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쁜 남자 』
W.린비
04. 삐삐
폭풍 같던 식사 후 도착한 재수 학원. 스무 명 남짓한 n 수생들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문제집을 풀었다.
내가 그 가운데에 앉아 안면 근육을 씰룩대고 있는 이유라 하믄, 오라한 때문에.
중간 중간 라한 오빠의 드립이 떠올라 죽을 맛이었다.
' 대학 안 가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죠? 아닙니다. 우주로 날아가 달을 치며 후회합니다. '
' 지성인들은 탕수육을 논할 때 부먹이냐 찍먹이냐 묻더군요. 도이씨는 어느 쪽이십니까? 저는 그냥 처먹입니다. ‘
‘ 그럼 전 이만 달 치러. ’
A 는 B 에게로 수렴하, 큼. C 는 D 에게로 수렴하지 않, 크흡.
픽, 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사레가 들린 척 목울대를 쳤지만, 주변 이들은 내가 홀로 실실대는 걸 눈치챈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눈총을 쏘기 시작했다. 조교님도 이곳을 향해 눈을 게슴츠레 뜨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웃음소리를 냈다간 당장에 원장 선생님 엉댕이에 날 대롱대롱 매달아버릴 것 같았다.
이만 진정해야 했다. 재수 학원은 경고 4번이 누적되면 퇴출이었다.
그러나 본래 웃지 말아야 할 상황에선 더 웃음이 난다고, 결국 내가 택한 것은 학원의 휴게실이었다. 20분 가량 벽을 치며 낄낄거리다 겨우 진정했다.
흥건한 눈가를 닦아내기도 잠시, 어느 새 폰을 들고 딴 짓 중이었다.
기운을 복돋아 준 것도 고마운데 라한 오빠 쇼핑몰에 좋은 구매 후기나 작성해줄까. 물론 내 도움 없이도 잘 돌아가긴 하지만은.
한 집 사는 오라버니의 사업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데일리 오라'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라한 오빠의 쇼핑몰은 유명했다. 예쁜 옷도 옷이지만, 옷 이름을 괴짜스럽게 짓는 곳으로. 모델들의 비주얼 뿐 아닌, 상품명으로도 고객들의 시선 몰이를 톡톡히 하는 곳이었다.
가령, 오빠는 털이 북실북실한 여성용 코트를 올려놓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 여사님, 어디 가세요 >
두툼한 신발에는, < 단화는 발 시렵다. 부츠 신어라 >. 거칠한 질감의 고동색 자켓에는, < 어디 뮤지컬에서 나무 역할 맡은 사람 있음 손 들어봐 >. 무늬가 난해한 스웨터에는, < 헤어지고 싶으면 이거 입고 남친 만나러 가라 >.
아나, 진짜.
안 그래도 눈물을 달고 울던 나는 콧물까지 질질 짜며 웃었다. 이미 공부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외에도 < 인중 인격 >, < 너만 수지냐? >, < 부도덕한 돌쇠 > 등등 안면을 괴롭게 하는 이름들에 나는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상스레 보는 주위 시선에도 끅끅대며 스크롤을 내리던 중이었다.
< 사랑에 빠진 삐삐 >
웃다가 숨을 멈췄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페이지를 클릭해봐도 옷 이름은 그대로였다.
뭐지. 이 심히 익숙한 단어.
여자 모델이 양갈래 머리를 한 채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양말과 함께….
나는 귓방망이를 얻은 맞은 사람처럼 벙 쪄 폰 화면을 바라봤다.
잘 나가는 옷 이름에 왜 내 별명이 붙어있는지 아시는 분. 이건,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입고 있었던 차림인데.
사고 회로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아니, 심장이 정지된 건가.
지금 이건, 외사랑 경험 6년째, 솔로부대 5성 장군인 내가 확대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 "
라한 오빠는 눈치챈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첫 만남 때 내가 오빠를 향해 지었던 표정이, 꿈에 그리던 산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는 것을.
문제는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니기럴, 헷갈려.
***
학원을 다녀왔는데 현관에 첫째 오빠 신발이 없었다.
아싸. 아직 안 들어왔나 보다.
얼른 저녁을 해결하고 오빠가 귀가하기 전에 방문을 걸어 잠그면 됐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면, 웬 남정네가 추락사를 한 것처럼 거실 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워있었다.
남들 같으면 놀랐겠지만, 나는 덤덤히 거실 불을 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 집에는 둘째 오빠라는 생물체가 굴러다녀요. 겁나 하찮은 미생물이지요.
내가 온 걸 알 텐데도 도민 오빠는 말없이 드러누워 폰 자판을 두드렸다.
보나마나 여자랑 문자질이겠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어장의 주인이 어련하실까.
이제껏 오빠 폰을 거쳐 간 여자들만 해도 사전 한 권은 나올 것이었다. 낯선 여자들한테 쏟을 관심, 집안 여자들한테도 투자해주면 좀 좋을까.
둘째 오빠는 얌채 같았다. 오빠 소리에 환장하면서 정작 제 친동생의 부름은 나몰라라 하는 얌채.
첫째 오빠가 나를 억, 소리나게 누르는 오빠라면, 둘째 오빠는 시종일관 깐족대는 놈이었다. 행동도 행동이지만, 대부분 말로 깐족깐족.
입을 저렇게 가볍게 놀리다간 언젠가 도민 오빠가 입술을 파닥대며 날아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오빠 새끼의 무례한 언행이 나한테만 국한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써글놈.
나는 가방을 벗으며 물었다.
" 웬일로 일찍 들어왔대? "
" 라한 녀석 때문에 멘탈에 무리가 와서 회복중이다. "
" 오빠가 왜? "
멘탈 붕괴는 오빠가 아니라 학교 후배란 여자 분이 겪어야 될 것 같은데.
오빠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 아, 그냥 어제 밤새 놀다 들어와서 돌아다니기 피곤해. "
" 어디서 놀았길래. "
" 어디겠냐. 대딩이 밤새 놀 곳이. "
" 술집? "
" 클럽. "
" 누구랑? "
" 누구겠냐. 성인 남자가 밤새 함께 놀 사람이. "
" 본인의 자아? "
" 순수한 척은. 여자다. "
그게 뭐 자랑이라고 저렇게 떳떳히 이야기했다.
" 라한 오빠는? "
" 방에서 통화 중. "
" 누구랑? "
" 여친. "
" 거짓말하네. "
" 잘 아네. 거래처랑 통화 중임. "
" 와, 오빠랑 정말 다르다. "
" 왜 초저녁부터 시비지? 시스터? "
큰 오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서. 아니, 사실 지금 좀 혼란스러워서.
복잡한 심정으로 서있는데, 도민 오빠가 발가락을 까딱하며 말했다.
" 그리고, 돼지. 나 정도면 훌륭한 남자다. "
" 참 나. 어딜 봐서. "
" 전화번호부를 봐서. "
" 여자 번호 많은 게 자랑이야? "
" 모쏠인 누구보다 낫지. "
" 나 모쏠 아니거든. 골든 레이디거든. "
" 수절 지켜서 수녀 될 거냐? 그 자존심 딱 3개월 간다에 내 초코빵을 건다. "
" 좀 두둑히 걸지. 라한 오빠는 파스타 정돈 걸었을 텐데. "
" 남 비교질 말고 너나 똑바로 살으렴, 시스터. 그리고 나도 돈벌이 하거든. 공연으로. "
" 그래봤자 곧 군대 가면서. "
" 야, 돼지. 내가 그 얘기 하지 말랬지. 그리고 군대는 너도 갈 거잖아? "
" 내가 왜 가! "
" 그럼 안 가려고 했어? 그 우람한 몸뚱이로? 그건 국가적 자원 낭비인데? "
남매란 존재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했다. 둘째 오빠와 나의 사이를 정의 내린다면 적 중에서도 천적인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내 외관을 비꼬는 게 부쩍 심해진 것 같은데, 곧 군대를 가서 저러나?
나는 오빠의 몸뚱이 발언을 무시하고 물었다.
" 저녁 뭐 먹을래? "
" 니 동족. "
" 그게 뭔데. "
" 삼겹살. "
둘째 오빠 새끼는 적당히란 것을 몰랐다. 나는 종족의 원수를 갚듯이 오빠의 다리 중앙 지점으로 책가방을 날렸다.
" 억! "
아프지? 오늘 과목별 문제집 다 들고 와서 좀 묵직했을 거다.
오빠가 고성을 지르며 몸을 접은 사이 나는 위층으로 두두다다, 뛰어 올라갔다.
라한 오빠! 저녁 뭐 먹을래?!
소리치며 방문을 열었을 때, 라한 오빠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응, 나도 사랑해요. "
근데, 거래처랑 연락한다던 오라한이 왜 폰에 대고 사랑한다고 하는지 아시는 분.
오빠가 사근히 웃으며 전화를 끊곤 문가를 돌아봤다.
" 어, 삐삐 왔어? "
" …… "
" 왜? "
" 오빠 여자 친구 생겼어? "
" 응? "
" 방금 사랑한다고.. "
" 아. 응, 있어. 여자친구. 어머니라고. "
에이, 뭐야. 난 또..
오빠가 웃었다. 그 유들유들한 웃음에 나는 늘 놀아나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라한 저 자식이 제일 나쁘다니까.
근데 저기, 오빠.
묻고 싶은 말(쇼핑몰에 삐삐 그거 뭐야?)이 안 나와서 쇼쇼, 거리고 있을 적에 라한 오빠가 폰을 살피다 자그맣게 탄성 소리를 냈다.
" 어, 맞다. "
" 왜? "
" 도준 형 안 데리고 왔다. 레스토랑에서. "
…뭐?
벽걸이 시계를 보니 7시를 향해 가는 시각이었다. 미쳤,
뜨악한 내게 라한 오빠가 폰을 들어보였다. 부재중 전화가 삼십 통이나 와있었다. 도준 오빠 이름으로. 헐.
" 삐삐 학원 바래다주고 형한테 간다는 걸 깜빡했네. 전화는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고. "
오빠가 바짓 주머니로 폰을 넣으며 말했다.
" 저녁 먹고 데리러 가지 뭐. "
사람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당장 데릴러 가지 못해?!?
라한 오빠는 그 날 귀가한 도준 오빠에게 죽빵을 맞았다.
일전에 오라한 보고 천재라고 한 거 취소였다. 좋아한단 말도 일단 보류였다.
" 막내, 너 일로와. 감히 내게 레를 치고 토꼈겠다. "
왜냐하면 나도 지금 도준 오빠에게 뒤 돌려차기를 맞을 위기니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