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던 둘은 천천히 떨어져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살며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도 감정이 울컥하여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 앉히면서 그도 옆 자리에 앉았다. 서로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그녀가 눈물을 살짝 훔치면서 말을 건넸다.
“오빠,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그래, 어느 새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
“이렇게 오래 못 볼 줄은 생각도 못했어. 몇 년 후면 다시 볼 줄 알았지.”
그녀가 만감이 교차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면서
“갑자기 귀국한 후로 친구를 통해 계속 소식을 알아보았지만.”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듯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부모님은 어떻게?”그가 조심스럽게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지내고 있어.”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그녀의 얼굴을 살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하자면 긴 얘기라, 천천히 할게.”
그러면서 그녀는 화제를 한 교수에게 돌렸다.
“오빠는 결혼은 했지? 아이들은?”
“그렇지, 나도 귀국한 후로 5년 정도 있다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어.”
“아들들이 오빠를 많이 닮았겠네.”
“응, 나도 닮고 아이 엄마도 닮고”
“아이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중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평범하지만 착한 사람이었지.”
그녀가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챘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학교에서?”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내와는 2년 전에 사별했어. 좀 아팠었거든.”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랬구나. 오빠도 그분도 고생이 많았겠네.”
“나보다는 집사람이 고생이 많았지.”
둘 사이에 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 물었다.
“소연이도 결혼했지? 아이는?”
그녀가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되물었다.
“결혼한 것처럼 보여?”
그가 살짝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나는 결혼할 시기를 놓쳐서 그냥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어.”
그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그녀가 무슨 결심을 한 듯 입술을 한 번 앙다물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때 갑자기 귀국한 후로 우리 가족들이 참 힘들었거든. 아버지가 외교부 동료의모함으로 숙청을 당해 강제노역에 끌려 가셨어. 다시 복직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 아버지는 그때 강제노역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투병하다가 5년 후에 돌아가셨고. 그 후로 나는 새로운 지도층의 신임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만 했지. 10년쯤 지나니 나도, 집안도 조금씩 나아졌어. 지금은 이렇게”
그녀가 만감이 교차하는 듯이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다 그랬지. 나도, 오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잖아.”
“그러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세월만 흘러갔네.”
그 때 주문한 식사를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직원이 들어와 있는 동안에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그 직원이 한국어를 알아듣는지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같았다. 직원이 서빙을 마치고 룸에서 나가자, 둘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소연이도 어려운 상황에서 정말 많이 힘들었겠다.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되시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했다.
“그렇지, 같이 지내고 있는 어머니가 큰 위안과 힘이 되어 주었어. 그리고 오빠도 내게는 버텨낼 힘이 되었지.”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좀 당황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아니야, 내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오빠와의 추억과 약속을 많이 떠올렸어. 그 편지에 적은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더욱 안간 힘을 썼어. 그러다 보니오늘과 같은 날이 왔고.”
“내가 뭐라고? 그렇잖아도 너무 미안한 마음뿐인데,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어쨌든 정말 미안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많이 자책했었어.”
“아니야, 오빠와 나의 문제가 아니었잖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와 시대의 문제로 봐야지.”
“그래도 소연이가 그렇게 힘들었을 때, 내가 아무런 도움과 힘이 되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괴로울 수밖에 없었지.”
“오빠가 있어 내가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거야. 오빠, 정말 고마워, 지금 내눈 앞에 있어줘서”
그가 조용히 그녀를 품안에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도 말없이 그의 품에 몸을 내맡겼다. 또 한참 동안을 서로를 끌어안은 채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다시 적막을 깨고 말을 꺼냈다.
“식사를 안 해도 배부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해야지?”
“그래, 조금씩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되지.”
둘은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무슨 맛인지 모르고 온통 눈과 귀는 서로의 얼굴과 몸짓에 머물러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직원이 후식을 제공하면서 영업시간 종료를 안내해 주었다. 벌써 시간이 10시 30분이 넘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내일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필드 트립에 참여할 수 있나?”
“나는 대사관에서 별도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이런, 아쉽네. 혹시 참가하면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볼까 했는데”
그러자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에게 물었다.
“내일 필드 트립 일정이 언제 끝나는데?”
“아마도 일정대로면 필드 트림은 오후 5시에 끝나고, 저녁까지 먹으면 빨라야 오후 8시가 되지 않을까 싶네.”
“그럼, 나도 내일 일정이 저녁 7시 전후에 끝나니까 저녁 8시에 여기서 보면 어떨까?”
그러자 그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좋지만, 괜찮겠어?”
그녀가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내가 뭘 그렇게 중요한 인사라고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고, 아니~ 뭐, 다시 볼 수 있어 좋다는 의미였어.”
“알았어. 뭘 그렇게 당황해 하고 그래. 아무튼 내일 오후 8시에 여기서 보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네.”
“그래, 오늘 일정 때문에 많이 피곤할 텐데, 이제 들어가 쉬고 내일 다시 보자.”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계산서를 들고 먼저 룸을 나섰다. 그 뒤를 그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계산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로 내려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택시들이 호텔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를 택시를 태워 보낸 후 그도 택시를 타고 숙소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30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으니,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녀와 서로 나누었던 그동안의 가족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다. 결국 꿈속에서도 그녀를 만나 아직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에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어. 그냥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면 그뿐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