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돌바닥. 중앙에 있는 원형경기장. 그 경기장을 둘러싼 원형 계단식 의자.
이곳이 포트리아 제일가는 귀족의 저택 내부에 있는 곳이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될까.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인 장소, 웨리노 가문의 저택 지하에 숨어있는 귀족들의 놀이터인 '투기장'. 원형 계단 의자에 수많은 귀족들이 술잔을 든 채 원형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서로 얼굴에 한대씩 먹여줍니다!"
마이크를 통해 베일 웨리노의 목소리가 투기장에 울려퍼졌다. 경기장 내부에서 주먹이 서로의 몸을 때릴때마다 환호하는 사람들. 한쪽에서만 때리고 다른 한쪽이 공격에 실패할 경우, 귀족들의 희비가 교차한다.
"어이, 이봐!"
"아, 예."
"여기 한 잔 따라줘."
뚱뚱한 귀족이 술잔을 들이밀자 와인병을 들고다니는 웨리노 가의 집사가 조심스럽게 와인을 따라준다. 뚱뚱한 귀족은 불안한 것 마냥 다리를 덜덜 떨며 경기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쳇, 막상막하잖아? 홍색이 체격이 좋아서 거기에 걸었는데….'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와인을 들이키자 거대한 환호성이 터져나와 그는 순간적으로 와인을 그대로 내뱉을 뻔 하였다.
"클린히트─!! 청색,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고조되어가는 투기장. 홍색의 강렬한 펀치 한 방으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분위기가 한번에 터졌다.
경기장 내부에는 청색띠를 매고있는 사람과 홍색띠를 매고있는 사람, 총 두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 걸려있는 금속제 목걸이. '노예'임을 나타내는 증거.
청색띠를 입고있는 노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의 얼굴쪽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를 말없이 보고있던 홍색띠의 노예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타더니 그를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맞을때마다 몸을 꿈틀거리는 청색띠의 노예. 완전히 풀린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계속해서 공격하는 홍색띠의 노예.
이 상황을 지켜보던 베일 웨리노가 마이크를 부여잡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결판이 난 것 같군요! 이번 대결의 승자는 홍색입니다!"
거대한 환호성. 반대로 탄식을 하는 사람이 서로 대비돼보였다. 뚱뚱한 귀족은 방금 전의 불안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소리를 지르는 귀족들 사이에 섞여들어 같이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판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안에서는 계속해서 타격음이 들리고 있었다.
"자, 다음 경기가 준비 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퍽, 퍽, 퍽. 이미 기절해있는 상대를 계속 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별 신경쓰지 않는 듯, 다음 경기에 대해 얘기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있었다.
잠시 후, 정장을 입은 여러명의 덩치 큰 남자들이 경기장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곧바로 홍색띠의 노예에게 달라붙고는 그의 목에 주사기를 놓았다. 주사기를 맞은 노예는 곧바로 쓰러졌고 그대로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게 업혀나갔다.
이것이 데일리 레인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마약을 맞은 결과다. 그 마약에 맞으면 약효과가 다 떨어지거나 해독약을 맞기 전까지는 광전사처럼 미친듯이 눈 앞의 사람에게 달려든다. 설령 그 상대가 기절하거나 죽었더라도.
홍색띠, 청색띠의 노예가 퇴장한지 한 5분이 지나자 다음 노예가 정장을 입은 사내들에게 질질 끌려오며 무대로 올라왔다.
서로를 쳐다보며 몸을 벌벌 떨고있는 두 명의 노예. 정장을 입은 사내가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들자 노예들이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 몸을 움직였다.
"싫어! 싫어! 싸우기 싫어어어─!!"
미친듯이 소리치며 발버둥치지만 결국 그의 목에 주사기가 꽂혔고 그 안에 들어있던 마약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상대쪽도 마찬가지로 약이 주입되는 중이었고, 곧바로 눈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요! 그럼 제 5 라운드, 시작합니다!"
그 말에 맞추어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경기장에서 재빠르게 퇴장하고 남은 것은 광기에 물든 두 명의 노예였다. 귀족들의 커다란 함성소리와 함께 두 명의 주먹이 서로의 얼굴을 향해 날라갔다.
* * *
"으음…."
흰색의 트윈테일 머리를 한 여자가 종이를 보고, 도시의 풍경을 보는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였다. 표정을 한껏 찡그린 채 계속해서 그 행동을 또다시 반복한다.
"좀 알아보겠어, 블랑?"
"아니, 전혀. 젠장, 길버트 녀석…. 바로 찾을 수 있을거라더니 못찾겠잖아."
블랑이 계속 들여다보고있는 휘날려 그린듯한 그림은 길버트가 투기장의 위치라면서 준 지도였다. 종이의 중앙에는 거대한 기둥이 그려져있고 그 주변에 사각형 여러개를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밤이 되어갈 때 즈음에 포트리아에 도착한 두명은 지도에 그려진 투기장을 찾기 위해 계속 걸어다녔지만 한시간이 좀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투기장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기장이 어디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일단은 지도에 그려진 그림에 의존해서 돌아다니는 중이지만 슬슬 블랑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아아, 슬슬 짜증나려고 하네. 싸그리 다 몰살시켜버릴까…."
"안 돼, 블랑. 그러면 계획이 꼬여버린다고."
농담삼아 한 말이었지만 잭은 진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이번 목표는 데일리 레인의 작업장처럼 몰살이 목표가 아닌, 투기장의 주인 '베일 웨리노'이다.
잭과 블랑도 물론 마음같아서는 그곳에 모인 모든 귀족을 죽이고 싶어하지만, 수많은 귀족이 몰살당한다면 그것은 왕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큰일이 될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리게 된 결론은, 일단은 투기장의 주인만 암살하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나머지 귀족들은 블랑이 입수한 '명단'에 이름이 다 적혀있으니, 천천히 죽이면 되니까.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붙잡아서 물어볼까?"
"그것도 안 돼. 그러면 베일 웨리노를 살해한 사람이 우리라고 바로 곧바로 의심받을걸?"
"끄응…."
블랑이 볼을 한껏 부풀리며 자신의 양갈래 머리를 붙잡았다. 자기 나름대로 분노를 참는 중이리라. 잭은 블랑이 들고있던 지도를 유심히 쳐다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긴가?"
"응?"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리는 잭의 말에 블랑이 의아함을 나타냈다.
"커다란 기둥…."
"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뭐가 보여?"
"그런…것 같아…."
"그런것 같다니…."
잭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블랑은 잭의 팔을 잡더니 잭이 보고있던 방향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팔려있던 정신을 되찾은 당황한 눈빛으로 블랑의 얼굴을 보았다.
"블… 블랑?"
"계속 가만히 있어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데. 네 감이 맞다면 맞는거겠지. 자, 안내해."
"아, 알겠어."
잭이 앞장서고 그 뒤를 블랑이 쫓아갔다. 거대한 건물을 지나다니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이동한지 20분쯤 지나자 잭의 말대로 커다란 기둥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둥이 아니라─
"─시계탑?"
작게 중얼거린 블랑은 곧바로 지도를 꺼내 시계탑이 있는 저택과 지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저택은 여러개의 건물들이 통로로 서로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거대한 시계탑이 세워져있는 구조였다.
못미덥기는 하지만 지도에 그려져있는 거대한 기둥을 시계탑이라 생각하고 본다면 얼추 맞는 듯 하였다.
블랑은 곧바로 종이를 구겨서 바닥에 던지더니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길버트를 향해 엄청난 욕석을 퍼부으면서.
"시계라도 그려놓던가. 기둥만 그려놓고 뭐 하자는거야."
"진정해, 블랑. 그래도 찾았잖아."
블랑은 잭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의 웅장한 저택을 주시했다.
"─투기장."
저택의 입구쪽에는 여전히 경비병이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마차들 사이로 잭과 블랑은 계속해서 저택을 노려보았다. 말을 먼저 꺼낸것은 잭이었다.
"어떤 식으로 들어갈까."
"일단 저택 안쪽을 탐색해 봐야겠지. 안쪽에 경비병이 별로 없으면 담을 넘어서 들어가자고."
"그렇다면…. 저 건물이 좋겠네. 갔다올게."
잭은 곧바로 자신들의 뒤쪽에 있는 5층건물로 뛰어갔다. 건물의 문을 열고 순식간에 옥상에 도착한 잭은 저택의 조그마한 정원을 살펴보았다. 경비병이 몇몇 돌아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서로간의 간격이 많이 떨어져있었고 곳곳에 있는 건물들 덕분에 가림막이 매우 많았다.
잭이 내려와서 블랑에게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자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환영하나 본데?"
저택의 뒷마당 쪽. 나무 몇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있는 이곳은 높은 담벼락이 있기 때문인지 경비병이 두명정도밖에 배치가 되어있지 않다.
저택의 앞마당쪽은 건물도 화려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라도 구경할 수 있지만 뒷마당쪽은 정말 아무것도 볼것이 없다.
그들의 근무시간은 여섯시간. 아직 교대하려면 네시간이나 더 근무를 서야한다. 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슬렁어슬렁 뒷마당 쪽을 의미없이 걸어다녔다.
'아아, 나도 이런 건물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저택을 올려다보며 경비병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투기장 때문인지 이 저택의 경비는 다른 곳의 경비보다 나름 돈을 많이 받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집을 사려면 몇십년은 일해야 할 것이다.
괜히 배만 아파오는 상상은 접기로 한 경비병이 별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자─
날카로운 나이프가 그의 투구와 갑옷 사이의 틈, 목 쪽에 깊게 박혔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쓰러지려는 몸뚱아리를 잭이 받아서 바닥에 살며시 눕혔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다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을 만드는 것은 삼류나 하는 짓.
다른 경비병 쪽은 블랑이 별 문제 없이 가볍게 처치하였을 것이다.
'투기장은 지하에 있다고 했지.'
머릿속으로 대충 투기장의 위치를 생각하며 잭의 발이 저택쪽을 향해 움직였다.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