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약간 놀랐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생기발랄한 그녀의 모습에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싫지 않았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설레곤 하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갑자기 한국에서 부모님과 지내고 있는 여동생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의 1년 연상 누나를 짝사랑하였다. 그러나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졸업한 후 서울로 진학하면서 끝나버린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이다. 대학 시절에도 여학생들과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말 그대로 동기와 선후배 관계로 지냈다. 19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연애에 열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연애에 빠진 대학생들은 마치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얼빠진 대학생 정도로 치부하던 시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지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아무튼 그 당시에는 그랬다. 연애를 하더라도 몰래 조용히 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군 제대와 졸업 후 갑자기 시작한 유학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낯선 환경과 서툰 언어, 그리고 바쁜 학업 일정까지 모든 것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3년 정도가 지나니 낯선 외국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되고, 독일어도 수업을 따라갈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에 공부하고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의 신분으로 연애는 꿈도 꾸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 그녀와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느껴지는 감정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사랑, 연예, 이런 감정들이 어떻게 마음대로 통제될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다가온 감정에 그 자신도 조금 놀랍지만, 왠지 마냥 두렵거나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대학 시절보다는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불안한 미래와 힘든 현실 속에서도 그렇게 청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다시 눈을 책으로 돌렸다. 다음 학기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학업 준비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다. 개학 일주일 전에는 그도 학기 준비를 위해 베를린을 떠나 학교가 있는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도 다음 주에는 베를린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도 그의 마음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한편 그녀도 그를 다시 만나고 돌아온 후 생각이 더 많아졌다. 계속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나서 마음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나와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만나면 마음의 정리가 한결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자꾸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밥을 먹을 때도, 거리를 걸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생각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하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남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가 만난 남자라야 대학 동기들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그냥 동기일 뿐이었다. 동기 중에 한두 명이 자신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을 보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왠지 마음이 전혀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만난 그는 그렇지 않았다.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무언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의 미소에는 따뜻함과 함께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그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그 마음이 더 깊게 전해져 왔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설렘이라는 감정을 심어 놓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그를 생각하면서 계속 마음이 설레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계속 만날 생각보다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번 더 만나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계속 만날 수 없다면, 굳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를 계속 만난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을 경우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까지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럴 경우에 그와 만남이 여기서 끝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녀의 마음도 아직 끝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이별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미루고 싶었다. 아직까지 그와 만남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중에 그때 가서 말해도 늦지 않는다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상황까지 모두 고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에는 그녀는 아직 젊었고, 그녀의 마음이 너무 뜨거웠다. 머리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하면서도 벌써 다음에 그를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