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올게, 블랑."
"잘 다녀와~."
일하러 갈 준비를 마친 잭이 나서면서 건넨 인사를 블랑이 소파에 누운채로 받아주었다.
데일리 레인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날, 잭이 다니엘에게 패배한 날. 잭과 블랑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충분히 휴식을 가진 다음 곧장 문 라이트로 돌아왔다.
데일리 레인의 중앙쪽에서 빗소리를 뚫고 폭발음이 여러번 들려왔었다. 아마 기사단과 마피아의 싸움이 일어난 것이리라.
사실 그건 싸움이 아니라 기사단의 일방적인 유린이었지만. 도시에서 그런 싸움이 일어났는데도 데일리 레인의 시장은 이번 임무를 내린 왕에게 항의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마피아는 기사단 두명에 의해 손쉽게 괴멸되고 말았다.
일터인 카페에 도착한 잭은 곧바로 카페 유니폼으로 환복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커피를 타주고, 할 일이 없을때면 카페 정리정돈을 하거나 점장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이 조금 지난 뒤, 점장은 잠시 지인을 만나러간다며 잭에게 카페를 맡기고 문을 나섰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잭은 카운터에 몸을 기댄채로 창밖 도시의 거리를 감정없는 눈빛으로 보았다. 요 며칠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다니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리 눈이 좋다지만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뛰는 잭의 모든 공격을 포착해서 막아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정말이지, 그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란 것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때 즈음, 카페의 문이 종소리를 울리며 열렸다. 잭은 눈만 움직여서 들어온 손님을 확인했다. 탁한 흰색의 머리. 날카로운 눈매. 몇 번 보아왔던 인물이다.
"오랜만이네요. 베네딕트."
"그러게요. 요즘 너무 바빠서 말이죠."
카페에 들어온 베네딕트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넥타이가 답답한 모양인지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쳤다.
"주문하실건가요?"
"아메리카노로."
주문이 들어오자 잭은 능숙한 솜씨로 커피를 타내린 뒤 베네딕트가 있는 테이블에 직접 손수 타내린 커피잔을 올려놓고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홀짝 마신 베네딕트는 코트를 벗어 옆에 있는 빈 의자에 걸어두었다. 아무래도 좀 오래 앉아있다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베네딕트는 의자를 살짝 뒤로 뺀 다음 긴 다리를 꼬은 뒤 무릎에 양쪽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이번 축제는 정신없었죠."
"그렇네요. 느닷없이 마피아가 기어들어와서."
잭이 대답해주자 베네딕트는 흡족한 얼굴을 지어보이며 조그마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전에 대화했을 때 잭이 보인 차가운 반응을 생각하면 나름 놀라운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뭐. 우연히 와있던 기사단 덕분에 마피아를 격퇴시킬 수 있었죠."
"베네딕트, 당신도 그 날 여기에 있었나요?"
베네딕트는 다시 한 번, 커피를 홀짝인 뒤 잭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그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아까부터 계속 입 한쪽을 올리고있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일때문에 다른곳에 있었습니다."
뭐가 안타깝다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잭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가 무슨일을 하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딱히 묻고싶지도 않았는지 잭은 추가로 질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은지 잭에게 시선을 둔 채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일 덕분에, 왕이 기사단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죠. 다른 범죄조직의 성장을 방해하던 마피아를 바로 내칠 정도였으니까요."
그 말에, 잭은 시니그바를 떠올렸다. 기사단이나 되는 사람이 마피아에게 한대 맞은거를 좀 이상하게 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일부러 맞은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피아가 시니그바를 때린 덕분에 공격할 명분이 생긴 것이니까.
"그 일이 있고나서 며칠 뒤. 기사단 두 명이 곧장 데일리 레인에 있는 마피아의 대부를 붙잡았죠."
그렇게 말한 베네딕트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았다. 팔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진지한 눈으로 잭을 노려보고있었다.
잭은 이 사람이 갑자기 왜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기사단이 데일리 레인에 간 날. 도르튼에 나타났던 가면을 쓴 혁명가 두 명도 데일리 레인에 갔었더군요."
베네딕트의 말에 잭은 최대한 감정을 숨긴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베네딕트의 눈을 마주보았다. 베네딕트는 어째서 그걸 알고있는걸까.
일단 미세한 반응조차 이 남자에게 보이면 어딘가 일이 꼬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잭은 계속해서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마피아의 대한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데일리 레인에 나타난 두 명의 혁명가. 흠, 제가볼 때 이들의 목적은 단순한 혁명이 아닌것 같더라고요."
"……그럼 그들의 목적은?"
"귀족 사회의 몰락."
순간적으로 잭은 숨을 집어삼켰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올라오는 분노라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귀족 사회의 몰락이라니. 잭과 블랑은 그런 단순한 이유때문에 살인귀라는 일을 하고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것 뿐이다.
그런데 베네딕트는 그것을 가지고, 고작 귀족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본다는 말인가. 그의 얼굴을 보니 확신하고 있는 듯 하였다.
"도르튼에서는 랜드로바 가문의 힘을 다 빼앗어버렸죠. 그 다음은 엔틱 가문, 마피아의 대부를 노리는거고요."
"어떻게 그런 추측으로 이어──"
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네딕트가 한쪽 손을 들어올려 그것을 막았다. 그는 숨을 내쉰 뒤 살벌한 눈빛을 얼굴에 올렸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귀족들을 죽여왔으니까요."
그 목소리에는 날이 가득 서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가 한 말이다. 잭은 열심히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에 도달했다.
그만큼 베네딕트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잭과 블랑이 예전부터 해왔던 짓을 알고있는 듯 하였다. 물론 베네딕트가 얘기하고 있는 인물이 자신들이란 것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멍청이가 아닌 이상 지금의 잭의 반응을 본다면 뭔가 아는 구석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정도로 현재 잭의 속마음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여러 귀족가문의 가주를 죽여온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아무리봐도 귀족 사회의 몰락밖에는 없더라고요."
잭은 그의 말에 대답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길게 고민했다. 지금 상태에서 대답한다면 분명 목소리가 엄청 떨릴거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낸것은, 역시나 베네딕트였다. 그는 어느샌가 눈웃음을 짓고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왕국의 역사에 반역을 한다는 것이죠. ──왜 그랬어요, 살인귀."
"뭐……."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방금 베네딕트가 잭을 보고 살인귀라고 불렀다. 날 선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다시 장난스러운 느낌이 사라지더니 오히려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운 목소리와 눈으로 잭을 보고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 목소리에는 큰 확신이 담겨있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장난스럽거나 싱글벙글 웃는 얕잡아 보일듯한 행동은 하지 않을것이다.
지금 잭의 앞에 서있는 인물은, 뭐하러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인물이 아니라 왕국 제일의 형사이다.
"너가 그 가면을 쓰고다니는 살인귀잖아. 언제까지 모른척 할 셈이지?"
"갑, 갑자기 무슨, 무슨 소리를……."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잭을 보고 베네딕트는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카페의 문쪽에 있는 손을 들어올리더니 손바닥을 살짝 오므렸다. 마치 무언가를 잡는 것처럼.
그리고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문고리를 돌리듯이 손을 돌렸다.
그러자, 마치 노이즈가 껴있는 듯한 베네딕트의 모습이 나왔다. 그 형상은 아까전에 베네딕트가 카페에 들어왔을때 하였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지금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은,
"내 이능력이다. 내가 지정한 곳에 이능력을 사용하면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볼 수가 있지."
"시간을, 되돌린다고?"
"그래. 이 이능력 덕분에 나는 손쉽게 수도 살인전담 1팀의 형사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
수도 살인전담 1팀의 형사. 드디어 잭이 그의 실체를 알게되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닐거라는 생각은 하고있었지만 지금 알게된 정체는 오히려 더 충격적이었다.
"짧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야 간단하지만, 조금만 늦어버리면 돌리는데 꽤 긴 시간을 투자해야 돼서 말이야.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이유가 이것때문이지."
"……목적이 뭐지."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잭을 보고 베네딕트는 놀랐는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치만 느낌은 아까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렇게 나와야지, 살인귀. 목적이라고 했나?"
베네딕트는 잠시 말을 끊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늑대를 풀었다."
수수께끼같은 말에, 잭은 속으로 고개를 꼬았다. 늑대를 풀었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되물어 보기도 전에 베네딕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코트를 챙겨입었다.
"얘기는 여기까지다. 안심하라고, 살인귀. 왕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인귀의 죽음이 아니라 생포니까."
이어진 베네딕트의 말에 잭은 그가 말했던 늑대의 의미를 눈치챘다.
늑대란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다. 왕이 잭과 블랑을 잡기위해 기사단을 이 도시로 보냈다는 말이다. 이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그는 자신감이 차있다는 뜻일 것이다. 늑대를 피하기 위해 움직여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평소처럼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카페를 나섰다.
카페에 혼자 남게된 잭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있었다. 곧바로 손님이 들어왔으나 지금은 그 손님에게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잭은 일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블랑이 있었다. 블랑은 평소처럼 일을 끝내고 온 잭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였지만 그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 무슨일이야. 뛰어왔어?"
"허억……. 허억……."
잭은 가쁜 숨을 몰아내쉬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뒤 카페에서 베네딕트와 나누었던 대화를 블랑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의외로 침착하게 반응했다. 고양이같은 사나운 눈을 뜬 채로 "그렇단 말이지……."라고 짧게 중얼거렸다. 그녀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
도망치자고 할까? 아니, 그녀 또한 알고있을 것이다. 베네딕트가 말해준 시점에서 이미 도망은 늦었다는 것을.
기사단에게, 왕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할까? 하지만 기사단을 공격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그녀 또한 잘 알고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블랑이 결단을 내렸다.
"미안한데, 잭. 나 잠시 나갔다올게."
"응?"
순간, 블랑이 무슨말을 한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블랑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순백색 옷과 살인귀 가면을 챙겨나왔다.
"어디가려는거야, 블랑."
"미안해.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 블랑을 보며, 잭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집을 나서려던 블랑은 잭이 앞을 가로막자 평소 잭에게 보이던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비켜, 잭."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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