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쁜 남자 』
W. 린비
02. 첫째 오빠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오빠의 발 냄새를 맡고 기상했다.
뼛속까지 야행성이라 유독 아침잠이 많았는데, 어려서는 어머니의 허벅지 스메싱에 눈을 뜨곤 했지만 조금 자라서는 맷집이 생겨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 나를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오빠의 발 냄새.
제 시각에 동생을 기상 시키라는 어머니의 특명을 받은 뒤로, 첫째 오빠는 기상과 동시에 나의 방으로 와 내 면전에 발가락을 들이밀었다.
내가 괴로워하며 찌푸릴 때서야 오빠는 발을 물리고 다리를 벅벅, 긁으며 나갔다.
냄새만 갖고 보면 전도준이 아니라, 전'똥'준이었다. 사람한테서 이런 냄새가 나는 게 가능한 건가.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겨우 눈을 떠 일어나 앉았는데 전똥준씨가 다시 허벅지를 긁으며 들어왔다. 뭐냐는 듯 보자, 오빠가 눈앞에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 너 어제 학원에서 모의고사 봤지. "
아침부터 잠이 확 깨는 소리였다.
나는 눈곱을 떼는 척하며 얼버무렸다.
" 어? 어, 응. "
" 시험지 줘 봐. "
" 아,안 가져 왔는데. "
" 그걸 왜 안 가지고 와. "
" 깜빡했어. "
" 그럼 점수라도 말해. "
" 잊어버렸는데? "
" 또 발연기 한다. "
" 진짜야. "
" 어제 본 게 기억이 안 나면 치매다. 병원 가서 뇌 CT 찍을래? 잔말 말고 순순히 불어. "
오빠가 이토록 나의 모의 점수에 집착하는 이유는, 재수 학원을 때려치라고. 그 돈 내고 다녀서 그깟 점수를 받을 바에야 자기한테 과외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빠가 부모님께 과외비를 받아내려는 수작이란 걸 알았다.
집 나가 알바를 뛰자니 귀찮고, 마침 동생 녀석 하나가 재수생 신분으로 골골대고 있으니, 저의 돈줄로 전락시키기 딱 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추호도 오빠 밑에서 교육 받을 마음이 없었다. 보나마나 금붕어만도 못한 뇌라 구박하면서 자존감을 땅 끝까지 끌어내릴 것이 뻔했다.
오빠의 추궁에 버팅기던 중, 방문이 열렸다.
" 삐삐, 이거 어디다 놔둬? 어제 맡긴, "
나는 라한 오빠에게 들어오면 안 된다고 손사레를 쳤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러면 뭘 하나. 도준 오빠는 내 행위 예술을 보고 곧장 뒤를 돌았는 걸.
오빠가 라한 오빠에게 들린 29점짜리 시험지를 봐버렸다.
젠장. 오늘따라 꿈이 흉흉한 게 찝찝하더라니.
도준 오빠는 비 내린 시험지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 어제도 니 대가리는 참 열악했구나, 동생아. "
그리곤 라한 오빠에게서 시험지를 앗아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보나마나 지구 반대편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설득하러 가는 거겠지. 막내 멍청이 과외하겠다고.
나는 곧 닥쳐올 미래를 직감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허공으로 발을 차올릴 때까지도, 라한 오빠는 문가에 유들유들 웃으며 서있었다.
그 뻔뻔스러운 낯짝을 흘겨볼 때 쯤, 라한 오빠가 말했다.
" 미안. 파스타 사줄까? "
파스타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내 기분을 달래주는.
또한 방년 23세 오라한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제가 실례를 한 이들에게 남발하는 말이기도 했다.
" 오빠. "
" 응. "
" 오빠가 제일 나빠. "
따지고 보면 오라한 저 자식이 제일 지능적이었다.
" 그래서 안 먹어, 삐삐? "
" 먹어. 가. "
아침부터 파스타라니, 맛있을 것 같았다.
***
어째서 내 기분 풀어주러 온 파스타 집에 도준 오빠랑 동행한 거냐고?!
나는 마주앉은 첫째 오빠 새끼의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옆 자리의 오라한(23세, 자상한 넌씨눈)을 째려봤다. 라한 오빠는 여유롭게 메뉴판을 들여 보다가 물었다.
" 삐삐, 뭐 먹을래? "
나는 골탕 좀 먹어보라는 심보로 답했다.
" 여기서 제일 비싼 거. "
" 이야, 내 스타일이다~ "
그러나 내 악의가 무색하게도 라한 오빠는 도무지 돈 쓰는 일에 기분 상해하는 법이 없었다.
깜빡했네. 오빠가 모태 금수저라는 걸. 이 남자에게 파스타 한 끼쯤은 개 껌 값인 시절이 있었다는 걸.
궁시렁대던 중 라한 오빠가 주문을 하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은근슬쩍 따라가려다 도준 오빠에게 목덜미가 잡혀 도로 앉혀졌다.
억.
" 곱게 앉아라. "
" 나,나 추가 주문할 게 있어. "
" 죽빵 맞기 싫으면 의자랑 한 몸이 되어 앉아있는 게 좋을 거야. "
험한 소리를 들은 것은 나인데, 도준 오빠의 표정이 더 심각했다.
오빠는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모의 시험지를 꺼내놓았다.
아무리 내 점수가 처참하다 해도 저걸 여기까지 들고 오다니. 징글징글한 놈! 옆 테이블 꼬맹이가 쳐다보잖아악!
오빠는 내 쪽팔림을 아랑곳 않고 점수를 툭툭, 치며 말했다.
" 이게 네 성적이란 말이지. "
" …… "
" 꿈을 심어줄까, 현실을 알려줄까. "
" 음. 꿈? "
나는 세상 해맑은 막내 연기를 하다 오빠의 살벌한 시선에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짜 죽빵을 때릴 것 같았다.
" …현실이요. "
" 너 학원 왜 다니냐? 29점이 말이 되냐? "
" 아, 시험이 어려웠어. "
" 그럼 니 등수는 뭐로 설명되냐. 다 같이 어려웠는데 너는 왜 뒤에서 2등이냐고. "
" …… "
" 니가 노벨 상은 못 받을지 언정, 이런 쪽지 시험쯤은 잘 받아야하지 않냐? "
" …… "
" 아주 무식이야, 무식이. 상 무식이. "
" 아, 무식한 게 죄야?! "
" 어, 죄야. "
첫째 오빠는 아버지를 닮아 언행이 참 직설적이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알아서 사람들이 꼬일 상인데, 굳이 모난 성격을 드러내서 내쳤다.
귀찮아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그쪽으로는 영 쑥맥인 건지. 나는 괜한 의구심을 갖다 오빠의 역대 애인과 친구들을 떠올리곤 걱정을 곱게 접었다.
그렇지. 오빠는 사람을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지. 집안 배경 빼곤 항상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탑 클래스였으니까. 아,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빠가 더 두고 볼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잔말 말고 학원 때려쳐. "
" 시,싫어. "
" 네가 아직도 네 현실을 모르나본데, 이 점수 똑바로 보고 말해라. "
" 봤어! 그래도 싫어! 학원에서 배울 거야! "
" 지금 네 주장 수준은 계이름으로 치면 레 정도 된다. "
" 뭔 소리야! "
" 도를 지나쳐. 억지라고. "
" 그러는 오빠 말도 억지잖아! "
" 너 저번에 나랑 약속했지 않냐? 한 번만 더 20점대 점수 나오면 곱게 학원 짐 챙겨 나오기로. "
" 고작 1점 모자라거든! "
" 1점도 점수다. 그 점수로 수능 볼 때 대학이 갈려. "
" 그래서 뭐! 오빠 대학 잘 갔으면 됐지, 왜 내 인생 가지고 그래?! "
" 인생이 인생이 아니라 기생 같아서 하는 말이다. "
오빠는 자기 앞가림을 잘한다고 남의 인생에까지 왈가왈부할 특권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게 첫째들의 특성인 건지.
아무튼 그런 불필요한 친절은 내가 사양했다.
서로 고집을 부리며 대치하다보니 언성이 높아졌다. 옆 테이블 꼬맹이가 이젠 대놓고 쩝쩝대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는 상식도 없는 게 머리만 크다며 내게 대갈장군이라 했다.
“ 어쩌라고! 지는 냄새 나는 아저씨면서! ”
장유유서가 인생 신조인 오빠는 나의 예의 없는 태도에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그런다고 누가 겁 먹을 줄 알아!!!!
...먹었다, 겁.
나는 내 저항이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알고 곧장 통로 계단으로 줄행랑을 쳤다.
마침 라한 오빠가 피클 담긴 쟁반을 든 채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나는 첫째 오빠가 들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달려오는 것에 기겁을 하고 라한 오빠의 뒤로 숨었다.
" 끄악! 라한 오빠! 막아! "
" 너 이...! 일로 안 와?! "
" 안 가! 안 갈 거야! 내 인생이야! 오빠 니가 뭔데 참견해? "
라한 오빠는 웃는 상으로 제 상체를 휙휙, 움직여 오빠 새끼를 막아주었다. 가끔 고의로 나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 같아도, 이럴 땐 은근 도움이 되는 방패였다.
이어 라한 오빠가 등 뒤로 슬쩍, 차키를 건넸다. 나는 그를 잽싸게 받아들고 계단을 뛰어내렸다.
첫째 오빠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너 임마 오늘 집에 못 들어오는 줄 알아! 라한 오빠가 도준 오빠를 진정시키는 소리도.
" 지금 조금 뒤쳐져도 다 잘 살게 돼있어요, 형. 중졸인 저도 자기 앞가림은 하잖습니까. "
이놈의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라한 오빠만큼은 내 편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오늘은 찜질방에서 자던가 해야지 원.
" 닥쳐, 금수저. 막내 도로 잡아와. "
" 예, 형님. "
내 편…맞겠지?
***
씨. 파스타를 한 입도 못 먹고 쫓겨났다. 내가 자처해서 도망 온 거였지만.
막상 차를 몰고 벗어났지만(대학은 떨어졌어도 운전면허 시험은 붙었다),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더 얄미운 둘째 오빠를 마주칠 게 뻔하고.
동네 놀이터 옆에 차를 대고 서있는데, 몇 분 뒤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라한 오빠였다. 오빠는 내가 혼이 났을 때 이곳에 열을 식히러 온다는 것을 알았다.
" 형이 삐삐 너 데려오래. "
" 그래서 잡아가게? "
" 당연히 아니지. "
" 그럼 왜 왔어. "
" 밥 사주러? 가자. 거기 말고 더 맛있는데 알아. "
오빠가 자리를 바꾸자며 차 문을 열었다.
남들 같으면 이런 남매 싸움에 낑겨서 당황할 법도 한데. 7년을 한 집에 살아서 그런가? 라한 오빠의 대처는 유연했다.
" 오빠. "
" 응? "
" 혹시 이게 계획이었어? "
레스토랑에 큰 오빠 떼어 놓으려는?
" 응. 형도 배 채워주면 조용해지잖아. "
" …… "
" 그리고 내가 계산 안 하고 나와서, 형 나 돌아갈 때까지 거기서 못 나와. "
라한 오빠가 겉옷 주머니에서 지갑 두 개를 꺼내보였다. 하나는 자기 꺼. 남은 하나는 도준 오빠 꺼.
아까 몸싸움을 할 때 첫째 오빠 품에서 슬쩍, 한 모양이었다.
" 그럼 염라대왕도 잡아뒀겠다, 파스타 먹으러 갈까 삐삐? "
...가끔 생각하는 건데, 천재는 도준 오빠가 아니라 이 사람인 것 같았다.