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_마청과 A조_합작_160824
10.
한소래담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창문 밖은 아직도 남색이었다.
‘아침이 오려면 멀었구나.’
그녀는 몸을 뒤척여 천창을 향해 누웠다. 하지만 곧바로 잠이 들지는 않았다. 한소래담은 천천히, 천장에 새겨진 꽃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렸다.
‘무슨 꽃일까?’
한소래담은 꽃의 이름 같은 건 잘 알지 못했다. 벽지가 꽃무늬라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림 속의 꽃은 화사하게 피어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한소래담의 기분은 끝없이 가라앉았다.
‘언제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한소래담은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영웅, 초능력자, 마법사, 스타, 혹은 고위공무원. 세상 사람들에게 마법소녀의 권위는 그런 것이었다. 마법소녀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 따위를 보며 마법소녀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은 많았지만 한소래담은 예외였다. 그녀는 마법소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빠인 한윤에게 마법소녀가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지에 대해 들어 왔다. 마법소녀였던 한소래담의 엄마가 세상을 떴던 것도 흑도종 때문이었다.
한소래담에게 주목 받는 것은 벌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매일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마법소녀 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즐겁게 웃을 수 있고 편하게 자는 것만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한소래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이불 안이 그녀의 눈물 때문에 조금 축축해졌다.
***
한소래담은 전날 밤 벌어진 다사다난한 일들이 무색하게도 평범하게 눈을 떴다. 혹시 눈을 뜨면 이미 감옥에라도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시아랑도.
한소래담은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가슴에는 붕대를 매고 그 위에 반팔을 입고 아예 교복 셔츠까지 화장실 안에서 다 챙겨 입었다. 짧은 머리는 따로 드라이기를 쓰지 않아도 금방 마르니 그것만은 편한 일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자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가 들렸다. 혜달과 시아랑이 일어나 있었다. 멍한 표정의 시아랑을 볼 수 있는 건 이때뿐이었다.
이불을 떨치고 일어난 시아랑은 비몽사몽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를 보고 있던 한소래담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시아랑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혜달이 하품을 하며 이불을 개켰다. 채소한이 갑자기 몸을 뒤척거렸다. 혜달은 혹시 채소한이 알아서 눈을 뜨려는 건 아닐까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물론 헛된 기대였다. 다시 곤히 잠든 채소한을 보며 혜달이 시무룩해졌다.
한소래담은 짐짓 태연한척 아침밥을 먹고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 조회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한소래담은 책상에 펴 놓은 책을 보지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 어쩌면 이 교실에 앉아있는 것조차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녀는 시아랑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있고 수업시간에는 짐만 된 데다 어제는 탈출하려던 것까지 정통으로 걸렸다. 이쯤 되면 대놓고 ‘너 수상해’ 하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곧 경찰이나 군인이 들이닥칠지도 몰라.’
한소래담은 앞문과 뒷문을 번갈아 보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건넸던 말들이 있었지만 막상 수업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좋은 아침.”
조회종이 치자마자 창문에서 선생님의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한소래담은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담임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 밑을 지다가다가 종이 치는 소리를 듣고 바로 뛰어 올라온 것이다. 그녀는 한소래담을 쿨하게 지나 교탁 앞에 섰다. 귀찮음이 묻어나오는 손놀림으로 출석부를 휙휙 넘긴다.
“안 온 놈 없지? 드러워 죽겠으니까 청소 좀 하고 환기도 좀 하고. 아무튼 사내놈들밖에 없다고 신경을 안 쓰는구만.”
선생님이 잔소리만 하고 나가버리자 그제야 한소래담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시아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아랑과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긴장한 것이 무색해져서 한소래담은 눈을 내리깔았다.
‘뭐지? 왜 얘기하지 않은 거지?’
한소래담은 어색한 기분으로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시야가 허예졌다. 한소래담이 깜짝 놀라 의자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숨 들이키는 소리가 묻혔다.
“이... 이우비?”
“왜 그렇게 놀라? 너 요즘 좀 이상하다. 어디 아파?”
그녀의 시야를 채운 것은 이우비의 매끈한 피부였다. 그는 한소래담의 이마에 손을 대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얼굴이 너무 가깝다.
이우비와의 거리에 부담을 느낀 한소래담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옆으로 비켜서려는 생각으로 몸을 돌렸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어느새 가까이 와 있던 채소한에게 부딪혀버린 것이다. 한소래담이 넘어질 듯이 휘청하자 채소한이 단단한 손으로 한소래담의 어깨를 붙들었다.
“감기야?”
채소한의 손이 한소래담의 앞머리를 헤치고 이마에 올라왔다. 그녀의 이마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손바닥이었다. 한소래담은 이우비와 채소한 사이에 껴서 몸을 비틀지도 못하고 굳은 채 섰다. 채소한은 자기 이마에도 손을 올려 온도를 비교해보고 진중한 표정으로 판단을 내렸다.
“음. 고기를 배터지게 먹으면 깨끗하게 낫겠어.”
근처에 앉아 있던 혜달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너 완전 돌팔이다. 면허증은 있냐?”
“고기야말로 만병통치약이지.”
다들 웃고 장난치는 와중에도 한소래담의 시선은 시아랑에게 닿아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소래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아랑은 혼자 도서관에라도 온 것처럼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아니 그것보다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한소래담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귓가에 훅 입바람이 들어왔다.
“왜에? 네 감기의 원인이 쟤야?”
한소래담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제 귀를 감쌌다. 이우비가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라 대답하기 난감해진 한소래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수업종이 쳤다.
흑도종의 이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자 학생들은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거두절미하고 비장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다들 어제 잠은 잘 잤겠지? 컨디션이 좋아야 할 거야. 지난 시간에 말했다시피 오늘은 흑도종의 사체에 대한 처리와 관리를 배울 테니까. 다들 이게 얼마나 중요하고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지?”
“넵!”
채소한이 초등학생마냥 착한 대답을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선생님은 잘 들어두라며 여러 번 신신당부를 했다.
흑도종의 사체는 또 다른 흑도종을 불러온다. 흑도종을 아무리 죽여 봐야 사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흑도종 한 마리 잡으려다가 다섯 마리도 넘는 흑도종에게 둘러싸여 죽는 마법소년이 발견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학생들은 이미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 배울 부분은 여타 이론 수업과는 달리 실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일 지식 중 하나인 것이다.
“일단 조별로 앉아볼까?”
선생님의 말에 혜달이 시아랑을 돌아보았다. 시아랑은 뻔뻔하게 혜달을 마주보았다. 어쩔 수 없이 혜달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우리가 저쪽으로 가자.”
시아랑 한 명을 위해 네 명이 책상을 끌고 갔다. 이우비는 살짝 불쾌한 눈치였지만 혜달은 모른 척했다. 지금은 기 싸움하기 좋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선생님이 조별로 동그란 나무상자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채소한이 선생님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뚜껑을 열었다. 작은 유리병 다섯 개가 정리되어 있었다.
“자, 열어봐. 이게 바로 흑도종의 사체를 보관한 병이야. 일차적인 처리는 됐지만 아직 마무리는 안 됐어. 그게 너희들 수행평가니까 조심히들 다뤄.”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혜달이 병 하나를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안에 검은색 조각이 들어있었는데 지난번에 홀로그램으로 봤던 것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특히 크기가.
‘아마 처리가 돼서 그런 거겠지.’
“깨뜨리기라도 하면 최소 재수강이니까 그런 줄 알고. 너희 선배들 중 하나는 그거 잃어버렸다가 유급했어.”
경고가 계속됐지만 채소한과 시아랑, 이우비도 다 병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한소래담도 호기심에 이기지 못하고 남은 병을 꺼냈다.
코르크 마개로 닫힌 병은 아기자기한 크기였다. 주둥이에는 리본처럼 식별표가 달려 있었고, 병 안에 들어있는 알갱이는 돌멩이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했다.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문방구 같은 데서 흔히 파는 병에 예쁜 돌을 집어넣은 것으로만 보였다.
“병은 일주일에 한 번씩 관리해주면 되는데, 그 병들 중에서 보면 뚜껑에 하얀 칠이 된 게 있을 거야. 그건 매일 관리해줘야 해. 알겠니?”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시아랑이 탁 소리 나게 병을 내려놓았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이 흰 칠이 되어 있는 병이었다.
한소래담이 시아랑을 쳐다보았다. 시아랑도 한소래담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찔리는 것이 있던 한소래담은 자기가 들고 있던 병을 내밀었다.
“...내가.”
“.......”
귀찮은 걸 대신해준다는데 시아랑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제 영문 모를 포복산책 건도 있었고, 여장한 모습을 동창에게 까발린 것도 한소래담의 짓이었으니.
시아랑이 말없이 한소래담의 병을 제 손에 가져왔다. 지켜보던 혜달도 시아랑을 제지하지 않았다.
‘시아랑은 아직 한소래담이 탐탁지 않은 것 같으니까, 어쩌면 이게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이 가실 기회일지도 몰라.’
정말 일이 혜달의 생각대로만 진행된다면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하게 되는 셈이었다.
“내 거는 꼭 콩자반같이 생겼다! 먹어도 되나?”
“오,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밥 준비해줄까?”
‘하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채소한과 이우비가 아닐까.’
혜달이 애써 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