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매 실습시간마다 한소래담으로 캐치볼을 잡고, 저번에는 흑도종의 사체가 들어있던 유리병을 깨뜨리고, 선생님 말도 안 듣고 흑도종에게 덤빈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허락도 없이 마법 무기를 썼다. 누가 들어도 납득할만한 감점 요인들이 곧 열 손가락을 넘길 지경이었다.
혜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저런 말을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과제는 왕창 깎인 점수를 만회해보라는 선생님의 배려인 것 같았다. 나락까지 떨어진 그들의 성적을 구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었다.
‘과제가 두 개나 늘어났지만 꼴찌를 하는 것보단 낫겠지.’
혜달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겠다고 했으나 채소한은 단호히 말했다.
“나 안 해.”
“뭐? 왜!”
혜달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채소한의 팔뚝을 붙잡았다. 하지만 채소한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우비랑 나랑은 정자일 때부터 친구였단 말야! 그런데도 난 쟤가 무슨 빤스를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자 친구가 몇 명이나 되는지도 몰라! 근데 만난 지 얼마 안 된 너희를 시험 볼 정도로 알아야 한다고? 그걸 어떻게 해!”
‘정자일 때부터 친구...’
한소래담이 그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인지 가만히 곱씹었다. 하지만 곧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은 과제를 두 개나 내주었는데 하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따위를 갔다가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고, 하나는 조원들의 관찰일지를 쓰는 것이었다.
‘관찰일지라니.’
여자라는 걸 숨겨야하는 한소래담에게는 당연히 최악의 과제였다. 더 이상 개인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싫었다.
‘아, 그래. 채소한이 저렇게 싫어한다면 아마 안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소래담은 일말의 희망을 갖고 혜달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채소한의 투정을 듣고 오히려 혜달은 아주 빠앙긋 웃고 있었다.
“난 알아.”
“엉? 무슨 팬티를 입는지 안다고?”
채소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혜달이 고개를 돌려 한소래담을 보았다.
“한소래담. 너 검은색 삼각팬티만 입지?”
‘헉.’
한소래담이 숨을 들이켰다. 다들 한소래담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소래담의 귀 끝이 새빨개졌다.
“게다가 일렬로 정리되어 있어. 아주 단정하게.”
“그, 그건...”
“그리고 한소래담은 여자 친구도 없어.”
“.......”
“모솔이 분명해.”
한소래담이 고개를 푹 숙였다. 채소한과 이우비가 한소래담의 등을 토닥거렸다.
“오늘 너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 기뻐.”
“여자가 정 없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예쁜 애로 소개해줄게.”
한소래담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검은색 팬티는 지난번 혜달이 옷장 서랍을 열어봤을 때 목격한 게 확실했다. 그리고 여자 친구 이야기는...
그 말에도 대꾸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여자 친구는 애인을 뜻하는 것이었겠지만 한소래담에게는 정말로 ‘여자인 친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한소래담을 위로하는 와중에도 전단지를 살펴보고 있던 시아랑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박물관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한소래담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소녀 박물관의 전단지가 시아랑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아랑이 한마디 덧붙였다.
“제일 가까워.”
“응, 가까우면 좋지...”
어떤 의미로는 한결같은 시아랑의 기준을 듣고 혜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소래담은 자신이 가진 전단지 중에 시아랑이 든 것과 같은 것을 찾아 그 뒤에 작게 나온 약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근처에...’
“박물관 같은 거 싫어!”
채소한이 절규했다.
“나도 별로... 영화관 없어, 영화관?”
“그래도 이거로라도 점수 준다는 게 어디야.”
조원들이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한소래담은 몇 번이나 종이를 다시 읽어보았다.
‘마법소녀 박물관. 여기다.’
한소래담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탈출할 기회가 생긴 거야.’
***
혜달이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외출 금지야.”
“...그건 좀 곤란한데.”
보기 드물게도, 이우비는 정말로 곤란한 표정이었다. 독서가 힘들어질 것을 직감한 시아랑이 읽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 앞으로 빠르게 날아간 채소한이 책의 제목을 받아 적었다. 시아랑도 질세라 펜을 들었다.
‘채소한이 내가 읽던 책 제목을 적음.’
그 글을 발견한 채소한도 자신의 종이에 한 줄을 추가했다.
‘시아랑이 ‘채소한이 내가 읽던 책 제목을 적음’이라고 적...’
애들 싸움으로 번질 것 같은 낌새를 눈치 채고 혜달이 발 빠르게 채소한의 펜을 뺏었다.
“이우비 네가 조금만 참아. 당연히 함께 있어야지, 같이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서로에 대해 알겠어. 내 장학그... 아니, 우리 과제 때문이잖아. 공동 목적이라고.”
“.......”
슬쩍 혜달의 본심이 새어나왔다. 이우비가 거기에 대해 뭐라고 태클을 걸기 전에 혜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시아랑이 지원사격을 했다.
“다들 동의했으니까 규칙을 지켜야지.”
이우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내가 너희처럼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이우비의 태도에 혜달과 시아랑이 동시에 울컥했다. 혜달이 화를 억누르고 싱긋 웃으며 도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못 보내 주겠다.”
말을 해봤자 들어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우비는 후 한숨을 쉬며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부드러운 감회색 코트가 단정히 옷걸이에 걸렸다. 이때다 한 채소한이 옷장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전부 코트네! 코트! 코트! 코트! 코트! 왜 이렇게 많아? 브랜드는, 아니 브랜드도 다 다르고! 팬티는, 팬티는 어디 있지?”
뒤에서 지켜만 보던 한소래담이 슬쩍 펜을 들었다.
‘이우비는 코트가 많다. 브랜드는 전부 다르다.’
채소한은 거의 옷장 안으로 전신을 우겨 넣을 듯한 기세였다. 이우비는 말 안 듣는 대형견 목줄을 당기듯 채소한의 옷깃을 당겨 자신의 옷장에서 그를 빼냈다. 재빨리 옷장 문을 닫고 채소한의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채소한은 당당히 위대한 발견을 지껄였다.
“팬티가 없다!”
한소래담이 ‘이우비는 팬티가 없다.’라고 적었다.
‘노, 노팬티?’
적고 나서 깨달은 한소래담이 당황해 펜을 떨어뜨렸다.
‘에이 설마. 깊숙한 곳에 넣어놨겠지.’
이우비는 불쾌한 표정으로 옷장에 기대어 삐딱하게 섰다. 펜을 주운 한소래담의 시선이 이우비의 발끝에서부터 얼굴까지 쭉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그녀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한소래담의 ‘이우비 관찰일지’에 한 줄이 추가됐다.
‘이우비는 비율이 좋고 잘생겼다.’
너무 주관적인가 싶어 한소래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원들을 관찰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어서 별 이야기를 다 적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이우비는 옷장에 기대어 선 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날 여기 묶어놓고 싶으면 재밌게 해봐.”
“그럴 생각 없어. 어차피 넌 못 나갈 테니까.”
시아랑이 다시 책을 펼쳤다. 몹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하지만 이우비도 지지 않고 여유롭게 웃었다.
“만날 여자가 없다고 날 질투하는 거야? 남자의 질투는 볼썽사나운데.”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안 만나는 거다.”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나는 밥이나 하러 갈란다.”
조원들 뒤치다꺼리에 지친 혜달이 모녀 싸움에 끼고 싶지 않은 아빠처럼 조용히 기숙사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이우비와 시아랑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
시아랑을 빤히 보던 이우비가 픽 웃으며 물러났다.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시아랑이 훅 콧바람을 뿜으며 다시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채소한은 한소래담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 열심히 썼다 지웠다 하고 있는 한소래담의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채소한과 한소래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제에 제일 회의적이었던 두 명이 이 과제를 제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한소래담은 등 뒤에서 서성이는 채소한의 인기척을 느끼고 머리를 살짝 옆으로 비켜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채소한이 한소래담의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우와. 그새 많이 썼네! 어, 우리 중에 눕자마자 잠드는 사람이 있어?”
“.......”
그거 너야.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채소한은 아예 제 몫의 의자를 끌고 와 한소래담의 옆에 놓고 앉았다. A4용지 하나를 보기 위해 두 명이 몸을 기울이자 그들의 머리카락이 살짝 스쳤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훑어 내리던 채소한이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우와, 너도 개그 프로 좋아해? 나도 엄청 좋아하는데!”
“진짜?”
채소한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래담은 없던 동생이 생긴 기분에 미소 지었다. 마청과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편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신이 난 채소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답하는 한소래담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도 즐거움이 배어나왔다.
“.......”
이우비는 더 이상 시아랑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아랑이 이우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 한소래담과 채소한이 있었다. 시아랑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빤히 알 법도 한데, 이우비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아랑이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이우비는 책상 앞의 의자를 아예 그들을 향해 놓고 앉았다. 마음을 먹고 자세히 뜯어보려는 모양새였다.
‘이제야 과제를 할 마음이 든 건가?’
시아랑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채소한과 한소래담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무슨 대화를 한 건지 그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채소한이 기세등등하게 문고리를 잡자마자 이우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몰래 나가려던 딸을 발견한 엄마 같은 말이었다. 시아랑도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선 채소한과 한소래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몰리자 한소래담은 저가 못 할 짓이라도 저지른 기분이었다. 어깨를 움츠러뜨린 그녀 대신 채소한이 대답했다.
“티비 보러 가는데?”
“그럼 나도.”
이우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시아랑도 책을 덮고 일어났다. 한소래담이 재차 물었다.
“너희도 가게?”
“당연하지. 나도 과제는 해야 하잖아?”
이우비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채소한은 그럼 그러라는 대답을 하고 문을 열었다. 바로 눈앞에 화려한 꽃바구니가 들이밀어졌다.
“엥?”
“어디 가?”
꽃바구니를 든 혜달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채소한이 물었다.
“꽃을 요리한 거야?”
“에이, 무슨 농담을.”
뜬구름 잡는 말은 웃어넘기는 게 답이다. 현명한 혜달이 하하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한소래담에게 내밀었다.
“...응?”
“너한테 택배 왔더라. 조리실 들른 김에 한번 확인했어.”
‘택배? 택배가 올 일이 없는데.’
한소래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달이 농담처럼 흥얼거렸다.
“한솔이는 인기 많아서 좋겠네~”
한소래담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보관소는 언제나 팬들이 보낸 선물들로 한가득 차있었지만 대부분은 시아랑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혜달과 이우비의 것이었다. 드문드문 채소한의 것도 있었지만 한소래담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한테 장미꽃 선물이라니.’
한소래담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혜달에게서 꽃바구니를 건네받았다.
“안 시들고 잘 왔네! 어울린다, 어울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채소한이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러게, 보통은 과자나 책이나 옷이나, 뭐 그런 건데...”
두서없이 말하던 혜달이 입을 다물었다. 큼지막한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한소래담의 모습이 생각보다 위화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우비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장미를 쳐다보았다.
“흐응. 남자한테 장미라니 별 일이네.”
“그러게. 난 장미보다는 과자가 더 좋은데.”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채소한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내 건 없었어? 과자 같은 거!”
“자잘한 게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같이 가볼래?”
채소한과 혜달의 대화가 한창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한소래담은 장미 바구니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 내내 인터뷰도 하지 않고 카메라도 피해 다녔다. 팬은커녕 한소래담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보낸 걸까.’
한소래담은 장미꽃처럼 새빨개진 귀를 꽃 사이에 숨겼다. 짙은 장미향이 훅 끼쳐왔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었다.
“...어?”
그녀가 살짝 고개를 뗐다. 장미꽃 사이로 분홍색 종이가 보였다.
“이건...”
한소래담은 꽃들을 헤치고 투명한 비닐에 싸인 카드를 집어 꺼냈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뜯고 편지를 편다. 아기자기한 종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하고 정갈한 글씨 몇 줄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 고개를 배꼼 들이민 채소한이 글씨를 낭독했다.
“보름달 같은 얼굴, 광장만한 눈동자, 오후의 햇살처럼 당신은 빛납니다? 이거 팬레터 맞아? 네 얼굴 살쪘다는 얘기 아니야?”
한소래담은 편지를 곱게 접어 장미꽃 사이에 다시 넣었다. 책상에 바구니를 올려놓는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리고 만다.
‘하늘이 도우시는구나.’
“살찌긴. 하나도 안 쪘는데. 오히려 너무 말라서 큰일이야. 많이 좀 먹어.”
혜달이 엄마 같은 잔소리로 말을 맺었다. 채소한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손을 뻗었다.
“그런 의미에서 빨리 밥 먹으러 가자!”
한창 찌개를 끓이던 도중이었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혜달이 앞서 갔다. 한소래담은 물끄러미 채소한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채소한은 강아지처럼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옆에서 이우비가 눈을 반짝이는 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