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숙사에 통금이 걸린 시간이었지만 실습장은 24시간 항시 개방이었다. 자율 학습을 하려는 학생을 위한 배려였다.
‘당연히 나랑은 상관없는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우선 주문부터 걸어 봐.”
여성복을 차려 입은 시아랑이 한소래담을 보며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머뭇거리는 한소래담을 대신하듯 채소한이 냉큼 “넵!” 대답하고 나섰다.
“바라아아아암...”
“그...”
“틀렸어.”
혜달이 끼어들어 채소한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시아랑의 목소리가 허공에 떴다.
“아우, 뭐가 틀렸다는 거야. 난 오늘도 이렇게 했었다구!”
“그래서 죽을 뻔한 거잖아.”
혜달이 채소한을 타박하고 한손을 들어 시범을 보였다.
“주문화에서 중요한 건 이미지야. 배웠잖아? 그러니까 우리 같은 초보는 단어보다 문장이나 수식어를 써야 한다고. 예를 들면,”
혜달이 신중하게 선창했다.
“여러분 우리는 햇볕을 봐야...”
“그...”
“그것도 틀렸어.”
시아랑의 말이 또다시 끊겼다. 이번에 그의 말을 끊은 것은 이우비였다. 이우비는 혜달의 눈앞에 서서 보란 듯이 쯧쯧 혀를 찼다.
“여우볕 주문이지? 삼행시로 만들어서 억지로 늘린다고 될 리가 없잖아.”
이우비의 말에 한소래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릴 뻔했다. 이런 주문으로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니, 이걸 천재적이라고 해야 할지 천재적인 운빨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우비가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모았다.
‘시범을 보여주려는 건가.’
시아랑이 이우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전에 언급했듯 시아랑은 조원들 중에서 이우비를 그나마 믿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우비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꽃보라가 휘날리는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꽃 소리는 여우볕처럼 사그라진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우비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듯 식은땀을 털어냈다.
“휴.”
“아얏.”
이번에야말로 시아랑이 이우비의 뒤통수를 때렸다.
“꽃보라는 시력, 바람꽃은 힘, 여우볕은 민첩. 전혀 다른 주문 세 개를 합친다고 세 가지가 동시에 발휘될 리가 없지. 우리가 1학년이라는 걸 잊지 마. 자기 분수를 아는 건 중요해, 이우비.”
“다정하게 이름까지 불러주다니 감동적이네.”
이우비가 간단히 웃어 넘겼다. 미묘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서 한소래담만 감탄하고 있었다. 융합이 덜 돼서 그렇지 주문화는 완벽했다.
‘만일 이우비가 조금만 더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그럼 한소래담 너도.”
“...아.”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소래담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 손을 들었다. 네 명의 시선이 몰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열었다.
“불... 바람.”
“......”
다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교과서에서도 본 적 없는 주문이었다. 시아랑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대체 그런 주문은 어디서 듣...”
한소래담이 손을 뻗자 시아랑이 훅 뒤로 밀렸다.
“우와아!”
채소한이 눈을 땡그랗게 떴다. 시아랑 역시 놀란 눈으로 한소래담의 손에 밀린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문장화도 되지 않은 주문에 밀려버리다니.’
만일 제대로 문장화 된 주문이었다면...
“그거 선생님이 썼던 거지?”
혜달이 말을 걸었다. 시아랑이 고개를 들자 한소래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엄마가 쓰던 수첩에서도. 봤었어.”
“오, 그런 게 있었어? 다른 것도 있어?”
이우비가 물었다. 한소래담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단어’로 밀어붙인다면 강도도 그리 세지 않을 테고, 어설프게 숨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그녀는 주문화 없이 단어만 몇 마디 더 중얼거렸다.
“고래춤. 구름옷. 날래미. 달안개. 꽃...”
꽃담.
그 단어를 꺼내려다가 그녀는 멈췄다. 다행히 이미 앞선 단어가 네 개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경은 분산되어 있었다. 한소래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평소 독서를 좋아하던 시아랑이 하나하나 단어를 꼽아보았다.
“달안개는 당연히 시력 관련이겠고, 고래춤이랑 불바람은 힘이겠군. 구름옷이랑 날래미는 민첩?”
‘이 단어를 다 알 줄은 몰랐는데.’
한소래담이 놀라움을 숨기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랑은 눈을 감고 단어들을 되새겼다.
“휘날리던 꽃보라가 달안개에 휩쓸린다. 희미하게 가려 보이지 않는다.”
“우와아아!”
채소한이 다시 한 번 크게 탄성을 내질렀다. 시아랑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번만큼은 한소래담도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방금 한 단어를 알려줬을 뿐인데 시아랑은 그것을 똑같은 분류로 융합시켜 완전히 주문화 하고 있었다.
‘채소한이 하도 아슬아슬하게 싸워서 시아랑은 제대로 못 보고 있었는데...’
“쓸 만하군.”
“그, 그래.”
시아랑이 한소래담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버렸다. 이런 활용이야 한소래담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시아랑은 주문을 배운지 이제 2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2주 만에 이 정도라면 천재라는 수식어도 아깝지 않을지 모른다.
한소래담이 얼마나 놀라고 있던 관계없이 시아랑은 눈앞으로 흘러내린 가발의 긴 생머리를 도로 쓸어 올렸다.
“보아하니 네 실력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 같진 않아.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배짱이야, 배짱!”
“그럼 역시 직접 출동하면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겠네?”
시아랑의 말을 끊고 채소한과 이우비가 차례로 끼어들었다. 시아랑이 고개를 끄덕인 것과 동시에 한소래담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려고 한 짓이 그녀를 더욱 위기로 몰아넣어버렸다. 사정을 알 리 없는 혜달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
한소래담이 비명을 삼켰다. 채소한이 갑자기 한소래담의 뒷무릎에 손을 넣고 그녀를 안아 올린 것이다.
“혜달!”
“오케이!”
혜달이 자신에게 던져진 한소래담을 낚아채 어깨에 매달았다.
“바람꽃!”
채소한이 주문이 걸린 팔을 휘둘렀다. 주먹은 흑도종의 머리에 정확히 맞았다. 깡! 하는 소리가 났지만 흑도종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은 비늘이 돋은 꼬리를 채소한에게 휘두른다. 채소한이 뒤로 뛰어 피했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또 온다!”
혜달이 허공을 보며 외쳤다. 그곳에 새로운 통로가 생겨나고 있었다. 채소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도마뱀 모양의 흑도종이 채소한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이그 혀를 내두른 혜달이 한소래담을 내려놓고 채소한 곁으로 뛰어갔다. 혜달이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냇물을 흩뜨리는 불바람.”
채소한은 흑도종의 꼬리에 몸통을 얻어맞았지만 혜달의 주문 덕분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나온다!”
모두가 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새롭게 등장한 흑도종은 검은색 철갑옷을 입은 중세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착지하자 지척이 크게 진동했다.
“중세 기사라니. 이왕이면 공주님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우비가 연극배우처럼 비통해했다. 시아랑이 쯧 혀를 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차이나 드레스가 펄럭인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졌다. 채소한이 투덜거렸다.
“이건 불공평 해! 왜 우리는 도마뱀이고 저쪽은 기사인 거야? 쟤네가 훨씬 멋있어 보이잖아!”
“채소한, 조심해!”
도마뱀이 채소한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바닥을 기어갔다. 한소래담이 입술을 달싹였다.
“꽃담.”
“이크!”
그녀의 주문 덕에 도마뱀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혜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채소한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채소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혜달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다시 플래시가 터졌다.
‘속바지 입고 와서 다행이다...’
혜달이 슬픈 위안을 했다.
“더 몰려오기 전에 빨리빨리 끝내.”
시아랑은 그 와중에도 시크했다.
“불처럼 뜨거운 바람을.”
시아랑의 주먹이 흑도종 기사의 방패와 충돌했다. 까앙 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 두 번째 기사의 검이 휘둘러졌다. 여유 없이 주변 상황을 살피던 한소래담이 다시 중얼거렸다.
“꽃이 피어오른 담벼락을 그에게.”
시아랑이 다시 뒤를 돌며 발차기를 했다. 한소래담이 나머지 흑도종에게도 꽃담 주문을 걸어 움직임을 묶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흑도종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한 번에 한 마리씩이 한계인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한소래담은 입이 하나였으니까.
그때 이우비가 갑자기 한소래담의 머리를 눌렀다.
콰앙!
방금까지 한소래담의 머리가 있던 곳에 커다란 돌덩이가 날아와 박혔다. 한소래담은 사색이 됐고, 그녀를 다소 거칠게 구해준 이우비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불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바람꽃이~”
“이우비, 얼른 안 와?!”
힘에 부친 시아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이우비는 “네에네에.” 하고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혜달과 채소한은 때려도 때려도 끄떡없는 도마뱀을, 시아랑과 이우비는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한소래담도 셋이나 되는 흑도종을 묶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아랑!”
한소래담이 외치자 시아랑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기사의 검이 시아랑의 정수리를 베고 지나갔다. 시아랑의 가발이 벗겨졌다. 한소래담이 주문을 외웠다.
“그 꽃이 담벼락을 뒤덮는다.”
순간적으로 주문반경이 확대됐다. 한소래담의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주 잠깐. 잠깐만 붙들고 있으면 돼. 한 마리만 줄어도 훨씬 수월해질 거야.’
주문의 반경이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번졌다. 도마뱀과 기사 한 마리가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에게는 닿지 않았다.
쾅!
채소한과 혜달이 도마뱀의 목을 잘라버린 것과 동시에 꽃담 주문에 걸리지 않은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시아랑!”
한소래담의 비명과 함께 시아랑과 이우비가 동시에 뒤로 뛰었다. 검이 그 둘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시아랑의 옷이 크게 베여 가슴패드가 덜렁거렸다.
‘다행이다.’
한소래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아랑이 숨을 고르며 뒤로 물러나 덜렁거리는 가슴패드를 빼서 바닥에 버렸다. 이우비는 어두운 아우라를 내뿜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것들이...”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들끓는,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이우비는 아주 조금 잘려 나간 자신의 옷자락을 내려다보고 섬뜩하게 웃었다.
“예쁜 건 알아가지고...”
이우비의 표정을 본 한소래담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우비가 자신의 귓불에서 반짝거리는 피어싱을 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변환.”
“헉.”
심지어 하나 더 뺐다.
“변환.”
피어싱은 기다란 채찍으로 변했다. 도마뱀 흑도종의 사체를 처리하던 혜달이 양손에 채찍을 든 이우비를 보고 빼액 소리 질렀다.
“이우비, 그건 아직 사용 금지잖아!”
“알 게 뭐야.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변환.”
이우비의 바로 옆에서 시아랑이 주문을 외웠다. 팔목에 찬 가죽끈 팔찌가 언월도로 변했다. 혜달이 또다시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시아랑 너까지!”
“생존이 우선이야.”
“그거 쓰면 감점이란 말이야!”
잔소리하는 와중에도 사체를 처리하는 혜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김장을 담그는 엄마 같은 모양새였다. 한소래담은 한숨을 푹 쉬고 혜달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우비랑 시아랑이 무기까지 쓰면 흑도종 둘은 금방 해치우겠지.’
“우리는 구경이나 하자.”
채소한도 한소래담의 곁에 앉았다. 그새 사체 처리를 마친 혜달은 허무한 눈으로 이우비와 시아랑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받을 감점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고래춤 추는 바다, 불처럼 거센 바람이 분다.”
이우비가 주문을 외우며 채찍으로 기사 흑도종의 목을 휘감았다. 기사는 칼과 방패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이우비가 주문이 걸린 채찍을 당기자 빠지직 소리와 함께 흑도종의 목이 통째로 떨어져나갔다.
“우와.”
한소래담은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잘도 듣고 이우비가 우아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이제 하나 남았어!”
채소한이 액션 영화를 보듯 흥을 돋웠다.
시아랑은 하나 남은 기사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우비도 그를 돕기 위해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기사가 방패를 휘둘러 채찍을 쳐내고 이우비를 향해 돌진했다. 이우비는 양손에 채찍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리 공격에는 취약했다. 한소래담이 외쳤다.
“시아랑, 주문!”
“불바람!”
시아랑이 발을 크게 내딛으며 흑도종의 뒤통수에 언월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투구를 베기는커녕 날카로운 쇳소리만 났다.
“칫.”
시아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발도 없고 가슴패드도 없는 차림으로는 주문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날래미!”
언제나 허세 넘치는 주문을 사용하던 이우비가 짧은 단어를 외쳤다. 이우비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려했지만 기사는 순식간에 채찍을 쓸 수 없는 거리까지 좁혀 들어갔다.
“이우비!”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시아랑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채소한의 발차기가 튀어나갔다. 등허리에 공격을 맞은 흑도종이 이우비를 깔고 넘어졌다.
“꽃담.”
“칼날은 벼랑을 가른다.”
한소래담의 주문과 동시에 시아랑의 언월도가 흑도종의 뒷목에 꽂혔다. 채소한이 언월도의 봉을 잡고 내리 눌렀다. 언월도가 시멘트 바닥까지 파고들었다. 흑도종의 투구가 땅바닥에 부딪히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이우비!”
흑도종이 쓰러지자마자 한소래담이 제일 먼저 달려갔다. 채소한이 이우비를 일으키고 있었다.
“괜찮아? 이우비, 너... 야!”
일으킨 보람도 없이 이우비가 맥없이 땅으로 쓰러졌다. 한소래담이 얼른 그를 받쳤다. 이우비의 두 팔이 축 늘어진 채였다.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