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호텔에 아침을 먹고 중국 주최 측에서 준비한 필드 트립에 참가하였다. 그녀가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북한 대표단 쪽으로 눈길이 갔다. 역시 그녀는 눈에 띠질 않았다. 중국 측 안내 요원의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북경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았다. 점심에는 북경에서 맛 집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베이징 덕으로 식사를 하였다. 오후에도 그들이 준비한 일정대로 관광지를 돌면서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오후 일정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와 남한 대표단과 저녁 식사를 마치니까 오후 7시가 다 되었다. 그는 급하게 호텔의 자기 방으로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호텔을 나섰다.
그가 서둘러서 그런지 그녀를 만나기로 한 호텔에 도착하니 7시 40분이었다. 아직 20분 정도가 남았지만, 그냥 먼저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들의 눈에 잘 띠지 않은 구석으로 앉았다. 자리를 앉아 어두워진 북경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최근 며칠 동안은 꿈만 같았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동안 30년 가까이 소식을 몰라 걱정되었던 그녀가 지금 바로 그의 앞에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그녀를 베를린에서 처음 만나서 갑자기 헤어진 후로 그가 겪었던 수많은 경험과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그녀가 그가 앉아 있는 자리로 와서 아는 체를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는 줄도 모르고 있어?”
“응, 미안해! 내가 생각에 빠져 오는 줄도 몰랐네. 행사는 다 끝났어?”
“다 끝났지. 본국에서 온 출장 사람들과 대사관 직원들의 모임이었어.”
“그래도 혼자 먼저 나온 것은 아닌지?”
“미리 이야기를 해 놓아서 조금 일찍 일어났을 뿐이야.”
“필드 트립은 어땠어?”
“응, 나름 좋았어.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식사도 좋았고.”
그 때 주문을 받기 위해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우리, 식사는 미리 했으니까, 와인이라도 한 잔씩 할까?”
그러자 그녀가 살짝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가 약간 당황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무엇이 이상한가?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가?”
“아니, 우리라는 말이 좀 낯설게 들려서 말이야.”
“내가 그랬나?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야,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