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모교에서 교수 자리를 옮긴 후로도 그는 강의와 연구에 더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였다. 모교 출신이라도 독일에서 학위를 받아 국내에 특별한 학연이 없어 실력으로 증명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에는 강의에 집중하고, 방학에는 연구에 몰두해야만 했다. 틈틈이 외국 학회에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지방대학에서 했던 일들이 똑같이 반복되었다. 아니 훨씬 더 바빠졌다. 그러는 와중에 선배 교수들까지 챙겨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눈코 뜰 사이 없이 지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도 자녀에 대한 교육은 거의 아내가 전적으로 맡아 담당해야 했다. 다행히 두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아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중간에 시행착오는 겪었지만, 그래도 제 갈 길을 찾아갔다. 그더런 와중에 이번에는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교편생활을 하다가 두 아들의 사춘기와 진학 문제 등으로 씨름하다보니 몸에 병이 생긴 것이었다. 다행히 초기라서 위의 절반 이상을 절제하고도 항암치료 없이 경과가 좋았다.
이처럼 귀국 후 국내 생활이 만만치 않아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가끔 통일부 공무원 친구를 통해 그녀의 상황을 확인해 보려 하였으나,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학회에 참석할 때도 북한에서 참석한 학자들에게 접근하려고 하였으나,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녀의 상황을 확인해 보려고 하였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무력감을 느끼는 나날이 계속 지나갔다.
그녀와 이별한 지도 벌써 10년을 넘어 20년 가까이 흘러가면서 그의 마음도 점차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그도 한 여성을 만나 결혼한 것처럼 그녀도 북한에서 결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냥 젊은 시절 아련한 사랑의 추억으로 묻어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누구나 하나쯤 지니고 살아가는 사랑의 추억으로 말이다. 모든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지 않은가? 그냥 가슴 속에 묻어둔 사랑은 그대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면서 마음을 접은 채로 살아갔다. 그래도 가끔씩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 때면,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해 준 편지를 혼자 읽어보곤 하였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녀가 전해 준 마음만큼은 지금도 그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품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