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렇게 세월이 무정하게 흘러갔다. 한 해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그동안 그에게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5년 전에는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2년 후에는 시어머니 병을 간호하던 아내가 무리를 하였는지 다른 부위에 질병이 생겨 결국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큰 아들의 결혼을 보고 며느리를 보고 갔다. 아들 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큰 아들은 의대를 졸업한 후 대학병원에 남아 있다가 얼마 전에 며느리와 함께 개업해 독립했다. 둘째 아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나,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외국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지만, 아직까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다시 혼자로 돌아왔다. 30년 전에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교수생활을 한지도 20년이 훌쩍 넘어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최고참으로 후배 교수들의 존경과 함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앞에서는 존경한다고 하지만, 뒤에서는 빨리 자리를 비워주길 바라고 있다. 그래야 젊은 교수로 충원하여 자신들이 거느리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가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2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난 후로 외롭고 적적하여 애견을 입양하였다. 갈색 푸들로 유일한 그의 말벗이 되어주고 있다. 애견과 산책하는 때가 그에게는 위안과 힐링이 되는 시간이다. 날씨가 허용하는 한 빠뜨리지 않고 매일 하려고 한다. 가끔 학회 참석차 외국에 나갈 때마다 동물병원에 맡기는 것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애견이 있어 그의 단조로운 생활에 큰 기쁨이자 위안이 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올림픽 이야기로 시끄럽다.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새해 들어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참석한다고 메스컴에서 난리다. 요즈음 텔레비전만 틀면 북한의 동계올림픽 참가 소식으로 가득하다. 그 날도 그는 이른 저녁을 마치고 애견과 동네 공원을 산책을 하고 돌아와 애견을 씻어 말려주었다. 애견에게는 간식을 주고, 와인 한 잔과 안주로 치즈 한 접시를 들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TV에서는 북한의 동계 올림픽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몇몇 종목에서는 남북단일팀을 이루어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뉴스가 보도되는 순간에 갑자기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북한에서 단일팀 구성을 협의하기 위해 협상단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일행 중에 왠지 모르게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남성들이고, 여성은 단 한명이라서 그랬는지 몰랐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TV 가까이 가서 그 여성을 자세히 보았다. 틀림없었다. 바로 그녀였다. 30년 전에 베를린에서 헤어졌던 그녀였다. 나이가 들었지만, 그녀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갑자기 그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그렇게 소식을 몰라 안타까워했던 그녀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정하게도 TV 화면은 다른 장면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