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쁜 남자 』
W.린비
05. 파란의 조짐
탕. 탕. 탕.
잠귀가 어두운 나를 잠에서 깨운 건, 둔탁한 소음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지독한 발 냄새가 후각을 침범해 와야 하는데, 골을 울리만치 큰 소리가 먼저 귓전을 때렸다. 오죽하면 내가 콧구멍에 총을 맞는 꿈을 꾸고 경련을 일으키며 깼을까.
기상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방 벽을 마주보았다. 난잡하게 붙여진 포스터 사이로 벽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지. 이 시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음은.
이른 시각을 터무니없이 바라보다 베개를 안고 어기적대며 방을 나왔다(전날 도준 오빠에게 뒤돌려 차기를 맞은 후유증이라고 한다).
소음의 근원지는 거실이었다. 덩치 큰 XY 염색체 한 마리가 벽 한 가운데로 못을 박고 있었다.
도준 오빠? 나는 놀람 반 의아함 반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웅얼였다.
저 양반이 어디 가서 누를 범하는 성격이 절대 아닌데, 왜 새벽부터 무고한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을까. 물론 아파트가 아니라 그리 직접적으로 피해가 미치진 않겠지만은.
그래도 저러는 건 오빠답지 않았다.
기척을 듣고도 오빠가 답이 없기에 곁으로 다가가 하는 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못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고는 그곳에 액자를 반듯이 거는 것이었다.
대체 뭐람.
눈곱을 후비적대던 나는 곧 액자 속에 넣어진 것을 보고 휘둥그레졌다.
미친, 저건 내 모의 성적표잖아…?
글체가 심히 낯익다 했더니 그저께 재수 학원에서 나눠준 등급표였다. 나는 뜨악한 얼굴로 당장에 베개를 패대기치며 소리 쳤다.
돌았어?!
" 좋은 아침이다, 돌대가리 동생아. "
" 좋은 아침은 무슨! 그걸 왜 거기 달아! "
" 오늘 어머니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는 날이잖냐. 두 분께서 너의 자랑스러운 성적을 보셨으면 한다. "
" 자랑스럽긴 뭐가 자랑스러워! 진짜 장난해?! "
" 거지도 저 부끄러운 줄은 안다고 너도 양심이란 건 있나보구나. "
" 아아악, 당장 떼! 떼라고! "
발악하며 액자를 향해 돌격해봤지만 도준 오빠의 한 손에 이마가 밀렸다.
내 두 팔은 붕붕, 거리며 허공을 가를 뿐 벽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정말이지 나의 길이감이 혐오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오빠 새끼의 팔을 할퀴고 별안간 꽥꽥, 거려보기도 하다가 나는 결국 오빠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 아아, 오빠 제바알…! "
나의 애원에 도준 오빠가 인상을 험악히 구겼다.
"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주접은. "
주접 떨어 미안하지만 난 간절할 때만 빌어 내 목숨, 엉엉. 성적표 떼어주기 전에 절대 안 놓을 거야!
꽉 붙들며 악을 썼지만 도준 오빠는 코웃음을 치며 나아갔다. 오빠가 연장을 도로 현관 맡 서랍에 넣고, 부엌으로 가 아침을 차릴 때까지도 나는 다리 끝에 질질 매달려 다녔다.
인간적으로 20살 먹은 동생이 이 정도로 구걸하면 한 번쯤은 내려다보겠다….
제 다리에 붙은 게 동생이 아니라 한낱 거적 대기라는 듯이, 오빠는 안중이라곤 1도 없이 후라이팬에 햄을 굽고 계란을 깨뜨렸다.
그렇게 반시간쯤을 오빠의 하지와 한 몸이 되어 있었을까, 2층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층계를 내려왔다. 라한 오빠였다.
라한 오빠는 부엌으로 어기적대며 들다(도준 오빠에게 뒤돌려 차기를 맞은 후유증이라고 한다2) 질질 짜고 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 거기서 뭐해, 삐삐? "
목숨 동냥 중이야.
평소라면 눈물 콧물 다 짜낸 게 창피해서라도 오빠 앞에서 고개를 돌렸겠지만, 오라한이고 자시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목숨이 없어질 마당에 뭐가 중요하겠어.
나는 첫째 오빠를 향해 울먹거리며 외쳤다.
" 엄마가 성적표 보시면 진짜 피 볼지도 몰라! "
" 피는 인체에서 계속 만들어내는 거다. 그 까짓 거 조금 난다고 쫄 거 없어. "
" 아빠한테 머리 잘릴 수도 있단 말이야! "
" 머리카락은 금방 자란다. 무한 자원이거든. "
제 몸 아니라고 막말했다. 성격 도도한 거랑 얄짤 없는 거만 부모님께 물려받아가지고.
명색이 큰 오빠라고 하는 작자가 막내 동생에게 이토록 자비가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새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방 어귀를 돌아봤지만 라한 오빠는 이미 등을 돌려 거실로 가고 있었다. 조금 전 내가 내팽개친 베개를 품으로 수거하곤 하품을 쩍쩍 하면서.
나쁜 놈. 지 일 아니라 이거였다. 이따가 나를 달래준답시고 파스타를 사준다고 해도 절대 안 따라갈 거였다.
제 편 뺏긴 어린 애처럼 훌쩍대고 있을 적에, 도준 오빠가 이만 떨어지라는 듯이 발을 털며 읊조렸다.
" 어머니 아버지 공항 도착하시기 전에 재수 학원 끊고 와라. 그럼 액자 떼어 줄 테니까. "
니기럴, 그냥 피 멍 든 삭발 스님하고 말지!!
나는 독기 품은 시선으로 첫째 오빠를 노려보았다. 오빠의 다리 가운데로 박치기를 하려던 그쯤이었다.
우당탕탕쿵쾅!
거실에서 큰 소음이 났다.
쿵!
소음에 놀란 둘째 오빠가 제 방 침대에서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우리 삼 남매는 약속이나 한듯이 각자가 있던 곳에서 튀어나와 거실로 몰려갔다.
마룻바닥으로 부서진 액자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곁에서 라한 오빠가 양 손을 툭툭, 털었다.
벙 찐 우리를 보고, 라한 오빠는 유들유들 웃었다. 또 한 번 터무니없는 논리를 시전하며.
" 방금 4.5도의 지진이 났었습니다, 도준 형님. "
액자에 끼어있던 종이가 온 데 간 데 없었다. 라한 오빠의 잠옷 바지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내 등급표란 것을 알았다.
그렇게 방년 23세 오라한은 아침 댓바람부터 첫째 오빠에게 주걱으로 뺨을 맞았다.
***
아침 식사도 못한 채 쫓겨나 오라한(23세, 성적표 도둑)의 차를 타고 학원에 왔다.
함께 쫓겨난 신세인 줄 알았더니, 라한 오빠는 전화를 받곤 거래처와 미팅이 있어 가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니미, 그럼 난 어떡하라고. 무사 귀가할 방안도 못 강구한 마당에.
머리가 아파 꿍얼거렸더니 라한 오빠가 내게 지폐 몇 장과 성적표를 주며 말하길,
" 나는 널 소중한 인격체로 생각해. "
소크라테스 나셨네. 그런 사람이 액자를 그렇게 패대기 쳐서 깨 부셨냐.
" 삐삐 네 성적이 울릉도 대학의 오징어잡이 학과를 갈 수준이라고 해도 형님한테 이럴 권리는 없다고 봐. "
욕인지 옹호인지 구분 안 되지만 이렇게 된 데엔 나의 탓도 있어 얌전히 들었다.
" 이 돈으로 아침 사먹고 일단 학원에 가 있어, 삐삐. 형은 내가 설득해보던지 할게. "
" 어떻게? "
" 뭘 먹이든지 해야지. "
전부터 궁금했는데, 라한 오빠 너는 우리 가족을 짐승이라 생각 하냐? 먹을 것만 물려주면 세상만사 다 잊는?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 기왕이면 비싼 걸로 먹여. "
" 아무렴, 삐삐. "
라한 오빠에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내렸다.
저래 뵈도 오라한은 설득의 대가였다. 상대를 제 쪽으로 융화시키는 기질 하나는 타고 났는지, 작정하고 어거지를 놓는 사람도 결국 허허 웃게 만들곤 했다.
물론 남들한테 말로 받을 거 도준 오빠한텐 주먹으로 받긴 하겠지만은, 설득은 설득이니까네.
라한 오빠가 오빠 새끼의 마음을 돌려놓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상가로 달려 들어갔다.
***
2시간 쯤 텁텁한 공간에서 문제를 풀다 보니 목이 말랐다. 단지 목이 마를 뿐인데 배가 같이 고파지는 이 이상 현상은 뭔지.
화장실을 간다며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을 비집고 나갔다 온지 20분이 채 안 됐는데, 또 움직였다간 주변의 눈초리를 받을 것 같았다.
약 2.62898594초쯤을 버티다 위에서 천둥 번개가 칠 조짐이 보여 지갑을 들고 나왔다. 우람한 덩치를 흘겨보는 시선들은 덤.
교실을 나오자마자 숨을 터뜨렸다.
아, 대한민국 입시 현실이여. 나를 폭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나.
필수적인 자기 합리화를 하곤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잔뜩 사들고 들어왔다.
콧노래를 부르며 휴게실로 향하는데, 학원 안내 데스크 앞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죽 옷으로 빼입은 사내가 서있었다.
와, 저렇게 옷 입는 사람이 또 있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아니라 했지만, 언뜻 본 뒷모습에도 남자는 한 날나리 할 것 같았다.
접수를 하러 왔는지 데스크 알바생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그를 대하는 알바생의 얼굴이 방긋방긋 했다.
되게 잘 생겼나 보네. 저 알바생 언니 나 대할 땐 완전 무표정인데.
궁상맞게 이 많은 음식을 혼자 먹긴 싫겠다, 말동무도 구할 겸 비식대며 둘째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후 딸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오빠. "
- 안 사요.
통화가 끊어졌다. 이 새끼.
구겨진 얼굴로 전화를 다시 걸자 도민 오빠가 '아 왜' 대꾸하며 받았다.
아무리 지 동생이 발가락 떼보다 미개한 존재라 해도 통화 용건은 들어봐야 할 것 아냐!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친절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 나 학원인데, 오빠. "
- 응.
" 오빠랑 똑같이 생긴 사람 있다. "
- 난데 등신아.
나는 실실대던 웃음으로 사레가 들렸다. 뭐라고?
- 나라고, 등신아.
그 순간,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이 등을 타고 올랐다. 나는 찬찬히 데스크 쪽을 돌아보았다.
" …… "
온 세상의 불길함이 내게 몰려오는 기분을 아는가? 불안한 확신이 들지만 믿고 싶지는 않은 그 심정을.
당장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 목울대로 침을 삼켜내곤 물었다. 오빠가 여기 왜 있는데?
- 형이 니 학원 접수 끊고 오면 10만원 준다고 했다.
" …… "
- 돌대가리 막내 녀석까지 잡아오면 15만원.
툭. 손에서 음식 봉지가 떨어졌다. 나는 그 길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