은 혜달의 동창이자 시아랑의 친구들이었다. 이우비가 마청과 A조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묘안을 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혜달과 시아랑의 친구 데려오기.
한소래담은 혜달과 시아랑이 이들을 만나면 조원들 사이의 분위기도 풀리고 마음도 풀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한소래담은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액세서리 가게 앞에 섰다.
“어? 너희가 여기 웬일이야?”
한소래담이 가게 문을 열자 혜달이 뛰어나왔다. 분홍색 리본이 혜달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으하하하하하! 야, 찍어! 얼른 찍어!”
“졸라 잘 어울려!”
남학생들이 마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혜달은 욕을 하면서 친구들의 등짝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놓고 옥신각신 하는 동안에도 귀와 목, 팔, 흰 니삭스 위의 다리까지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온몸이 발개질 정도로 기뻐하다니!’
한소래담은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혜달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시아랑은 또 얼마나 기뻐할지 설렐 지경이었다.
한소래담이 자신이 한 일에 감격하는 동안 혜달이 남학생들의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아냈다. 혜달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근데 너희 여기 어떻게 왔어? 한소래담이랑은 어떻게 같이 있고?”
“당연히 네 친구가 알려줘서 왔지, 어떻게 왔겠냐?”
“어, 근데 저 사람은...”
“시아랑 아니야?”
막 가게 문을 열고 나오던 시아랑이 그 상태로 굳었다. 한소래담이 고개를 돌리자 시아랑은 그새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중이었다. 혜달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자, 잠깐, 기다려!”
“내가 데려올게.”
한소래담이 시아랑의 뒤를 쫓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부끄러울 테니 한소래담이 직접 등이라도 떠밀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아랑은 한소래담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긴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 잠깐만!”
숨이 금세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소래담은 원래 달리기에 능하지 못했다. 그녀가 초능력이라도 쓰지 않는 한 시아랑을 따라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소래담은 다리를 멈췄다.
‘초능력은 못 쓰지만...’
“여우볕.”
한소래담이 손으로 양쪽 다리를 톡톡 두들겼다.
이우비는 붉은 차이나드레스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시아랑을 발견하고 킥킥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혼란과 당혹, 그리고 조금의 분노.
“내가 이 맛에 살지.”
“너 또 사람 갖고...”
이우비의 장난기 어린 표정과 반대로 채소한은 조금 뚱해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의심스러운 일이 생겼다 하면 십중팔구 범인은 이우비였다. 뭔지는 몰라도 뭔가 했으리라.
채소한은 불퉁한 볼을 하고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이우비는 채소한의 얼굴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라?”
한소래담이 시아랑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내가 졸졸 따라다니던 것도 못 따돌렸으면서...’
계획이 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우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소래담에게 팔을 붙잡힌 시아랑이 멈춰 섰다.
“뭐야, 대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아랑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한소래담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혜달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분홍색 미니스커트가 팔랑거리는 게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시아랑!”
혜달은 대충 숨을 고르고 급하게 말했다.
“시아랑, 내가 애들한테 잘 말할게. 너무 걱정...”
“걱정? 내가 뭘 걱정해? 시아랑이 이런 거지같은 여자 옷이나 입고 다닌다고 소문나는 거?”
시아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과 혼란이 가라앉자 분노가 올라왔다. 시아랑의 기색을 눈치채고 혜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럴 일 없어.”
“그런데 그 자식들을 여기까지 데려와? 그것도 하필 오늘? 분명 첫 날에 내가 경고 했을 텐데.”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변명을 할 거면 그럴듯하게 해.”
“진짜 아니라고.”
한소래담은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뭔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황은 한 마디 한 마디 넘어갈수록 더 악화되었고, 한소래담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아랑이 남자 옷 입고 있을 때 부를 걸 그랬구나!’
“혜달 말이 맞아.”
어느새 다가온 이우비에게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네 친구들을 데려온 건 혜달이 아니라 한소래담이야.”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한소래담에게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소래담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아랑을 보았다. 어깨 너머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발)가 바람에 나풀거리다가 내려앉았다. 살짝 벌어져 있던 새빨간(립스틱) 입술이 굳게 닫혔다. 한소래담이 때 아닌 외모 감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시아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멋대로."
예쁜 입술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시아랑은 당장에라도 한소래담을 씹어 먹을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할 수만 있다면 한 입에 씹어 먹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새 혜달이랑 친해졌나보지? 둘이 아주 꼭 닮았어. 사람을 어찌나 잘 챙기는지."
혜달이 얼굴을 찌푸렸다. 비꼬는 말임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한소래담은 미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한소래담은 이 상황이 그저 부끄러웠다.
‘누가 봐도 착하고 다정한 혜달이랑 내가 닮았다니!’
이건 그야말로 황송한 칭찬이었다. 이우비의 작전에 따르며 가슴앓이 하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만으로 무거워지던 어깨도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도, 그 동안의 피로감과 불안함까지 이 순간 다 보상받은 것 같았다.
“그동안 뒤에서 안 들키게 계획 짜느라 힘들었겠구나. 머리 쓰느라 고생했네.”
시아랑의 기분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있었지만 한소래담은 그의 말을 ‘친구와 만나게 해주느라 고생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무뚝뚝한 얼굴에 슬쩍 홍조가 떠올랐다. 시아랑은 일말의 죄책감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때 이우비를 따라왔던 채소한이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잖아.”
“알면 뭐가 달라져? 내 꼴을 본 놈들 눈알을 다 뽑아버릴 수도 없는데!”
시아랑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채소한이 말없이 이우비를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축 가라앉자 한소래담은 그제야 시아랑이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미안."
한소래담이 처음으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지만 시아랑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사과를 하는 한소래담의 얼굴에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으니까.
한소래담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이우비는 오른손을 들어 웃음이 배어나온 입을 가렸다.
‘이대로 한소래담이 주먹이라도 날린다면 재밌어지겠다!’
이우비의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거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가 잘 돌려보낼게."
한소래담은 진심을 담아 반성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번에는 방과 후에 데려올게."
"풉."
이우비가 입을 틀어막았다. 채소한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한소래담은 그들의 반응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자책하고 있었다.
‘이우비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라도 말렸어야 했어. 시아랑은 성실하니까 수업시간에 친구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을 거야. 나란 애는, 정말...’
기껏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하나 했더니 결국 이 모양이었다. 한소래담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 참나.”
시아랑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진심인지 놀리려는 건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더 실랑이해봤자 화만 북돋을 것 같았다. 시아랑은 한소래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그냥 돌아섰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가발을 아예 벗어버리며 멀어진다.
혜달이 조심스럽게 한소래담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한소래담은 대꾸 없이 시아랑이 간 길을 따라 걸었다. 이우비가 참았던 폭소를 터뜨린 것을 배경음악으로 삼아, 그녀의 뒷모습이 제법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