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흑도종의 움직임이 멈춘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선생님이 스핑크스의 발밑에 깔리기 직전이던 채소한을 끌어당겼다. 스핑크스의 발은 쿵,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맨 땅을 밟았고 곧바로 시아랑이 그 발을 부쉈다. 지탱할 힘을 잃은 스핑크스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한소래담이 다시 중얼거렸다.
“꽃잎 위 드넓은 담벼락을.”
노랫가락 같은 소리였다. 시아랑 위를 덮칠 뻔하던 스핑크스의 몸이 또 허공에서 잠시 묶였다. 혜달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여러분 우리는 햇볕을 봐야합니다!”
혜달의 주문이 채소한에게 걸렸다. 이우비가 채소한을 번쩍 들어올렸다.
“보랏빛 바람꽃이 선명해진다.”
“칼국수는 벼랑 끝에서!”
채소한이 주문을 외우며 슈퍼맨처럼 한 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눈을 번뜩인 이우비가 채소한을 집어던졌다. 채소한은 스핑크스의 가슴팍에 있는 아주 작은 흠집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채소한의 주먹이 그 흠집에 파고들었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채소한은 스핑크스의 몸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왔다. 스핑크스의 몸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채소한은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 무사히 착지했다. 이번에는 시아랑이 땅을 차고 부드럽게 뛰어올랐다.
“가을볕에 뛰노는 여우처럼.”
가벼운 도약이었지만 그는 순식간에 개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미친 듯이 날뛰는 개의 머리 위에서 시아랑은 몸을 낮추고 개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칼바람이 부는 벼랑에!”
시아랑이 주문을 외우며 순식간에 머리통을 꺾었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개의 목이 괴상하게 돌아갔다. 부러진 목뼈가 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시아랑은 튀어나온 목뼈의 일부분을 부러뜨려 손에 쥐었다. 한소래담이 다시 주문을 외웠다.
“꽃잎 위 드넓은 담벼락을.”
막 몸을 털어내려 하던 개가 멈췄다. 그 사이에 시아랑이 개의 목뼈를 야구배트처럼 쥐고 개의 다른 머리통에 휘둘렀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꾸워어어어어!”
개가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개가 축 늘어진 두 개의 머리를 덜렁거리며 미친 듯이 달렸다. 개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시아랑은 잽싸게 바닥을 굴러 피했지만 문제는 한소래담이었다. 개가 돌진하는 방향에 서 있었지만 한소래담은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한소래담은 멍하니 서서 자신의 코앞까지 오는 개를 쳐다만 보았다. 개의 이빨 사이로 축 늘어진 혀가 달랑거렸다. 금방이라도 거대한 발에 짓이겨질 것 같았다. 그렇게 자주 쓰던 마법 주문도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개가 한소래담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한소래담이 정신을 차렸다.
“꽃잎이 흩날리는...”
“여러분 우리는 햇볕을 봐야합니다!”
혜달이 한소래담의 허리를 감싸고 뛰어올랐다. 까드득. 간발의 차이로 개의 주둥이가 닫혔다.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한소래담의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혜달이 한소래담을 땅에 내려주고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하며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채소한이 나머지 머리 하나를 처리했다. 선생님도 나머지 스핑크스 한 마리를 해치웠다.
“...이게 무슨 일이야?”
바로 등 뒤에서 얼떨떨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소래담이 뒤를 돌아보았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 분홍색 스키니진을 입은 남정네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1학년 맞지?”
***
비상사태다, 우리 선생님 좀 살려 달라, 학교에 흑도종이 나타났다.
1학년 꼬맹이들이 그렇게 울고불고 사정하기에 놀라서 날아왔건만 선배인 그들이 도착해보니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끝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노란 스키니가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저었다. 시체를 보아하니 상급 흑도종이었다.
‘처리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을 텐데.’
“후.”
현역 시절과 선생 시절을 포함 도합 15년간 했던 전투 중 가장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전투를 끝낸 마청과의 담임선생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허리를 폈다. 짧게 자른 머리가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약 2년 만에 보는, 이제는 3학년이 된 제자들과 뒤늦게 도착한 동료 선생들에게 인사나 원망 섞일 인사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분노를 담아 흑도종의 사체를 발로 퍽 찼다. 감정 섞인 발길질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녀는 몇 번 더 시체를 걷어차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처리하세요.”
“이게 뭐예요?”
빨간 스키니를 입은 남자가 스키니 군단들 사이를 비집고 나섰다. 뒤늦게 도착한 뒤처리 반은 할 일이 태산이라 부산스러웠지만 전투반인 그들은 할 것이 없었다. 마청과의 담임선생님이 빨간 스키니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사제 사이였지만 학생은 먼저 예를 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거 쟤네가 한 거죠? 1학년이? 하하, 대단한데?”
빨간 스키니가 아직 멀뚱히 서 있는 A조원들을 기특하다는 듯, 놀랍다는 듯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몰골들이 말이 아닌 걸로 봐서는 분명 전투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게다가 훤칠한 미모까지 갖고 있었다. 옷이 찢어지거나 까매지거나 가발이 제멋대로 엉켜 객관적으로 보면 흉한 차림이긴 했지만, 여장 생활 3년 차인 그는 시각적 테러를 불러일으키는 흉한 차림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줄 아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아직 수업중이야. 이제 마무리됐으니 돌아가.”
지칠 대로 지친 담임선생님이 험악한 눈초리로 전 제자들을 물렸다. 하지만 빨간 스키니 옆으로 분홍색 스키니까지 나서서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에에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선생님 반이면 얘네 1학년이죠? 이 정도면 실전 투입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이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들은 분명 성적도 괜찮고 실전에서는 날아다니고 나름대로 인기도 꽤 있는 마법소년들이었는데, 너무 바빠서 허리가 시큰거린다며 틈만 나면 1학년이든 졸업생이든 아무나 데려와서 인원 충원 좀 해달라고 징징거렸다.
빨간 스키니가 담임선생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알랑방귀를 뽕뽕 뀌어댔다.
“무울론! 저도 1학년을 겪은 2학년을 보낸 3학년이고, 올챙이 시절 기억하는 개구리이니 만큼 햇병아리인 이 녀석들을 바로 사지로 몰아넣자는 말은 안 합니다. 하지만 의견을 물어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쉬운 곳이나 보조나, 가까운 곳에만 보낼 수도 있고. 안 그래요?”
‘지금 이 선배가 제정신인가.’
한소래담은 빨간 스키니진을 입은 선배가 하는 말을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막 입학해서 아직 마법 수업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1학년 학생들을 실전에 투입하겠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죽고 싶으면 자기나 죽지, 왜 멀쩡한 1학년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스키니 군단 말고도 제정신이 아닌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나 할래!”
한소래담이 설마설마 하며 고개를 돌렸다. 채소한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바보 같은 소리.”
선생님과 시아랑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혜달이 두 사람의 완벽한 하모니에 뜬금없이 탄성을 내뱉었다가 핫,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혜달은 차분하게 채소한의 등을 다독이며 달랬다.
“그러기에는 아직 우리가 배운 것도 없고 아직 경험도 많이 부족하잖아. 충분히 준비도 하고 연습도 하고, 그 뒤에 실전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어?”
한소래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달을 열심히 응원했다. 하지만 곧바로 방해꾼이 나타났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
노랑 스키니진이 끼어들었다. 분홍, 검정, 파랑 스키니진들도 한 마디씩 했다.
“마법이야 어차피 배울 거 선생님한테 조금 일찍 배우면 되고.”
“실전 경험이야, 일단 우리 뒤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워도 좋고.”
“굳이 학교에서 연습하지 않아도 실기 성적은 거의 만점 받을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이라면.”
‘성적 만점?’
그 단어에 혜달의 동공이 흔들렸다. 빨강 스키니진이 아, 하고 갑자기 기억난 것처럼 말했다.
“지원금도 들어올 거야.”
“...정말요?”
‘지원금’이라는 말에 혜달이 말꼬리를 올렸다. 한소래담의 심장이 다시 졸아들었다.
이우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고 시아랑은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을 보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때 손을 번쩍 든 채소한이 시아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원금으로 맛있는 거 먹을래!”
“저런 허무맹랑한 말이...”
시아랑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허무맹랑하다니. 일리 있는데. 그렇지, 담아?”
이우비가 시아랑의 말을 끊고 한소래담 옆에 섰다. ‘담이’라는 호칭 때문에 한소래담은 이우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아버지인 한윤을 생각나게 하는 말투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한소래담이 말을 잃은 사이 시아랑은 채소한에게 완전히 눌려버렸다. 채소한이 “A조, A조.” 라고 중얼거리며 시아랑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A조의 이름을 A조라고 정한 시아랑의 만행을 아직 채소한은 기억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혜달은 성적과 지원금 때문에 혹해서 스키니 군단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한지 오래였고 이우비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보니 반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이제 반론을 할 만한 사람은 한소래담 뿐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뗐다.
“실전 투입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 이우비가 그녀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담임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얘도 찬성이래요!”
“진짜 하겠다고?”
담임선생님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타이밍을 잃어 한소래담은 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생님은 영 탐탁찮은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 역시 선생님도 반대시구나.’
한소래담은 말을 삼키고 조용히 담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애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건 인력 낭비라니까요?”
이번에는 파란 스키니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제자들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자 다른 선생님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선생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다른 선생님들이라면 말려줄 거란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실습 선생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가르치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사실 요즘 인력이 부족해서...”
“.......”
담임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소래담은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채소한이 “네! 네!” 하고 호들갑을 떨며 벌새처럼 손을 파닥거렸다. 스키니 5인조가 마청과 담임선생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결국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 정도라면 시킬 수 있겠지...”
“당연하죠!”
이우비가 한소래담의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소래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