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_마청과 A조_합작_160824
6.
“묻잖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냐고.”
“그래.”
시아랑의 답도 절대 친절하지 않았다. 벌써 겁을 먹은 한소래담이 입을 꾹 닫았다. 늘 자상함과 상냥함의 온상과 같았던 혜달이었지만 막상 정색하고 나오자 박력이 대단했다.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더니 딱 그 짝이구나.’
험악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던 한소래담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우비가 느끼는 바는 그녀와 달랐다. 그는 슬쩍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이 싸움에 도화선이 됐던 채소한은 눈 둘 곳을 못 찾고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혜달은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시아랑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조원들이 피해를 봐도 괜찮다는 거야?”
“...그래.”
시아랑은 짧게 대꾸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돌아오는 반응이 점차 격해지고 있다는 것은 시아랑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사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로서는 혜달이 그냥 제 분에 못 이겨 토라져버리는 게 제일 좋은 결과였다. 시아랑이 원하는 것은 각자 사생활을 존중해 주는 비즈니스 관계. 괜한 오지랖에 휘말려 정신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피차 무시하는 게 편했다.
그러나 혜달은 이대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혜달은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손을 시아랑이 보던 책 위에 얹었다. 책장이 젖자 시아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혜달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시아랑.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고 앞으로는 3년이나 남았어. 계속 이렇게 지낼 생각이면 나는 너랑 같은 조를 할 생각이 없어.”
혜달의 말은 미리 생각해놓기라도 한 듯 청산유수였다. 시아랑도 짜증을 숨기지 않고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나가.”
혜달은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아니지. 네가 나가면 되지.”
“.......”
시아랑이 혜달을 노려보았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닌데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기 싸움이 하도 팽팽해서 곧 누구 하나가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소래담은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두 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계속되던 두 사람의 대치는 시아랑이 방을 나가며 마무리됐다.
달칵.
“후.”
문이 닫히자마자 혜달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마저 털었다. 사용한 수건을 의자 등받이에 단정하게 걸쳐놓고 난 후에야 상황이 조금 보였다. 채소한도 한소래담도 이 분위기가 꽤나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럴 만 하다. 입학식을 하고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식의 기 싸움이 벌써 두 번째였으니까.
‘그래, 앞으로 3년이다, 3년.’
현실을 되짚자마자 다시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혜달은 한소래담을 보며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시아랑에게 기세 좋게 말하긴 했지만 이제 와서 조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어쩔 수 없다고 눈을 돌리거나 숨을 죽이면서 지내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철회할 수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말을 철회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지.’
혜달은 물기가 남은 머리를 하고 기숙사를 나갔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한소래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채소한은 완전히 풀이 죽은 발걸음으로 자신의 침대에 올라갔다.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는다.
“조 이름은 엄청 멋있는 걸로 짓고 싶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센 조도 하고 싶었고 흑도종은 내 발싸개죠! 도 하고 싶었고 또...”
‘저런 이름보단 A조가 낫지.’
한소래담은 찡찡거리는 채소한을 보며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뭐 그래봤자 조 이름 같은 건 그녀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일주일 뒤면 탈출해서 외국으로 뜨고 없을 텐데 조 이름이 발싸개죠든 발사 개조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긴 한데.’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드르렁. 크어허. 푸우...”
칭얼대는 소리가 금세 줄어든다 했더니 곧 코 고는 소리가 시작됐다. 채소한이 침대로 올라간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는데.
‘답이 없구나, 답이 없어.’
한소래담은 조용히 고개를 젓고 앞으로의 탈출 계획이나 짜기로 했다.
일단, 잡초 정리를 맡은 것이 행운이었다. 혼자 외진 곳을 돌아다녀도 그리 수상해보이지 않으니까.
‘그걸 기회삼아 탈출할 수 있는 경로를 찾거나, 아니면 만들어도 괜찮겠다. 으음, 뛰어 넘는 건 눈에 너무 띌 것 같고, 주방에서 숟가락을 훔쳐 와서 땅굴을 판다거나...’
마법의 힘을 이용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한소래담은 누가 볼까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손바닥만 한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끼적거렸다.
“뭐해?”
침대 위에서 이우비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한소래담이 화들짝 놀라 쓰던 메모지를 구겼다. 이우비는 곤히 잠든 채소한을 한 번 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와, 진짜 금방 잠드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참 짐승처럼 살아.”
“...많이 친해?”
한소래담이 이우비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한 마디 꺼냈다.
“별로 친하진 않고. 아니 친한 건가? 엄마들끼리 친해서 어렸을 때 자주 놀았어. 중학교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이우비가 말을 풀며 한소래담의 뒤에 섰다. 한소래담은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를 책상 구석으로 밀었다.
“그래서 이게 뭔데?”
이우비가 종이를 가로챘다. 당황한 한소래담이 벌떡 일어나자마자 기숙사실 방문이 열렸다. 한 손에 프라이팬을 든 혜달이었다.
“얘들아. 밥 먹자.”
혜달은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혜달의 출현에 이우비의 신경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소래담이 종이를 빼앗았다. 그녀는 그것을 바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자신의 빈손을 확인한 이우비가 아깝다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밥?”
그 와중에 밥 소리를 기가 막히게 주워들은 채소한이 벌떡 일어났다. 혜달이 든 프라이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
채소한은 혜달의 불고기를 찬양하고 있었고 한소래담은 밥을 벌써 세 그릇 째 리필 했다. 접시를 핥을 기세인 그들을 보며 이우비는 피식피식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섯 명이 한 조가 된 거지? 신이 날 좋아하나?’
이우비는 탄복할 지경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스릴 넘치는 사건이 벌어져주다니, 덕분에 앞으로 삼 년이 꽤나 흥미진진해질 것 같았다.
“정말 안 먹어도 되겠어?”
“응. 지금 가는 게 저녁약속이라.”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혜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유가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접시를 핥는 채소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맛있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혜달은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녀올게. 내 몫도 남겨놔?”
머리를 매만지고 멋들어진 봄코트까지 입은 이우비가 방을 나갔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준 혜달이 다시 채소한과 한소래담을 보았다.
‘행복하게 먹어주는 모습은 기쁘지만...’
이 방법이 시아랑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싶어 혜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랑이 접시를 핥는 모습은 영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다. 뿌듯한 것도 잠시, 혜달은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음 날 아침, 혜달이 눈을 뜨자 한소래담은 벌써 교복을 다 챙겨 입은 상태였다.
‘참 부지런한 녀석이구나.’
혜달은 눈을 돌려 시아랑의 자리부터 확인했다. 시아랑의 침대는 이미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혜달이 큰 맘 먹고 그의 책상 위에 놔둔 불고기 백반도 그대로였다.
“내가 참았어야 했나...”
한소래담은 넥타이를 메다가 혜달의 목소리를 듣고 눈알을 굴렸다.
‘내가 대답해야 하나? 혹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한소래담은 눈치를 보다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
“아니야.”
혜달이 침대에서 한소래담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한소래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혜달이 기운 없이 답하며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는 여동생 셋을 도맡아 키우며 초반의 기 싸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지금부터 분위기를 미리 잡아놔야 나중에 피곤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혜달이 거기까지 계산해서 화를 냈던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야지,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혜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뱉어내는 한숨의 깊이만큼 한소래담의 마음도 덩달아 불편해졌다.
***
“...내가 말릴걸 그랬어.”
한소래담은 뽑고 있던 잡초를 바닥에 살살 던졌다. 혼잣말이라도 하면 좀 더 편해지려나 싶어 꺼내본 말이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오늘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혜달과 시아랑의 사이는 냉랭했다. 가방을 놓으러 기숙사에 들렀을 때 시아랑의 책상에 있던 반찬이 사라진 걸 보고 한소래담이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걸 해치운 게 채소한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하아...”
‘둘이 싸울 때 끼어들 걸 그랬나. 입학식 날에도 난 그냥 멀뚱히 보고만 있었고... 어쩌면 혜달이나 시아랑이나, 아니 이우비와 채소한도 내심 날 탓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냐, 설마... 괜찮을 거야.”
한소래담은 고개를 크게 젓고 잡초 뽑기에 집중 했다. 잔디와 들꽃 사이에서 잡초가 쏙쏙 뽑혀 나왔다.
“하다 보니 꽤 재밌네, 이거.”
하지만 그 손길도 곧 멈췄다. 담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잡초가 잘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데서 소심하고 이상한 데서 꼼꼼한 한소래담은 주변을 한 번 살펴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왼손을 오른손 위에 얹는다.
“바람꽃.”
주문을 끝낸 한소래담이 눈독 들였던 잡초를 당겼다. 우지끈, 나무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잡초가 뽑혔다.
툭.
“어?”
담장의 낮은 벽돌 하나가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뭐해?”
한소래담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우비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소래담은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털고 일어났다.
“...아니. 벽돌이 떨어져서.”
“잡초 뽑기 하는 거 아니었어?”
한소래담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우비가 방긋 웃었다. 한소래담은 이우비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혹시 지금 뭘 봤나?’
제 발 저린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벽돌 건드린 적 없어.”
뜬금없는 말에 이우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소래담은 바짝 긴장했지만 이우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보다 더 재밌는 일을 위해 온 것이었으니까.
“있잖아.”
이우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시아랑이 왜 기분이 안 좋은지 알아?”
“엥?”
한소래담은 이우비의 뜬금없는 질문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우비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만으로 사람 서넛은 잡아먹게 생겼으면서 저 맹한 소리는 또 뭐야.’
이우비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랑이랑 혜달 사이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지? 도와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