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북한 대표단 일행들이 진행 요원의 안내를 받아 만찬 장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북한 대표단 일행들을 재빨리 눈으로 확인하였다. 일행 중에 여성 한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약속을 지켰던 것이었다. 그녀도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누군가를 찾는 듯 한국 대표단 쪽으로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천천히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의 얼굴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옛날의 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로 악수를 하고 가볍게 포옹을 하였다.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그러자 그녀가 얼굴이 살짝 미소를 띠면서 “예,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주변의 시선 때문에 서로 존댓말을 하면서도 눈길은 서로의 얼굴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요. 저 많이 늙었지요?”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말이 이어받아 “아닙니다, 아직도 여전히 옛 얼굴이 많이 남아 있네요. 저야말로 머리도 그렇고 많이 늙었지요.”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머리를 살짝 보면서 “반백이 잘 어울리세요.”
그러는 사이에 행사 사회자가 만찬의 시작을 알리면서 각자 자리에 앉을 것을 부탁하였다. 일단 자리가 각국 대표단별로 배치되어 있어 그와 그녀도 할 수 없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회자의 진행 순서에 따라 개최국 중국 대표단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각국 대표단의 인사가 이어졌다. 식순에 따른 진행이 거의 마무리되고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식사와 함께 중국 전통주를 곁들이면서 참석자 일행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겨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가 눈을 돌려 북한 대표단 쪽을 보았다. 북한 대표단의 일행들도 중국 대표단과 서로 합석하면서 건배를 하고 있었다. 남한의 일부 학자들도 북한 대표단으로 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도 천천히 일어나 북한 역사학자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도 중국 전통주를 마셨는지 얼굴이 약간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그를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그가 “예, 음식이 맛있네요.”라고 대답하면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의 30년 만에 상봉이라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가 좀 망설이는 모습에 그녀가 살며시 식탁 밑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순간 좀 당황스러웠지만,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오랜만에 서로 잡은 손의 느낌이 좀 새로웠지만, 서로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행사 사회자가 만찬을 마무리하는 멘트가 흘러 나왔다. 둘은 할 수 없이 손을 놓고 다시 자리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참석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앉자, 주최측인 중국 대표단의 책임자가 일어나 간단히 환영인사를 하면서 건배를 제안하였다. 모든 참석자들이 건배를 하면서 자리를 정리하였다. 참석자들이 만찬 장소를 떠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남북한 대표단들도 서로 다가와 악수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도 일행들과 함께 다가와 남한 대표단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내일 발표회에서 뵐게요.”라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내일 뵐게요.”라고 대답하면서 악수를 받았다. 그런데 악수를 하는 손 안에 무언가 느껴졌다. 그것이 메모지라는 것을 직감한 그는 악수했던 손을 자연스럽게 오므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만찬 장소를 떠나 돌아오는 버스에서 옆자리가 빈 자석에 앉아 조용히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었다. 그녀가 직접 쓴 손 글씨로 “내일 학술발표회가 끝난 후 오후 7시에 오늘 만찬이 개최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커피숍에서 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다. 그가 메모지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버스 창가를 내다보았다. 늦은 시간임에도 북경 시내의 네온사인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그의 마음이 훈훈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마치 꿈만 같았다. 호텔을 돌아온 그는 사워를 마치고 내일 발표할 논문을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12시쯤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