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2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친 그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다시 찾는 베를린 여행에 한창 마음이 들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웠다. 학기 수업 때문에 미루어 놓았던 여행 준비에 몸과 마음 모두 정신이 없었다. 이번 여행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정리할 것도 많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내년에는 수업을 다른 교수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고 학교 측에 통보를 해 놓은 상태였다. 정년이 한 해 남은 상태라 꼭 수업을 맡을 필요는 없었지만, 학교 측의 간곡한 요청에 고민하다가 결심을 내렸다.
출국하기 전에 두 아들, 손주들과 식사를 함께 할 일정도 잡았다. 온 식구들이 모이는 것은 지난 추석 이후 4개월만이었다. 대학 병원에서 교수로 있다가 지난해 병원을 개업한 큰 아들 내외는 자리를 잡느냐 정신없이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해외 호텔에 자리를 잡은 둘째 아들도 국내에 머물 때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아버지가 장기간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저녁 모임이 이루어졌다. 손주들도 할아버지의 장도를 기원하기 위해 특별히 시간이 내주었다.
인천에서 오후에 출발한 비행기가 12시간을 날아 베를린 공항에 도착하였다. 벌써 베를린은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베를린에서 교수로 정착한 친구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연말까지 그 친구의 집에 머물다가 성탄절 연휴가 끝나면 장기간 머물 숙소로 옮길 예정이다. 그동안 학술 세미나 참석차 독일을 방문했을 때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 친구의 집이 낯설진 않았다. 독일인 친구 부인도 늘 반갑게 맞아 주어 감사할 뿐이다. 늦은 시간이라 게스트 룸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장시간 비행 탓인지 늦잠을 잤다. 친구의 집에서 토스트와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먹고 나섰다. 겨울철 유럽이 늘 그렇듯이 눈발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날씨가 을씨년스러웠다. 30년 전 그녀와 함께 거닐던 거리를 생각에 잠긴 채 걸었다. 맞은편에서 중년의 여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다가와 서로 포옹을 한다. 서로 손을 잡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독일 주재 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도 남아있는 여생을 그녀와 함께 보내기 위해 모교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국내에 있는 두 아들에게도 당분간 자신이 베를린에 머물 것임을 알렸다. 그 기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지난 과거를 회상한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지. 이런 게 바로 인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