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베를린 성벽의 입구 쪽에서 매표소 여성 직원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독일 아저씨의 잃어버린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녀에 따르면 중년의 독일 아저씨가 입장권을 구입하면서 지갑을 안내 데스크에 놓고 갔다. 지갑을 분실한 사람을 계속 찾다가 이곳에서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뛰어왔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그녀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서 그녀는 다리가 풀렸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는 사이에 중년의 독일 아저씨가 좀 전에 자신의 성급한 행동이 미안하였는지 그녀에게 다가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다시 그녀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이제 다 해결되었습니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으로 머리 숙여 인사하였다. “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도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잘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도 조금 안정을 되찾은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예, 정말 괜찮아요.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이에 그와 함께 왔던 단체 관광객들이 일정에 따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인사하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그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간중간에 가끔씩 지난주 토요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어떻게 일행은 잘 만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걱정되었다. 다음 학기 수업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처지라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었지만, 가끔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기억에 마음의 여유와 위안을 얻는 자신을 보고 새삼 놀라고 있었다. 먼 타국에서 본 그녀가 남 같지 않고 한국에 있는 여동생의 얼굴을 떠오르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가족에 대한 향수에 빠지기도 하였다. 다음 주 토요일 오후, 주말이면 늘 그렇듯이 그는 다시 베를린 성벽 앞에 있었다. 큐레이터와 함께 단체 관광객들을 가이드 해 주고 있었다. 그가 단체 관광객들의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데, 안내 데스크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이 수줍게 미소를 띠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일주일 전에 바로 여기서 독일 아저씨에게 궁지에 몰려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그녀였다. 그때와 옷차림이 달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녀가 분명하였다. 그녀가 먼저 수줍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도 살짝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예, 그날은 잘 들어가셨어요? 일행은 어떻게 잘 만나셨나요?” 그녀는 다시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 덕분에 잘 들어갔어요.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저는 통역만 해드렸을 뿐인걸요.” 그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일정이 언제 끝나시나요? 그날에는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괜찮으면 일정이 끝나는 시간에 뵙고 싶은데?”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별일도 아닌걸요.” 그때 마침, 큐레이터와 단체 관광객들이 안내 데스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다시 물었다. “끝나는 시간에 여기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그도 서둘러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는 마음에 안내 데스크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예, 그러면 7시 정도에 끝나니까 그때 뵐까요?” 그 말을 듣고서 그녀는 “그럼, 그때 봬요?”하고 말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돌아서 다시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그도 매표소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