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해는 일단 떠오르기 시작하면 무서운 기세로 어둠을 몰아낸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침이 되는 것이다. 한소래담은 이 시간을 참 좋아했다. 일어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 시간은 언제나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시간이었으니까.
한소래담은 주머니에서 분홍색 종이를 꺼냈다. 그녀의 아빠인 한윤의 글씨체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종이를 쓸어보았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흔적이 느껴졌다. 한소래담은 다시 주머니에 종이를 넣었다.
한소래담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최대한 조용히 가방을 열고 지갑과 간단한 옷 몇 개를 넣는다. 대부분의 짐은 캐리어에서 풀지 않았으니 따로 챙길 필요도 없었다. 학교에서 떠나기 위해 챙긴 가방은 한없이 가벼웠고, 그것은 한소래담의 마음과는 정 반대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과제로 조원들에 대해 적은 종이도 챙겨 가방 안에 넣었다.
“으음...”
채소한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한소래담의 어깨가 크게 움직였다. 채소한은 다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소래담은 채소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누워있는 조원들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챙긴 가방을 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착잡하게 그것을 껴안고 눕는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상념에 젖기 좋은 때는 아니었다.
‘드디어. 오늘이다.’
***
마법소녀 박물관은 세워진 지 15년 정도 된, 나름의 연식을 자랑하는 박물관이었다. 당시 마법소녀의 인기를 힘입어 지어졌지만 요즘은 현역들이 거의 다 마법소년인 관계로 마법청소년으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역대 마법소녀들의 얼굴이나 업적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 한소래담도 아빠인 한윤과 종종 오곤 했다. 엄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아랑이 여기를 지목한 것도 운이 좋았지.’
입학 직전, 한소래담이 아빠와 포옹하며 ‘2주 뒤 자정에 그곳에서’라는 메시지가 가리킨 곳이 바로 마법소녀 박물관이었다. 결국 약속한 ‘2주 뒤’라는 시점에 빠져나가는 건 실패했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다음 약속에 대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도한 것이다.
어쨌든 이 박물관은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수많은 학생들의 수학여행 및 외국인들의 관광코스에 포함되어 있어 철만 되면 언제나 사람이 붐비곤 했다.
그곳에 멀쩡한 남자 차림의 A조원들이 당당하게 입성했다. 입구까지만.
“...어쩐지 근처에 사람이 없더라.”
“내가 이런 바보짓을 하다니...”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월요일에 휴관이다.
문화생활과는 별 인연이 없는 남고딩 4명과 남고딩인 척하는 여고딩 한 명은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채소한이 “휴관”이라고 써진 팻말을 붙들고 절규했다.
“안 돼! 휴관이라니! 휴관이라니! 책임자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구슬픈 울음이었다. 한소래담은 문을 다시 당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철커덕 거리는 소리가 채소한을 더욱 슬프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혜달이 중얼거렸다. 시간을 다시 맞추고 외출 허가를 받으러 또 얼마나 뛰어다녀야 할지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일단 이동했으면 좋겠는데. 꼭 그 박물관일 필요는 없으니 뭐라도 다 같이 하고 감상문 쓰면 되겠지.”
시아랑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장 차림도 아니고 교복 차림도 아닌 사복을 입은 시아랑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쭉 뻗은 다리와 배우 같이 선명한 이목구비, 차갑고 무심한 회색빛 눈동자. 한소래담은 새삼 그 미모에 감탄했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거? 뮤지컬은 너무 비싸니까 연극, 아니야. 연극은 미니멈이 코를 골 수도 있으니까. 영화나 보러 갈까?”
이우비가 자연스럽게 한소래담의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한소래담이 고개를 돌려 이우비를 보았다. 이우비가 한소래담을 마주보며 생긋 웃었다. 사르르 웃는 눈웃음을 보니 이우비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미남의 미소는 한소래담에게 부담스러울 뿐이었지만.
“어어, 안 돼, 안 돼.”
채소한이 이우비와 한소래담 사이에 억지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소래담은 이우비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다른 것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어리둥절한 한소래담의 뒤에서 이우비가 짙게 웃었다. 시아랑은 그 웃음이 신경 쓰여 일부러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했다.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가서 제일 빠른 걸로 보자.”
한소래담은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았다.
‘보름달 같은 얼굴, 광장만한 눈동자, 오후의 햇살처럼 당신은 빛납니다.’
한소래담은 쪽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선물로 온 꽃은 그녀의 아빠인 한윤이 보낸 것이었고, 쪽지의 쓰여 있던 내용은 암호였다.
‘보름날 오후에 광장에서.’
오후라면 적어도 12시부터일 것이다. 보름날이면 오늘이었고, 마법소녀 박물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장도 있으니 약속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략 계산을 해 볼 때, 영화를 보다 중간에 나오면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영화관이라면 빠져나오기도 쉬울 테니 한소래담이 이 계획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요즘 볼만한 영화 있어?”
“글쎄...”
한소래담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사람들이 많은 길가로 나오자 사방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집중된 탓이었다. 번쩍번쩍한 미청년들 네 명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멀쩡한 옷을 입자 채소한까지도 마치 굉장한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그런 이유로, 백화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영화관에 도착할 때까지 한소래담은 슬쩍 밍기적거리며 일부러 조금 뒤처져 걸어갔다.
“무슨 영화 볼까?”
“난 액션 영화!”
채소한이 번쩍 손을 들었다. 한소래담은 어떤 포스터 앞에서 멈춰 섰다. 꽃밭에서 금발의 남녀 둘이 꼭 껴안고 있는 포스터였다. 원작 소설을 읽었던 한소래담은 그 영화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 나이 남자애들에게 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보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겠지.’
“맨솔아, 이리 와!”
채소한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한소래담을 불렀다. 영문을 모르고 걸어가자 혜달이 한소래담의 손목을 기습적으로 끌어당겼다.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한소래담은 자기도 모르게 가위를 냈다.
“.......”
“아이씨.”
혜달이 보를 낸 자신의 손을 원망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어쩌다보니 한소래담만 빼고 전부 보를 낸 상황이었다. 이우비가 한소래담의 손목을 잡고 매표소 앞으로 갔다.
“자, 골라.”
“내가?”
“응. 네가 이겼으니까 네가 보고 싶은 거 고르면 돼.”
참고로 나는 저거, 라면서 이우비가 공포 영화를 가리켰다. 한소래담은 그보다는 손목에 느껴지는 온기가 더 신경 쓰였다. 아프지 않게 쥐고 있지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가 없다. 원래 친구끼리는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건가?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저거.”
한소래담은 이우비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 로맨스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모두의 얼굴이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굳었다. 한소래담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저게 제일 빨리 시작해.”
***
“크으어. 크으어어어.”
사람이 없는 영화관이라 다행이라고, 시아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아랑은 아마 지금쯤 채소한의 콧구멍을 틀어막고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었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들 다섯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코를 골든 침을 흘리든 상관없었다.
-도망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버리고 도망가요. 그럴 순 없어요.
‘저럴 시간에 도망을 치는 게 빠를 텐데.’
느끼하게 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서로를 껴안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시아랑은 후 숨을 내쉬었다. 흑도종으로 액션 장면을 넣어보려고 한 것 같은데 연출이 영 별로라 집중이 되질 않았다.
‘하긴, 저렇게 많은 대사를 할 동안 흑도종에게 찢어 죽지 않은 것만 해도 현실성이 없는 거지. 실제였다면 남자가 흑도종에게 발견된 순간 온 몸이 반으로 찢겨 죽었을걸.’
툭.
채소한의 머리가 시아랑의 어깨에 올라왔다. 시아랑은 망설임 없이 채소한의 머리통을 옆으로 쳐냈다. 반대편에 앉은 혜달의 머리통과 부딪쳐 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둘 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시아랑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또 금방 채소한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시아랑은 흑도종의 머리와 몸을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손으로 채소한의 머리통을 잡고 세게 밀었다. 그러다가,
“.......”
그러다가 한소래담이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표정하다 못해 재수 없어 보이는 얼굴에서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서 침이 나오는 게 아니라면 눈물이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자연스러워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입과 고양이처럼 앙칼진(시아랑은 잠시 이 표현에서 망설였다) 눈이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시아랑은 팔짱을 끼고 영화 대신 한소래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내용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그걸 커버할 정도로 배우가 신들린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심하고 무표정한 게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저 한소래담이, 왜 울고 있을까.
‘왜...’
이상하게도 한소래담의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시아랑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
한소래담이 정신을 차린 듯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시아랑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한소래담은 자신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이우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러자 이우비가 눈을 떴다. 처음부터 자고 있지 않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소래담과 이우비가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데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한소래담이 어색하게 몸을 구부리면서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우비가 한소래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늘씬하고 예쁜 손이 한소래담의 손과 얽혔다. 시아랑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아랑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쿵!
“으악, 뭐야! 뭐야!”
채소한이 잠에서 깨어나 바둥거렸다. 혜달도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화의 스크린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의자의 손잡이도 덜덜 떨렸다.
“뭐야. 우리 4D 보고 있었어?”
채소한이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아 시아랑은 친절히 채소한의 뒤통수를 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